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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드린 미래 (창 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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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드린 미래 (창 22:1~19)

I. 서론

오늘은 7월 1일 입니다. 벌써 훌쩍 한해의 절반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나머지 절반도 그렇게 훌쩍 우리 곁을 지나갈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지나가는 세월 이야기 하다보면 쉽게 푸념으로 연결되고, 그러다보면 주로 두 가지 생각에 도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이렇게 살다가 끝나는 것인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이라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중에 두 번째,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뭔가 해야지’라는 쪽으로 자신을 세워갑니다. 그것은 아마, 우리의 삶이 좀 흔들리기는 해도, 아주 무너져 버릴 수는 없다는 절박함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나마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는 것은 참 소중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뒤를 돌아보아야 앞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래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미래를 꼼꼼히 챙기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미래가 있으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어쨌든 이제는 연금이 없으면 못살 것 같고, 늙어서 살 집한 채라도 장만하지 못하면 정말 노후에 땅속에라도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만큼 이래를 챙기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여지없이 우리의 삶의 아주 실제적인 터전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면, 그런 변화가 우리의 삶속에 가장 구체적으로 반영되는 것은 바로 바로 ‘부모-자식’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모-자식관계가 변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뿌리가 흔들린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부모는 자식이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자식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자식한테 의탁하겠다는 부모가 없어지고 있다고 해야 맞겠습니다.

그렇다고 자식의 미래가 불투명해서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그 ‘자식’의 앞날이 밝은 미래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자녀의 밝은 미래를 소망하지 않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 미래가 단지 그 자녀의 미래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가 걸린 미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게 무슨 ‘노후대비’냐 하면, 그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그토록 속물은 아닐 겁니다. 그럼 왜 우리는 자식에게서 그토록 ‘우리의 미래’를 보려할까요? 저는 그것이 ‘인간의 미래’요, ‘세상의 미래’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옛날 그 유명했던 ‘모래시계’에 나오는 주인공, 남자 검사 박상원과 그 아내 누구입니까, 그 하숙집 딸... 하였튼 둘이 결혼해서, 대쪽 같은 초임검사 박상원이 그야말로 ‘정의의 칼’을 정치권에 대려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말이 쉽지, 결국 층층 권력의 힘에 붙여 실의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 자포자기에 빠져가는 박상원을 다시 ‘정의의 사도’로 일으키는 계기가 된 것이 무엇으로 나오냐 하면, 아내가 첫 아기를 임신한 것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박상원이 “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허탈해 하며 포기하려하자, 그 때 아내가 아이의 임신소식을 처음으로 이렇게 알립니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우리 아기를 위해서, 우리 아기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라고...” 박상원이 그 두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 스토리란 다 그렇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뭐 우리가 다 이렇게 고상하고 멋있지는 않아도, 적어도 우리의 자녀들에게서 일어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없는 사람이라면 가장 불쌍한 사람이요, 그런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세대는 아마도 가장 암울한 세대일 것입니다.

II. 아브라함의 번제

오늘 우리가 읽은 그 유명한 성경이야기는 그런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얼토당토’않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부모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상황은 그야말로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하여 주실 때는 언제고, 또 그 언약의 아들을 내 놓으라는 것이니, 정말 ‘딜렘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하나님께 드린 미래

이 이야기에서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무엇을 요구하였던 것인가?”
“그리고 아브라함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우리는 이 대답의 실마리를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분명 ‘이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2:1).

이 사건은 아브라함의 말년 약 117세 정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가 175세를 살았다면 인생 2/3선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요즘 평균 수명을 75로 잡아 아브라함의 인생을 환산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30세 이립(而立)이라는 나이에 본토친척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이고,
불혹(不惑)의 나이40에 언약의 미래가 담긴 아들 이삭을 나은 것이고,
또 50세 지천명(知天命)의 때, 그러니까 뒤 늦게 아들을 두어 십대의 아들을 데리고 이 시험을 견뎌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전 생애에서 본다면, 이 끔직한 시험은 그의 신앙의 여정의 정점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사건을 정점으로 해서, 이전의 아브라함의 실수와 비겁한 행동은 이제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온전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어떤, 그 무엇을 시험하였을까요? 이 이야기에서 그것은 사실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그것도 ‘언약의 아들’을 바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세기를 풍미했던 저명한 구약 학자, 폰 라드는 그 의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사랑받는 자식, 그것을 훨씬 넘는 존재였다. 이삭에게는 장차 올 먼 세대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으로 끌어들일 ‘축복’이 맡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옛적에 부르심을 받고 길을 나섰을 때 과거와 결별했듯이, 이제 그는 이 모리아 산에서 자신의 미래도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다 바치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미래와 민족의 미래는 오직 이 아들에게만 달려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내 아들, 내 미래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언약의 미래요, 세상의 미래였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내게 아끼지 않았으니,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순종을 시험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순종의 행위로 나가기 위해 아브라함은 더할 수 없는, 이 끔찍이도 어두운 터널을 침묵으로 지나야 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욥과 같은 항변과 탄원도 충분히 있을법한데, ‘하나님 입장 좀 바꿔놓고 생각해 봅시다’하며 울고 불며 소리쳤을 법한데, 성경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침착하고 평온한 그의 행동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침묵의 행동은 다름 아닌 ‘순종의 행위’였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맺은 언약의 미래는 결국 하나님께 달렸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가 어떤 동기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는 다 해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 그 행동이 자신의 미래를 통째로 드리는 행동이었다는 것은 분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미래를 드린다는 것은 참 어렵고도 큰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헌신의 결단이 있어야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고 바르게 쓰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경험하지 못하면 하나님 일은 아예 꿈꾸기도 어렵습니다. 오늘날 더 이상 하나님은 자식을 바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자식보다 더한 것을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돈? 집한 채? 아니면 직장?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요구하시는데, 그것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정말 ‘대책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안후로 저는 젊은이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젊은이들에게는 노인보다 훨씬 더 크고 장대한 미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학교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저는 정말 천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저는 청년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면서 반드시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을 시킵니다. 좀 추상적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동자는 정확히 사람의 심장을 향하고 있고, 또 그 진심을 한 치의 에누리도 없이 송두리째 하나님의 마음에 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작품을 만들어 가십니다. 적어도 이제까지 제가 경험해 온 바로는 하나님은 정말 그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이 헌신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청년이 아닌, ‘노인’ 아브라함에게 요청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경륜과 삶의 지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젊은이의 헌신이 하나님의 일을 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면, 경륜과 지혜를 쌓은 이 시대의 아브라함의 헌신은 이 혼돈의 세상에 구체적인 하나님의 미래를 제시할 참으로 정련된 도구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이 진지한 시험대에서 우리의 미래를 순종의 제사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미래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드린 것이 ‘자신의 미래’였다면, 그 대신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의 미래’가 확고하게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제 그를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우리 다함께 22:15-18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것은 그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올 때, 듣고 좇아 온 하나님의 첫 부름 그대로입니다. 그 부름의 내용은 변화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자신을 두시고 맹세하시며 당신의 미래를 아브라함에게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좀 그렇기는 하지만 주식을 예로 들면 이해가 빠르겠습니다. 거대한 투자자가 한 회사에 자신의 자산 전체를 건 투자를 했다고 하지요. 그러면 그것은 그 회사의 미래에 자신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거는 순간 그 회사가 자신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 이후로 그의 미래는 전적으로 그 회사의 미래에 걸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 이렇게 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서 본격적인 ‘배팅’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작업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복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땅과 자손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를 통해서 세상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아브라함의 원초적 부름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통해 분명히 자신의 부름을 균형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변화입니다.

우리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은 이제 첫 번째 부름에서 서서히 두 번째 부름에 눈을 떠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에서 “너를 통하여 세상 만민이 복을 받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그 중심이 옮아가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근 10여 년 전에 박완서 선생님의 에세이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을 들었습니다. 순식간에 읽어 내릴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깊은 삶의 경험을 담고 있었습니다. 불과 넉 달 상간으로 남편을 잃고, 연이어 서울대 치대를 다니던 이 어머니의 ‘장한 아들’을 사고로 잃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읽기였습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박완서 선생님의 질문은 오직, “하나님,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한 말씀만 하소서”였습니다. “왜 내 아들입니까?”라는 처절한 그의 고뇌의 끝에 그가 비로소 도달한 것은 오히려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이 평온하고 유복한 삶에 던져진 이 파문은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한 말씀이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제까지의 ‘나를 위한 삶’이었던 그를 일깨워 ‘이웃과 세상을 위한 삶’으로 눈을 뜨게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0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저를 많이 아껴주셨던 교회의 권사님 한분이 필리핀에서 사고로 아들을 잃었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위로할 말이 없어, 이 책을 대문 앞 우체통에 그저 꽃아 놓고 돌아섰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바로 3일 전, 제 학창시절 거의 전체를 함께 고민하며 씨름했던 교회 후배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습니다. 40세의 젊은 나이로 참된 교육을 위해 20여년을 수고했던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었습니다. 참 아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우리가 학창시절에 그 집에서 밤을 세우며 함께 인생과 역사를 토론하며 때마다, 늘 왕만두를 손수 빚어주셨던 70이 가까운 권사님입니다. 장례식장에 몸져누우신 그분을 뵙고, 가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오랫동안 두 손을 잡고 울다가 왔습니다. 잘 읽으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또 한 번 이 책을 선사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이런 위기를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위기로 우리를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으로 세우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즉 ‘세상을 위한 존재’라는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은 정확히 이런 의미입니다. 자신을 통하여 세상이 축복을 받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세상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부름을 정확히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부름으로 이해한다면, 이렇게 선언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교회 자신을 위함이 아니요, 세상을 위함인 것이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미래가 위임되어 있는 한,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세상의 미래인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너희는 땅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란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3. 세상의 미래

그런데 이 성경 이야기의 끝머리는 아주 냉정하게 그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며, 대뜸,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게 우리의 삶을 좌우하고 있는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흔히 ‘이레’라고 읽는 이 말은 원래 ‘준비하다’가 아니라, ‘보다’라는 뜻인데 그것을 의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의 뜻을 살리자면 ‘여호와 이레’란 ‘여호와께서 보신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마지막 말인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원어로 ‘예흐봐 예라예’로 적혀있는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보이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뜻을 쉽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곳 이름을 ‘하나님이 보신다’라고 불렀으나, 후대 사람들은 그곳을 ‘하나님이 보이는 곳’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미래를 드린 그 순종의 땅에서 하나님이 스스로를 나타내시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후대에 하나님의 계시의 땅, 즉 성전자리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 산에서 ‘하나님이 보인다’고 했을까요? 하나님이 보이는 세상,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세상, 우리는 그것을 주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말합니다.

후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보면서, 아브라함의 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할 때 그의 미래는 무너진 것 같았으나, 실은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미래로 그를 지탱하고 계시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보이게 되는’ 세상의 미래,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그것은 지상낙원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 미래를 보는 사람은 그 미래로 현실을 살게 됩니다. 저는 그것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의 ‘거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과 주님의 교회를 아브라함과 같이 시험하고 계십니다.

“너의 미래를 내게 바치라! 그리하면 나의 미래를 선물로 주겠다. 그리고 우리의 이 일을 통하여 세상의 미래를 열어가겠다.”

저는 감히, 이 미래를 하나님께서 조성하실 ‘통일의 길’로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과 교회는 통일이라는 미래를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세속적인 정치와 경제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일에 ‘작업 들어가셨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우리는 정말 그 하나님의 역사의 정점에 서 하나님의 시험을 받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화해의 복음을 소통하는 ‘결정적’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분단의 문제를 넘어가느냐 못하느냐의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실 미래는, 늘 그것이 어떤 선물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은 더도 덜도 아닌,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우리의 일’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선사하시기로 작심하신, 그 선물꾸러미는 우리가 ‘채워갈 수 있는’ 그런 선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선물을 풍성한 열매로 채워,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풀어 놓아 행복을 맛보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주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미래’가 될 것입니다. 다시 해방과 같은 준비 없는 ‘선물’보따리가 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60여 년간 한편으로는 허리가 휘도록 땀 흘려 일하며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스럽게 민주화를 이루어내며, 그 선물을 잘 가꿔왔습니다. 돌아보면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통일을 통해 주실 ‘새로운 미래’, 그 하나님의 선물은 고통스럽더라도, ‘힘겹더라도’ 우리는 순종으로 그 내용물을 채워가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처럼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이 손길과 변화하고 있는 이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아! 지금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구나!” 여호와 예라예! “세상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구나!”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는 그것을 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세상은 지금 ‘새 나라’라는 이 ‘선물’을 준비하며 채워가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미래’를 볼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 이제 우리 함께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것을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박성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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