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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들 (미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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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선지자가 활동하기 직전의 남왕국은 웃시야와 요담의 유능한 통치 밑에서 큰 발전을 이룩한 시기 였습니다. 그러나 요담을 이어 왕이 된 아하스는 불행하게도 이방 종교에 깊이 빠져들면서 자기의 자식을 희생 제물로 불태우기까지 하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아하스의 이러한 잘못된 통치는 지배 계층 특히 도시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히스기야가 모든 우상숭배와 이방종교를 완전히 제거하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일으킴으로써 상황이 조금 나아지기는 하였지만 기득권을 가진 도시 지도자들의 불법과 탐욕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미가의 눈으로 볼 때 예루살렘에 거하는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 자들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며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을 굽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일반 백성들의 밭과 집들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종의 부재지주들 이었습니다 그들의 탐욕은 부동산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의 겉옷을 벗겼으며, 가죽을 벗기고  살을 뜯어 먹는 사나운 육식동물과 같이 백성들의 삶을 빼앗아 갔으며 그들의 집에는 백성들에게서 빼앗은 불의의 재물들이 가득 했으며  탐욕을 상징하는 기구들 곧 축소시킨 됫박, 부정한 저울, 거짓 저울추 등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침상에서 악을 꾀하고 간사를 경영하는 등의 향락 생활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 재판을 자기들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돈을 손에 쥐어 주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하는 경제 동물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돈을 보고서 점을 치는 점쟁이들이었으며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재앙이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평강만을 외치는 자들 이었습니다.

올바른 길을 가르쳐야 할 도시 지도자들이 이처럼 화인 맞은 양심으로 백성을 다스리므로 공의는 설 수 없었습니다. 참 예언자들의 예언마저 금하면서 하나님이 너무 성급하시다고 엄살을 부리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서 물고기를 낚으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은 한마디로 미 7:3절에서 말씀 하듯이 『악한 일을 하는 데는 이력이 난 사람들이고. 모두가 탐욕스러운 관리, 돈에 매수된 재판관, 사리사욕을 채우는 권력자 뿐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 백성들은 어떠했을까요? 백성들도 거짓말쟁이요 그들의 혀는 속이는 말만 한다는 것입니다.

미 7:2 절 이하에서 “ 이 땅에 신실한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직한 사람이라고는 볼래야 볼 수도 없다.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다만, 사람을 죽이려고 숨어서 기다리는 자들과, 이웃을 올가미에 걸어서 잡으려고 하는 자들뿐이다』
그들 가운데서 제일 좋다고 하는 자도 쓸모없는 잡초와 같고, 가장 정직하다고 하는 자도 가시나무 울타리보다 더 고약하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가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죄악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그들의 죄악을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미가 선지자의 시대와 비교해보면 우리의 사회상은 어떻습니까? 정치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의 삶속에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그러지고 뒤틀린 시대에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바라고 기대하시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공의롭지 못한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의 삶 가운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멸망의 심판으로부터 구원 받기위해 하나님은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그 첫 번째가 공의를 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공의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을 본받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올바른 삶의 도를 행하는 것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지키며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공의를 행하라함은 법정을 포함한 모든 구체적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공평과 정의를 행하라는 것을 의미 합니다.  이것은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토록 강조했던 신앙의 규범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토하여 암 5:14 이하에서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법정에서 올바르게 재판하여라.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말씀하십니다..

한국기독교목회자 협의회가 한국 교회 대 부흥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7년 5월27일부터 6월9일 까지 전국의 성도 1천500명을 대상으로 한국 교회의 미래방향성에 대한 의식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교회의 개신교가 타종교에 비해 호감을 덜 받는 이유는 무엇으로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꼽은 응답자가 57,5% 일부교회 지도자들의 타락 41.1%,이  주요 원인으로 지적 하였습니다.

박완서의 수필 “자전거 도둑” 이라는 책에 보면 16세의 소년이 자신의 도덕적 기준과 어른들의 삶의 기준이 다름으로 인해 자신의 일관된 삶을 위해 자신이 머물던 자리를 과감하게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인공 수남이는 시골서 중학교만을 마치고 상경한 16세 청계천 세운상가 뒷길의 전기용품 도매상의 순진한 점원이다. 수남이는 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고 밤에는 가게 방에서 숙직을 하며 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주인 영감 모르게 공부를 합니다. 주인 영감은 수남이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부지런하고 근면 성실하기 때문이다. 세 사람  해야 할 일을 혼자 해내는 수남이, 주위 사람들이 점원을 더 두라고 주인 영감에게 이야기 하지만 이 핑계 저 핑계로 수남이를 가혹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수남이 자신은 혹사당하고 있다는 억울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밤 11시가 지나야 겨우 책을 볼 수 있고 새벽 같이 일어나 가게 문을 열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 없이 일을 합니다. 수남이를 이용하는 주인 영감의 방법은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 것 이었습니다. 순진한 수남이는 그것으로 행복해 합니다. 

어느 날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던 날 자전거로 형광 램프를 배달하고 수금을 해서 골목 안에 세워 놓았던 자전거를 타고 가게로 돌아오는데 누군가 뒤에서 “ 이놈아 어딜 도망가는 거야 거기 서지 못해 ” 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신을 향해 하는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양복 입은 신사에게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유인 즉 수남이의 자전거가 바람에 넘어지면서 자신의 자동차를 망가뜨렸다는 것이었다. 수리비로 5천원을 내라는 것입니다. 수남이로선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짐에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수남이의 요청을 거절 한 채 자가용 주인은 운전기사에게 자물쇠를 사와서 자전거를 채우고 5천원을 가지고 오면 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 중에  수남이게 “ 얘 그것 가지고 토껴라 토껴” 그 주위의 모든 구경꾼들이 “도망가라 어서 자전거를 들고 도망가라” 이에 용기를 얻어 자전거를 들고 가게로 뛰기 시작 합니다. 

자전거를 들고 뛰어오는 수남이를 보고 주인 영감이 묻습니다. 주인 영감님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하고 한동안 헉헉대고 있는데 “네 놈 꼴이 영락없는 도둑놈 꼴이다 ” 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겨우 숨을 가라앉히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영감님이 무릎을 치면서 통쾌하다며 잘했다는 것입니다. 맨날 촌놈인 줄 알았는데 제법이라며 칭찬까지 하며 머리까지 쓰다듬어 줍니다.  수남이는 그날 밤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자전거를 갖고 달리면서 맛본 공포와 함께 그 까닭모를 쾌감을 회상합니다. 수남이는 오늘 한 짓이 도둑질이 아닐지 모르지만 앞으로 도둑질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전거를 들고  뛰는 떨림과 공포 속에서 또 한 가지 쾌감을 맛보았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남이는 그 순간 아버지가 그리웠습니다. 도덕적으로 자기를 견제 해 줄 어른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주인 영감님은 자기가 한 짓을 나무라기커녕 손해 안 난 것만 좋아서 “오늘 운 텄다”“ 이제야 비로소 촌놈의 티를 벗어났다 ”고  좋아하는 주인 영감을 뒤로 한 채 짐을 싸서 그 가게를 떠납니다.
수남이는 자신의 삶의 기준과 기존 어른들의 삶속에 드러나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 도덕과 윤리적으로 불일치의 삶을 극복하고자 다시 길을 떠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을 견인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능력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나의 삶의 표준이 되는 능력의 말씀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항상 여러분들의 행동의 판단 기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지요?

주님은 마 5:20에서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말씀하고 계시며 마 7:21절 에서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고 바라는 것은  인자(히: 헤세드 즉 사랑)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웃과의 사이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호세아가 그토록 강조하고 또 회복되기를 원하던 신앙 규범이었습니다. 사실 공의를 행하라는 말은 그 다음에 나오는 인자를 사랑하라는 말 곧 이웃 사랑을 즐겨 하라는 말과 연결되는 데 공의를 행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인 실천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일본 영화 가운데 “사토라레”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사토라레는 어릴 때 비행기 사고로 그 잔해 더미에 깔리게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구조대원들의 귀에 “ 엄마 살려주세요” 라는 외침이 들려옵니다. 사토라레는 단지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는데 구조대원들의 귀에 들린 것입니다. 이것을 귀하게 여긴 일본 군사기관에서 사토라레를 특별 관리하여 양육하게 됩니다. 사토레라는 특이한 인간으로 그가 품은 생각이 다른 사람의 귀에 음성으로 들리게 되어 자기 생각을 들키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정작 자신이 이런 특이한 인간이란 사실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의사가 된 사토라레는 수많은 환자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 특히 환자들을 향한 긍휼과 애정, 즉 사랑을 숨길 수 없어 낱낱이 들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감추인 것은 반드시 드러나며 우리의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드러내어 더럽게도 하고 아름답게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품은 생각은 숨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사토라레 일 수 밖 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가운데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 두 사람의 백부장을 보게 되는데 한사람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백부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백부장 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방인들이고 유대 식민지를 통치하는 군대의 장교들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눅 7: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눅 7:3) 『백부장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께로 보내어 그에게 청하기를, 와서 자기 종을 낫게 해 달라고 하였다.』

(눅 7:4) 『그들이 예수께로 와서, 간곡히 탄원하기를 그는 선생님에게서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눅 7:5)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하였다.』

(행 10: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다.』

(행 10:2)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다.』

(행 10:4) 『고넬료가 천사를 주시하여 보고 두려워서, a"천사님,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천사가 대답하였다. "네 기도와 자선 행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서,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신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권력을 남용 식민지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위를 이용하여 식민지 백성들의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과 고통 , 비애, 신음을 달래고 위로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비롯 다른 민족을 침략한 침략국의 군인들 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요일 4:20절에서 “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고 보이는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게 기대하시고 원하시는 것은 셋째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이루고 있는지 특별히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 무엇인지 우리의 구속자로서의 그리스도의 모든 특성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은 말 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특성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단 한가지 밖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바로  겸손입니다. 성육신이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인간이 되신 겸손이외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은 종의 형체를 입으신 겸손 외에 설명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이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 겸손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시게 하였고 이 땅에서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겸손의 가장 극치는 바로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습니다.

겸손은 성도의 근본입니다. 왜냐하면 겸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바른 자세를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을 전능의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이세 상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인정하며 전적으로 주님을 의존하고 나의 삶을 전적으로 내어 맡기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원시절 청년부전도사로 봉사하던 강남중앙교회로부터 교회 봉헌 및 몽골 선교사 파송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고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봉헌식을 마치고 선교사 파송식을 하는 가운데 어느 목사님의 파송되는 선교사 부부를 위한 격려와 권면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2000년 자신의 아들이 몽골로 단기 선교를 떠나 태풍으로 날아간 교회 지붕을 수리 하다가 감전 사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고국 땅에 묻지 않고 몽골 땅에 묻고 돌아왔다는 간증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칠전 기독교 타임지에 “ 몽골에서 순직한 아들 가슴에 품고 선교사로 떠나는 김여일 목사” 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신문 기사를 통해 목사님의 성함도 알게 되고 순교한 아들의 나이가 그 당시 24살밖에 되지 않은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내 아들입니까? 라는 본인 뿐 아니라 가족들의 아픔과 교회의 아픔과 시련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몽골의 선교를 위해 선교 센터(260평 4층 건물/20만 달러이상 소요) 를 지었고 2002년도에는 공채로 모집 선교사도 파송하고 30회 이상 현지를 방문 하면서 5개의 교회도 개척을 했다는 것입니다. 몽골은 아들 고 김성호 선교사가 순직한 2000년 이후부터 신자가 급증하기 시작해 지난해 483개 교회 4만2천8백36명 성도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김여일 목사님은 내년도에 자원 은퇴를 하시고 그곳 선교사로 파송을 받기 위해 하루 8시간씩 13주간 실시하는 교육을 이미 받았고 오는 7월에 선교국에서 주최하는 선교사 집중 훈련도 참가하기 위해 접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김 목사님의 고백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들이 뿌린 밑거름 위에 부모가 뛰면 좀 더 많은 열매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주변에서는 나이도 많고 힘들다며 많이 만류 하지만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현지에서 선교사로 사역해야 하겠다는 소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을 행하든지 관계치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자신의 삶에서 행하시도록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완성은 바로 이러한 마음과 정신, 성품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된다는 것은, 제자가 된다는 것은 겸손이 우리에게 담겨지는 것입니다. 김여일 목사님도 주님이 행하신 일을 행함으로 겸손이 무엇이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함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 채워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항상 겸손하고 비어 있는 영혼을 찾고 계시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그런 영혼 속으로 들어가 그를 사용하고 계시고 그를 높이고 우리보다 더 우리의 일생과 우리의 자녀들 삶과 사업을 더욱 안전하고 완벽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 공의를 행하라. 인자를 사랑하라.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라 ”는 이 세 가지 명령은 의미상 동일 선상에서 서로 연결 되어 있습니다. 즉 공의를 행함은 사람을 사랑하라 함의 현실 속에서의 구체적인 표현이요 이것은 다시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걸음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명령의 상호 연결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 신앙은 인간에 대한 구체적 사랑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 즉 풍성한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님을 선포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허물이나 영혼의 죄를 위하여 몸의 열매들 곧 맏아들을 불태워 바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정의와 사랑을 겸손하게 실천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경외감과 친밀감을, 자기 자신 안에서는 평안, 기쁨, 즉 성령의 내적 증거함을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의 실천을, 이웃과 사회에 대해서는 정의로움과 공평무사함을, 더 나아가 자연에 대해서는 정원사, 혹은 청지기의 영성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날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의 완성을 위해  겸손하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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