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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만한 믿음 (눅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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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7:1-10
이만한 믿음

◈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 405장을 작사한 사람은 '죤 뉴톤'입니다.
한 때 노예상인이던 그가 회개하면서 고백한 고백문입니다.
죤 뉴톤이 그랬습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면 3 가지 사실에 놀랄 것이다.
첫째는 꼭 그 사람은 천국에 갔으리라고 믿었던 사람이 안 보여서 놀라고,
둘째는 저 사람은 꼭 지옥에 가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천국에 있어서 놀라고,
마지막 셋째는 죤 뉴톤 같은 죄인을 볼 수 있어서 놀랄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기이히 여긴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대부분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반응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두 군데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이히 여기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기이히 여기셨다는 말은 놀라셨다는 말입니다.

◈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놀라신 기록이 두 번 있습니다.
① 당연히 믿음을 가져야 할 사람들의 불신을 보고 놀라셨습니다.(마6:6)
마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메시야 되심과 그 말씀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지식을 배웠는지, 지혜와 권능이 대단하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거기서 더 이상 권능을 베풀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믿지 못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시며 거기를 떠나셨습니다.
가장 잘 믿고 또 가장 잘 깨달아야 할 사람들이 지혜의 말씀과 권능을 경험하고도 배척하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놀라신 것입니다.

② 당연히 안 믿을 사람이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 놀라셨습니다.(누가7:1-10)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백부장의 경우입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유대인도 아닙니다. 이방인 군대 장교였습니다. 유대인을 압제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온 로마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이 가지지 못한 놀라운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은 놀라셨습니다.
→ 마땅히 믿어야 하는 자기 동족, 자기 고향 사람, 유대인들이 주님을 믿지 않음을 보고
놀라셨던 주님은 믿을 수 없는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놀라신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설교를 기록하면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거둔다. 좋은 믿음은 그 기초를 반석 위에 둔 믿음이다. 반석 위에 기초를 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도대체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누가도 그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개하는 믿음의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의 백부장입니다.
누가는 이 백부장를 소개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의 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듣는 여러분들의 믿음에 도전과 용기를 능력의 말씀이 되시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바랍니다.
◉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복음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의 고향입니다. 세리 마태가 부름을 받은 로마의 세관도 있었습니다.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백부장은 이 로마 주둔군의 장교였을 것입니다.

◈ 백부장의 인격
① 백부장은 사회적인 지위가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백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장교입니다. 식민지에서 그는 막강한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많은 종들이 있었습니다.

② 자기 종을 사랑하였습니다.
많은 종들이 있었지만 종을 사랑했고 종이 병들었을 때에 종을 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로마법에서 종이란 살아있는 도구입니다.
종을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굶기고 싶으면 굶기고, 버리고 싶으면 버리고,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사고 팔고 했습니다.

당시 종은 주인의 재산에 속했고, 생활 수단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을 부리듯 하였고 늙거나 병이 들면 짐승처럼 내다 버리고 묻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종은 아무런 법적인 권리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대개 식민지에 주둔해 있는 본국의 군인들은 포악하고 잔인했습니다.(눅3:14)
식민지 백성들을 괴롭히고 착취를 하는 것은 보통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종을 사랑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종은 중풍병에 걸렸다고 했습니다.(마8:6)
중풍병은 주변 사람들을 아주 힘들게 하는 병입니다. 병 걸린 종은 아무 쓸모가 없어진 것입니다. 내다 버리면 끝납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이 종을 사랑했습니다.

③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그 종을 구원하기를 청했습니다. 종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습니다.
백부장은 가버나움에 오래 주둔해 있으면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4장에서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가르치기도 하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었습니다.(4:38-39)
각색 병든 자들을 밤늦도록 일일이 다 고쳐 주셨습니다.(눅 4:40-41)

5장에서는 낫기를 간절히 원하는 문둥병자를 고치셨습니다. (5:12-16)
침상 채 누운 채 지붕을 통해 내려온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눅 5:18-26)
→ 이런 여러 가지 소문을 들은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 예수, 예수 그분만 모셔오면 내 종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백부장의 마음 속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백부장은 즉시 유대인의 장로들을 찾아갔습니다.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④ 유대인을 사랑하여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장로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야기합니다.
4절 “유대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다”. 예수님께서 이 백부장의 청을 들어 주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5절을 보니까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는 로마 군인으로서 유대인이 식민지 백성이라고 해서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유대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이는 헤롯처럼 유대 민족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짓는 것처럼 하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은 정치적 목적으로나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서 회당을 지은 것이 아니고
오직 유대민족을 사랑하여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회당을 지어 줌으로서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 백부장에게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유대인을 사랑하여 회당을 지어 주고 신앙생활을 자유로이 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백부장은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모아 둘 줄만 알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으는데는 관심과 지혜가 있지만 쓰는 데는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써야할 때를 잘 구별하여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백부장은 회당을 지어 교육을 받게 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이사장이나, 회장 자리를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병들어 죽어가는 종 하나를 살리려고 많은 돈을 사용했습니다.
별로 가치없는 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죽어 가는 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물질을 드렸습니다. 지금 수해로 온 나라가 근심에 빠져있습니다. 사상 최대의 피해를 경험했습니다.
많은 수재민들이 일손을 놓고 한숨쉬고 있습니다. 이 때 이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질로 봉사로 기도로 섬김으로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백부장은 사랑하되 아주 구체적으로 사랑했습니다.
‘더웁게 하라, 배고픈 자에게 배부르게 하라 ’ 말만 하지 말고 참으로 도와 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⑤ 백부장은 겸손했습니다.
백부장은 식민지에 파견된 군대의 장교입니다. 그의 지위와 권세로 보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해도 됩니다. 로마의 장교가 유대 청년 하나를 부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높은 의자에 앉아서 예수님에게 명령을 해도 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당장 예수님께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기가 이방인으로 높으신 예수님께 직접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장로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합니다.
백부장은 종의 괴로움에 함께 괴로워했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신분이나 외모나 능력에 두지 않았습니다. 가치가 없고 쓸모도 없고 능력도 없는 종을 진심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예수님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백부장의 인격적인 성숙함이 여러분들의 인생에도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믿음이 인격과 함께 변화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인격적으로 부족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과 교회에 방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백부장은 믿음 이전에 인격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 백부장의 믿음
예수님께서 그 장로들과 함께 백부장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이 다시
사람들을 보내었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는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율법 상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행10:38) 그리고 이방인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않았으며 어떠한 만남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막상 오시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집인 우리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일로 예수님을 괴롭혀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예수님을 들어 오시게 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저같으면 이쯤되면 예수님 어서오십시오 하고 마중을 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기의 신분이나 모든 면에서 도저히 예수님을 뵐 자격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참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혹시 누가 생각나시지 않으십니까? 이쯤에서 베드로가 생각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사람들은 지위가 높아지고 권세가 있어지면 빳빳하고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대로 경험한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군대장군이라도 주보를 나누어주고 사병들의 신발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머리 숙여 인사할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7절 -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믿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 한 번 찾아 볼 것이 있습니다.
【눅 4: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눅 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눅 4: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이적을 행하실 때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말씀으로 꾸짖으셨습니다. 말씀 한마디면 다 해결되었습니다.
문둥병자도 말씀으로, 중풍병자도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당시 로마 군대는 철저한 명령과 복종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장교 생활을 하면서 말의 권세 “명령”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으면서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다스리시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군의 세계에서도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순종하는데 예수님이 명령을 하시면 그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은 어떻게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다거나, 환상을 본다거나, 예수님의 옷을 만진다거나, 예수님의 만져주심이나 바라는, 안수를 받기를 바라고, 뭐 몸에 닿은 수건이나 앞치마를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행19:21)
오직 말씀만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말씀만 하옵소서”

예수님은 백부장의 이 말을 들으시고 참 기뻐하셨습니다.
처음에 살펴 본대로 예수님이 깜짝 놀라셨습니다. 감탄하셨습니다.
그래서 쫓는 사람들에게 칭찬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믿는 믿음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말씀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심없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이루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사를 구했습니다.(4:23)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하는 표적이 무엇이니까(요6:30) 하여튼 이적과 기사와 표적을 구했습니다.

마태복음 12: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믿지 않고 표적만 구하는 자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이란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언제든지 잘못된 믿음은 말씀 외에 다른 것을 구합니다. 기적을 요구합니다.
기적을 보면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은 말씀에 순종합니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 갈릴리 가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할 때 먼저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 요한 복음 9장에도 날 때부터 소경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시며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였을 때, 먼저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순종하여 씻었더니 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이만한 믿음은 영어로 이러한 위대한 믿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의심하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이런 믿음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많이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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