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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밀양(密陽) - 그 이후 (눅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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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약간은 불편하지만 고마운 영화>
지난 월요일에 참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요즈음 한창 화제가 되고 있다는 '밀양'이라는 영화였지요. 전도연인가 하는 배우가 칸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이창동 감독이 만든 아주 빼어난 작품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만난 목사님들이 이 영화의 배경이 기독교라고 하는 말에 관심이 갔습니다. 아니, 이 영화를 본 분들은 이 영화가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심지어 반(反)기독교적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이 영화를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다른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저도 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훌륭한 것은 영화를 보는 사람마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상징적 장치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 분이 만든 '초록 물고기'나 '박하 사탕'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다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들었습니다. '밀양'도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하여 보는 오락물 영화와는 달리,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많은 생각을 하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참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제 견해로는, 한 마디로 말해서 '밀양'은 반기독교적 영화가 아닙니다. 굳이 친(親)기독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폄하할 의도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교회나 목사님, 교인들이 경남 밀양의 실제 교회와 실제 목사님과 교인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낀 소감은 이 영화가 기독교라고 하는 한 종교를 매개로 해서 인간의 구원과 용서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매우 신학적인 영화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약간은 기독교에 대해서 불편한 장면들이 없지 않아 있지만,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참된 구원과 용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고마운 영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밀양,' 비밀의 햇볕 아래 방황하는 영혼>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전도연이 주인공으로 분한 신애는 남편을 교통 사고로 잃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 준이를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경남 밀양으로 옵니다. 신애는 피아니스트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한 33세의 젊은 미망인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지만 자기만 사랑했다고 믿는 청순가련한 여인이기도 하지요. 남편이 생전에 자신의 고향인 밀양에 가기를 원했는데 이제 남편  대신 일곱 살 난 아들 하나만 데리고 낯선 객지로 옵니다.

밀양으로 들어오다가 신애의 차가 고장이 나서 작은 카 센터 사장인 종찬(송강호 분)을 만납니다. 이렇게 해서 종찬과 신애의 애틋한 인연이 시작됩니다. 종찬이 운전하는 견인차를 타고 오면서 신애가 묻습니다. "밀양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비밀 밀(密), 햇볕 양(陽), 비밀스러운 햇볕. 좋죠?" '밀양,' 'Secret Sunshine,' '비밀스러운 햇볕,' 이 영화의 제목이자 모든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암호가 처음 언급이 됩니다. 이 때부터 이 영화는 중간 중간 분명히 비취기는 하는데 아주 은밀하게 보이지 않게 내리 비취는 햇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밀양에 정착한 신애는 종찬의 도움으로 땅도 알아보고 피아노 학원도 열게 됩니다. 이내 수다스러운 주변 사람들과도 교류가 시작되어 그런 대로 세상 재미를 붙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참 위대한 것은 스토리 전개가 극히 사실적이면서도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보통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 중에 제가 아는 배우는 전도연과 송강호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이창동, 전도연, 송강호, 세 사람을 제외하고서 제가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거의 다 보통 사람들을 조연으로 혹은 엑스트라로 쓰지 않았나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보통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아주 세속적이고 코믹하고 심지어 음란한 구석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촌사람 종찬이 서울 멋쟁이 신애 주변을 맴돌며 사사건건 도와주려고 하는 모습도 시종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할 만큼, 그저 재미있고 귀엽습니다.

그런데 이런 보통 이야기가 갑자기 의미 있게 무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약사 부부가 신애에게 이른바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잃고 객지인 밀양에 내려온 신애에게 남편이 장로인 김집사가 전도를 합니다. 신애는 즉각 반발합니다. 이 환한 세상에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반문이었지요. 그 때 김집사는 매우 의미 있는 대답을 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소중하다고 믿지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소중한 게 있답니다… 저기 작은 햇볕 하나에도 하나님은 의미를 주셨어요." '밀양,' 은밀히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따스하게 내려 쪼이는 햇볕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말이지요! 

자, 이렇게 약국 김집사의 전도 시도가 있은 뒤, 스토리는 갑자기 최악으로 치달립니다. 신애의 외아들 준이가 유괴를 당합니다. 준이가 다니는 웅변학원의 원장이 신애가 돈이 많다는 말을 곧이 듣고서는 아이를 유괴했던 것이지요. 남편을 잃은 신애에게 준이는 전부요 생명입니다. 그런 아들이 유괴범에 목숨을 잃습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보다 더욱 더 참기 어려운 극한의 슬픔이 예고 없이 찾아온 것이지요.

가슴 깊은 곳에서 절절히 끌어 오르는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짐승같이 울부짖는 신애에게 갑자기 하나의 서광이 비쳐옵니다. 바로 교회였습니다. 부흥회에 참석해서 신애는 이른바 은혜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헛기침을 하다가 통곡을 하고 목사님의 안수 기도를 받고서는 영적인 희열을 체험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영접한 뒤 신애의 모습은 극중에 나오는 신애의 모습들 가운데 가장 기쁨과 감사, 사랑이 넘치는 평안한 모습입니다. 마치 연애에 빠진, 들뜬 기분으로 하나님 사랑에 깊숙이 빨려 들어가며 상처를 하나 둘 치유하는 듯이 보입니다.

<"누가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이러한 기독교적 은혜 체험의 절정은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려는 신애의 결단으로 나타납니다. 신애는 아직 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살인범인 웅변 학원 원장을 용서해주기로 결심합니다. 교도소에는 꽃이 없기에 들꽃을 꺾어들고서 들뜬 모습으로 살인범을 면회합니다. 그러나 초장부터 뭔가 용서하려는 사람과 용서받아야 할 사람의 입장이 바뀐 듯한 인상입니다. 용서해주려고 온 신애 못지 않게 용서받아야 마땅한 살인마의 얼굴이 뽀얗게 살이 찌고 매우 평온한 듯이  보였기 때문이지요.

마침내 신애가 입을 엽니다. "제가 하나님을 안 뒤 이렇게 평안해지고 어떤 죄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왔습니다." 그러나 막 용서를 선언하는 순간, 살인마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터져 나옵니다. 자기도 교도소 안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자기 입으로 주님께서 자기의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평안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신애는 속된 말로 팽 돌기 시작합니다. "아니, 내가 용서한다고 말을 하면 머리를 조아리며 감지덕지해야 할 이 살인마가 먼저 용서를 받다니! 세상에 이런 부조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용서를 해주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자기를 용서해줘!"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감히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럴 권한은 주님에게도 없어!" 신애는 그 길로 면회실을 뛰쳐나와 살인범에게 주려고 했던 들꽃을 내팽개치고 기절을 하고 맙니다.

극도의 허탈과 배신감, 혼란 속에 빠진 신애는 이 때부터 자기보다 먼저 살인마를 너무나 쉽게 용서해주었다는 그 값싼 용서의 하나님에 대한 복수를 시작합니다. 한창 소리 높여 통성기도를 하는 야외 부흥회에 가서 확성기로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유행가를 틀어 집회를 방해합니다. 심지어 자기를 전도해준 약국 김집사 남편인 장로를 유혹해서 햇빛이 가득 내려 비취는 들판에서 겁간을 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면서 '밀양,' '은밀한 햇볕' 넘어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께 막 대듭니다. 당신의 종이 나를 범하려 한다며 하나님을 비웃기까지 하는 것이지요. 또한 자기를 위해 철야 기도회로 모인 약사 부부 집 유리창에 돌을 던져 깨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신애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자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하나님께 계속해서 반기를 듭니다. 그러나 그 마침은 두려움과 파국과 절망과 죽음이었습니다. 과도로 자기 손목의 동맥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다가 결국 정신 병원에 수용됩니다.

<보이지 않게 내려 비치는 '밀양,' 은총과 용서와 사랑의 햇살>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흘렀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정신 병원에서 나온 신애는 여전히 자기 주변을 맴돌며 순수한 사랑으로 감싸주는 종찬과 함께 미장원에 갑니다. 공교롭게도 자기 머리를 자르는 미용사가 살인범의 딸이었습니다. 신애는 아직도 그 살인범을 용서 못해 중간에 뛰쳐나오고 맙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비워 둔 자기집 마당으로 돌아가 스스로 머리를 자릅니다. 이 때 종찬이 거울을 들어줘 신애가 스스로의 모습을 보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잘려진 신애의 머리카락이 주인 없이 버려진 마당의 개숫물 쪽으로 흩어진 장면을 클로즈업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폐허가 된 개숫물과 머리카락을 환하게, 그러나 소리 없이 은밀하게 비추는 것이 바로 '밀양,' 은밀한 햇볕입니다. 저는 바로 이 장면에서 절망이 아닌 하나의 소망을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주인 없이 더러워진 개숫물, 그 방치된 폐허 위에 새출발하려는 신애의 다짐인 머리카락이 오버랩 되는 장면, 뭔가 햇빛의 힘으로 새생명이 꿈틀거릴 것만 같은 강렬한 예감을 느꼈던 것이지요!

결국 '밀양'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암호였습니다. 조금 주책 맞고 오지랖이 넓고, 적당히 다방 레지에게 농담도 건넬 줄 아는, 마흔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간 종찬의 변함 없는 순수한 사랑, 이것을 '밀양,' '은밀한 햇볕'으로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종찬이 거울을 들어줘 신애가 스스로의 모습을 보도록 도와준 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따스한 생명력으로 내려 쪼이는 햇볕처럼, 신애가 자기의 본모습으로 돌아와 새출발을 하도록 돕는, 선한 이웃, 동반자의 모습을 암시합니다.

또 한 가지, 마지막 장면의 밀양은 보이지는 않지만 강한 생명력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살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와 사랑의 빛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 주인공 신애의 표정 연기에 주목했습니다. 바로 이 변화무쌍한 표정 연기에서 전도연은 탁월한 배우였습니다! ①남편을 잃고 밀양을 찾아온 우울하고도 슬픈 표정→②이내 주변 사람들과의 사교를 통해 얻은 세속적 즐거움의 표정→③외아들이 유괴범에 살해당한 뒤 절망의 끝, 나락에 빠진 표정→④기독교 신앙을 통해 환희로 가득찬 표정→⑤기독교 신앙에 극한 실망감과 반감으로 인해 광인이 된 표정→⑥정신 병원에 나와서 머리를 자르며 새출발하는 담담한 표정. 그리고 밀양 그 이후의 표정은 무엇일까를 상상해봅니다.

주인 없이 방치된 개숫물을 비취는 한줌 햇볕, 밀양은 여기에 대해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아마 틀림없이 종찬과 결혼해서 행복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종찬과 더불어 다시 교회로 돌아가 참된 은총과 용서의 의미를 아는, 예전보다 훨씬 더 독실하고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정신병원에서 나온 신애가 종찬에게 아직도 교회에 나가냐고 물으니까 "안 나가면 뭔가 찜찜하고 나가면 마음이 편해서 계속 나간다"는 종찬의 대답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결국 밀양은 한 인간이 진정한 구원과 용서의 길에 이르기 위한 치열한 고뇌의 과정을 그린 영화라는 것이 제 해석입니다. 신애가 자기가 용서하기도 전에 살인범이 하나님을 믿고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에 실망해서 기독교에 반감을 품는 것도 참된 구원과 용서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한 과정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신애가 하나님에 대하여 반항하면 할수록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불행해지고 마침내 정신 이상의 증세까지 보인다는 사실로 입증됩니다. 심지어 약국 장로님을 유혹하다가 무위로 끝났을 때 신애의 반응은 복수의 통쾌함이 아니라 강렬한 불쾌감에서 오는 토악질입니다. 이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불행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용서,' 그 자유와 은총에 이르는 길을 향하여>
제 설교가 본문 말씀을 이탈한 적이 없는데 오늘은 거의 영화 이야기만 하다가 끝나는 느낌입니다. 그만큼 '밀양'이라는 영화가 신학적인 영화라고 믿어서 좀 장황하게 구체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결론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삼세번이라는 말도 있듯이 랍비들은 세 번 용서하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랍비들의 기준인 세 번 용서의 두 배에다가 하나를 덧붙이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관심은 일곱이라는 용서의 횟수가 아닙니다. 세상이 용서하는 기준보다 훨씬 더 앞서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요점이지요!

아마 '용서'와 '사랑'이라는 말처럼 쉽고도 어려운 말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화 '밀양'을 광주 민주화 운동과 연결시켜서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광주 시민들을 학살했던 '신군부'를 '유괴 살인범'으로, '광주 시민'을 신애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국민들'로 놓고 보면 정치적인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신군부의 총칼 앞에 가족들을 잃은 광주 시민들은 용서를 하더라도 자기들이 해야지, 신군부 스스로가 우리는 국민들에게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떻게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주장하는 살인범에 실망해서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살인범의 딸조차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신애가 과연 행복했느냐는 것입니다.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불안했습니다! 끝 모를 두려움과 불안,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신 이상까지 갔습니다!

그러므로 맨 마지막에 은밀히 내려 쪼이는 햇볕, 밀양이야말로 보이지는 않지만 끝까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상징한다면 터무니없는 해석일까요? 하나님의 용서에 일시적인 반발을 보이지만 결국 신애가 가야할 길은 하나님의 용서를 순순히 받아들이는데 있지 않을까요? 바로 그렇게 할 때 자유와 평안이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이 용서를 통한 자유와 평안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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