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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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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1-3, 8-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소설 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미하일이라는 천사가 하나님의 벌을 받고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그 이유는 쌍둥이를 갓 낳은 한 가난한 여인의 목숨을 취해 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천사 미하일은 아빠도 이미 죽고 없고 의지할 친척도 없는 어린 핏덩이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산모는 죽게 되었고 미하일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벌로 이 땅으로 추방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 미하일에게 그곳에서 다음 세 가지 것을 알아오기 전까지는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질문 세 가지는, 첫째 ‘사람의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셋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습니다.

날개 잃은 천사 미하일은 추운 겨울에 벌거숭이 상태로 교회 옆 건물에 떨어졌습니다. 그 때 그곳을 지나던 가난한 구두장이 부부가 이 천사를 도와줍니다. 구두장이 부부는 생활고에 시달려 늘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벌거벗고 추위에 떨고 있는 불쌍한 청년을 보자 그 안에서 측은지심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천사 미하일은 ‘사람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답을 얻습니다. 사람 안에는 다름 아닌 ‘사랑’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한 해 내내 아무리 신어도 닳지도 찢어지지도 않는 장화를 만들어 달라는 어떤 사나이의 주문을 받으면서 알게 됩니다. 그때 천사 마하일은 이 사나이 뒤를 따르고 있는 자기 동료, 죽음의 천사를 보았습니다. 이 사나이는 곧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미하일은 장화 대신 죽은 사람에게나 필요한 슬리퍼를 만들어줍니다. 미하일은 이를 통해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그 두 대답을 알고 난 한참 후 여섯 살쯤 되는 쌍둥이 아이들이 미하일의 가게를 방문합니다. 이 아이들을 보고 미하일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목숨을 살려주려고 했던 그 여인이 낳았던 쌍둥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밝고 건강했습니다. 그 친모가 죽자 아이들을 불쌍히 여긴 그 이웃집 아주머니가 이 쌍둥이를 자기 자식처럼 길렀던 것입니다. 여기서 미하일은 세 번째 답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이웃의 사랑에 의해서 이렇게 건강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천사 미하일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깨달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살피는 마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삽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인간은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수많은 유행가나 노래, 소설이나 영화 등 대부분의 주제가 사랑인 것을 볼 때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13절 말씀도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보다 사랑

기독교에서 믿음이란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우리는 하나님이란 존재와 그의 약속을 믿음으로 알게 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11:1,3). 우리는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거나 능력을 받기도 하며, 어두움의 세력들을 이기기도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그렇지만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믿음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결국 그 목적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며 교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이유도 결국 그 목적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믿음의 능력으로 자기를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고 서로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여 마치 믿음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말씀들이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13장 1-3절에서 사랑이라는 그 목적을 잃어버리고 믿음 자체가 목적으로 전도된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우리 영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굳건한 기도의 사람이 되고 또 다른 사람을 기도로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이것을 자기 자랑의 수단으로 삼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유창하게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마치 신비의 소리로 기도하여 자신이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자 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이란 것은 어떤 신비스런 지식의 말이나 아름다운 권면의 말이거나, 설교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천사의 말을 하는 이유도 결국 그 말을 통해 자신을 영적으로 살리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이런 천사의 말이나 설교가 ‘나 이만큼 유창하게 잘해’ 하는 자기 과시가 되기 쉽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제 설교를 많이 반성합니다. 설교는 유창한 지식, 논리적인 사변의 자랑이 아닙니다. 나를 자랑하기 위해 보이는 쇼도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통해 교회 공동체에 힘과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어눌한 설교, 죽 쓰는 설교가 더 은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잘 드러났다면 말입니다. 인간의 말이나 지식이 유려하면 오히려 그 인간의 영광에 가려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 설교 얼마나 잘하나?’ ‘이 말씀은 괜찮네’ 하는 태도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설교는 자기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내 산에서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듯이 오늘날에는 우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라는 목적을 상실한 설교나 기도에 대해 사도 바울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그것은 단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빈 깡통처럼 소리만 요란하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음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도나 말이나 설교가 한낱 소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절에서는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 말씀합니다. 예언의 목적이 여기 있습니다. 예언은 미래 일을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내가 당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어 하며 협박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언 은사 받은 분들은 이런 점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예언은 사람을 돕는 것이지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매이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점쟁이들이 그래요. 점쟁이들한테 가면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맞힙니다. 우리 과거에 대해서 족집게로 집어내듯이 압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해서 어떤 영적 세력이나 운명이 우리를 주장하는 듯이 꼼짝 못하게 하고는 미래의 선택을 강요합니다. 여러분, 미래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예언은 우리의 책임인 미래의 선택을 돕는 것이 되어야지 주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여러분 믿음에는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 필요한 일이라면 주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왜 쓸데없이 멀쩡한 산을 옮깁니까? 만약 그것이 자기 능력의 과시라면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흔히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하나님께서는 태산이라고 옮기게 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점점 더 강도를 더해 갑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 가진 모든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사랑은 얼마나 대단한 사랑입니까?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는 믿음은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실제 고린도 인근의 아테네란 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인의 무덤’이란 곳이 있는데 어떤 인도의 승려가 신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여 자기 몸을 분신 공양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기 몸을 내어주는,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한 사랑 같아 보이는 것도 실상은 사랑이 아닐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사랑 같지만 자기 자랑에 속을 때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그 목적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하나님의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한다는 자기 자랑이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박애주의적 경향의 사랑을 가진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란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힐 용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저 거지와 하룻밤을 잘 수는 없다.” 이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일는지도 모릅니다. 기도나 선행보다는 기도나 선행을 하고 있는 자신에 취해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지독하고도 교묘한 자기애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도 그 눈은 누가 날 봐주지 않다 하며 두리번거립니다. 주님은 이것을 외식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의 실제 목적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전도를 하고 교회 봉사를 하는데 그것이 한 영혼을 정말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자기 조직 확장의 한 수단이거나 자기 유익을 교묘히 위장한 것인지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가식된 사랑은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열매 또한 아름답지 못합니다.

완전한 기쁨은 어디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주실 때는 그 일이 목적이 아니고 그 일을 통해서 우리와 사귐을 갖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일에만 매달린다면 비록 그 일에 성공했을지라도 온전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반면에 일에는 실패했을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온전한 성공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일이나 성공에 쫓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렵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십니까? 하고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 어려움을 겪도록 만드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와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정신 팔려 있고, 땅만 바라보고 사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며 나를 찾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사랑의 손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의 이런 사랑의 사인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아니면 시련에 지쳐 나가떨어지고 맙니다. 술에 찌들어 살거나 운명에 대한 불평이나 탄식으로 시간을 다 보내고 맙니다. 인생도 낭비하고 시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모험을 각오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기로 몰아넣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볼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것은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 걸을 때도 너무 빨리 걷지 마십시오. 여러분 영혼이 못 쫓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정신없이 살 때 하나님께서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거나 병상에 누워서야 하나님을 찾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STOP!" 하고 명령해야 합니다. 일에 쫓기지 말고 그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이 삽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서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지 하나님의 일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성 프란시스의 예화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그 제자와 함께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가 성 프란시스에게 사람에게 참된 기쁨이 어디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프란시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덕과 감화의 모범을 보여준다 해도 거기에 완전한 기쁨은 없소.”
그렇게 추위를 견디면 걷다가 다시 프란시스가 말했습니다.
“형제여, 우리가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마귀를 내어 쫓으며, 죽은 자를 다시 살린다 한들 거기에는 완전한 기쁨이 없소.”
또 좀 더 가다가 프란시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여, 우리가 온갖 말과 지식에 능통하고, 장래일과 심지어 인간 양심의 비밀을 꿰뚫어 본다한들 거기에도 완전한 기쁨이 없소.”
한겨울 살을 에는 바람은 연이어 불고 있는데 묵묵히 걷던 프란시스가 또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여, 우리가 선교에 아주 능하여 이교도와 불신자들을 모두 회심시켜 그리스도를 믿게 한다할지라도 거기에도 완전한 기쁨이 없소.”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가다 어느 집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문지기가 나오더니 다짜고짜 “이 거렁뱅이 도둑놈들아” 하며 욕설을 하며 뺨을 때리며 몽둥이로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렇게 쫓게 나면서 비로소 성 프란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바로 여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소.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달게 참아 내고, 이것이 바로 복되신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가난과 고통, 모욕이라 생각하고 즐거워한다면 바로 거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소”(『성 프란치스꼬의 잔꽃송이들』 중에서)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여러분의 덕행이나, 능력이나, 지식이나, 업적에서 기쁨을 찾지 마십시오. 이는 다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저는 이것을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제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와의 깊은 사랑의 교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 가난과 고난 가운데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 프란시스는 바로 이 가난과 고통이 가장 완전한 기쁨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성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성 프란시스의 교훈을 통해 참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깨닫기를 바랍니다. 참된 기쁨은 내가 한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의 마지막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영원한 사랑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철이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에 대한 소중함입니다. 우리가 추구했던 물질도 건강도 미모도 지식도 다 어느 정도 가면 그게 그 겁니다. 모두 평준화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50을 넘으면 잘생긴 사람이나 못생긴 사람이나 같아집니다. 미모의 평준화입니다. 60을 넘기면 배운 사람이나 안 배운 사람이나 같아집니다. 지식의 평준화입니다. 70을 넘기면 부자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같아집니다. 물질의 평준화입니다. 80, 90을 넘기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같아집니다. 건강과 생사의 평준화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남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끝까지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바로 옆에 있는 배우자요, 우리의 장례식을 치러 줄 사람은 바로 우리 자녀들입니다. 이는 결국 사랑만 남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이생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서도 필요합니다. 오늘 읽은 8절 말씀대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야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들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유한한 육신을 가지고 부분적인 지식만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마치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지금은 마치 거울을 보듯, 사도 바울 당시의 거울은 요즘과 같이 분명하게 보이는 거울이 아니라 청동으로 만든 흐릿한 거울이었는데, 마치 그 거울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희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예언이고 지식이고 믿음입니다. 장래 일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내가 겪은 고난이나 불운의 의미를 잘 몰라 답답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누가 그 고통에 대한 지식을 알려 준다면 우리는 서슴치 않고 달려 갈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인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슨 선하신 뜻이 있겠지 하며 믿음으로 견디어 나가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모든 것이 명확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 이 일이 그래서 이렇게 되었구나하고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명확한 지식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예언이나 지식이나 믿음은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오직 필요한 것은 사랑뿐입니다. 하늘나라는 사랑으로 사는 나라입니다. 많이 사랑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많은 사람이 행복한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저는 그래서 사랑이 상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나라는 물질이 부족하지 않은 곳입니다. 그곳에서 면류관을 쓰거나 많은 상을 받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천국은 사랑을 가장 많이 하는 자가 가장 큰 자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가장 잘 사랑하는 자가 가장 행복한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도 사랑 때문입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우리는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며 온전한 사랑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12:25)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하늘나라가 사랑의 나라임을 잘 보여준다 생각합니다. 부부와 우리 가정만의 사랑을 넘어 하늘 나라는 모든 사람이 내 사랑하는 한 형제요 자매가 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교회라는 공동체로 모이고 이곳에서 서로 나누는 사랑은 장차 우리가 들어가게 될 천국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서로 사랑함으로 천국을 맛보지 못하면 장차 천국에서도 함께 살기 어렵습니다. 자기 생각과 마음을 낮추고 이곳에서 먼저 천국을 경험하며 훈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사랑만이 영원하며 사랑만이 우리가 힘써야 될 계명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랑이 있는 곳에 함께 하십니다. 이 사랑을 힘써 이루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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