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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왕하 5:1-14, 갈 6:1-6, 눅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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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 초기 교회시대 때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웠던 일 가운데 한 가지는 규방 깊숙하게 들어앉아 있는 여성들에게 어떻게 접근하여 복음을 전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도인들이 대개 남자 중심이었던데 비하여 “男女有別”이니, “男女七歲不同席”이니 하는 엄격한 유교적 분위기에서는 우리들 안방은 여리고성 만큼이나 굳게 닫힌 성이었습니다.

  이럴 때 복음을 들고 깊숙한 안방을 찾아들어간 사람들이 여전도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에서 여전도사들의 역할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으며 오늘 한국 교회에 여 성도들이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은 이면에는 남들이 알지 못하게 사역을 했던 여전도사들이 있었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천국의 섬”이라는 책에 보면 전라남도 서남쪽 섬에서 사역한 문준경 전도사는 결혼 첫날부터 소박을 맞아 그야말로 한 많은 세월을 지나는 가운데 복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기 위하여 한글을 배웠으며 한글을 알고 난 후부터는 성경읽기에 몰두하였고, 나중에 지금 서울 신학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성경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방학 때면 자신의 고향인 섬으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입으로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여성들로 하여금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처음 믿은 성도들이 성경을 읽으므로 그 신앙을 성경의 바탕위에 두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한글을 깨친 사람들에게는 본격적으로 성경 공부를 시켜서 전도인이 되게 했습니다. 요새 말로하면 불신자에게 전도하여 신자가 되게 하고 신자에게 성경 공부를 시켜 제자로 만들고, 그 제자를 훈련하여 사역자가 되게 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후 국토의 서남단 섬 지방에서 이분의 영향을 받고  한국 교회에 공헌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분이 이만신 목사님, 김준곤 목사님, 정태기 목사님 등입니다.

  문준경 전도사는 단지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교인들과 섬 지방 사람들의 일상 모든 삶을 다 도와주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면 산파역할을 했으며, 병든 사람들에게는 치유은사로 사역했고, 그리고 섬 곳곳을 다니면서 교회를 개척하고 설립하므로 미신 타파에 앞장섰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그 섬에는 주민 90%가 신자들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초대교회 목회자들은 그야말로 전천후 목회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렇게 편만하게 전파되었으며 “세계 선교 역사상 기적”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전력투구로 사역하였던 문준경 전도사는 6.25때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지막지하게 매를 맞고 결국 총살당하여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고, 결혼하여 한 많은 세월을 보냈던 그 섬을 중심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결국 오늘가지 그 섬들을 “천국의 섬”이라 부를 만큼 축복된 땅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2.  오늘 구약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람은 물론 당시 이스라엘의 적대 국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라고 했듯이 이스라엘과 항상 전쟁이 끊어지지 않았고 현재는 오히려 이스라엘이 아람에게 당하고 지내는 형편입니다.

  그 아람의 군대장관이라면 이스라엘에게는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다 나아만은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위대한 장군이 나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그 옛날 나병은 정말 천형이었습니다. 그 병 때문에 나아만은 이제까지 하늘에 닿도록 쌓아올린 영광과 명예가 하루아침에 바벨탑처럼 무너지게 될 비참하고 안타까운 현실에 지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높은 지위와 권세를 가진 나아만이 그 병을 위해서 무슨 방법인들 사용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집에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끌려와서 장군의 부인에게 수종드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비록 이방 땅에 끌려와 하녀로 있지만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항상 불타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녀가 장군을 볼 때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타올랐습니다. 이 소녀의 믿음으로는 아무리 천형인 나병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능히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적장이지만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소녀가 품고 있는 여호와 신앙,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이것이 복음이요 전도인의 사명입니다. 그녀는 이 복음을 반드시 전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전도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 지금도 살아계셔서 천지 만물과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주님,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그 주님을 증거 하는 일,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저 소녀가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가 있었으나 이 사명을 잊을 수 없었듯이 오늘 우리가 이방 땅과도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거기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그 소녀는 나아만 장군이라는 지위에 압도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한갓 포로로 끌려온 신세라고 해서 위축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여기 아람에서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포로로 끌려온 소녀가 감히 주인인 장군에게 이러쿵저러쿵 조언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역시 비록 세상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변한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은 여전히 주님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 확신이 있습니다. 이 확신 때문에 우리는 변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3.  소녀는 장군의 부인에게 “우리 주인이 사마리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장군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만이 아닙니다. 그 선지자가 섬기는 하나님 여호와를 증거하는 선교사로서의 사명입니다.

  시편에 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바벨론 사람들이 여호와의 노래 한 곡을 불러보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그 노래를 듣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를 경멸하는 말입니다. 마치 옛날 블레셋 사람들이 머리 깎이고 연자 맷돌을 돌리는 삼손을 놀려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가 이방에서 어떻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고 한탄조로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승리 가운데 있을 때는 자신 있게 내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큰 실패나 시련 가운데 있을 때는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옛날 우리의 순교자들은 목숨을 빼앗기는 순간에도 오히려 주님을 찬양하고 주의 이름을 증거했습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집에서 하녀노릇하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주인에게 증거할 수 있었던 이 소녀의 믿음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나의 연약함 때문에 제약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둘씩둘씩 짝을 지어 파송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어떠합니까? 사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당시로서는 별 볼일 없는 “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자로 파송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 주님의 권위가 함께 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메시지를 들고 있었습니다. “평안할지어다”라고 선포하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들과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평화 즉 샬롬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을 거부하고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아람의 군대장군 나아만은 일단 소녀의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나아만이 여호와 신앙을 갖게 되고 나중에 병 고침까지 받게 되는 계기가 바로 여기 소녀가 전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신앙생활의 궤도수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고집이나 생각을 버리십시오, 나아만도 처음에는 물론 쉽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서 자존심마저도 버렸습니다. 만일 끝까지 자기 생각을 고집했더라면 그는 그 병으로 모든 것을 잃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뜻을 버리고 신하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사마리아로 방향을 잡은 것이 그 구원의 첫 단계였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 앞에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은혜와 복을 받게 되는 비결입니다.


4.  그러나 신앙의 길에는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많은 장애요인이 있습니다. 숱한 난관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처음 나오시는 새 가족 여러분 앞에도 신앙의 길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도처에서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아만이 이스라엘 왕에게 가서 자기 병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아람 왕의 친서까지 제시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이만저만 난처하지 않습니다. 이는 필시 아람 왕이 이것을 핑계로 이스라엘을 침략하기 위한 수작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은 옷을 찢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바꾸어주십니다.

  이 소식이 선지자 엘리사에게 들어갔습니다. 선지자는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천상천하에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 여호와를 증거할 때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 것은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우리 가운데서 들어내시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갔더니 기대와는 달리 내다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그야말로 분기탱천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썩 내키지 않았는데 이런 수모를 겪고 보니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당장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신하들의 권고를 듣고 자기 생각을 버리고 요단강으로 내려갔습니다. 성경은 그 결과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마치 삭개오에게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이르렀습니다. 선지자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구원해 주실 이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 소녀처럼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당당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복음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 여러분의 삶의 내용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산재해 있는 모든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야할 것을 촉구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우리가 정말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은 그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소녀는 장군의 짐을 나누어 졌습니다. 엘리사는 임금의 짐을 자기가 떠맡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서신에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 짐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거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승리했고, 평화가 임했습니다. 소녀도, 나아만도, 이스라엘 왕도, 엘리사도 모두 승리했습니다. 이 승리가 오늘 여러분의 것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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