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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공동체 (행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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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공동체 (행 2:42-47)

오늘 우리는 정말 중요한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예루살렘교회는 처음 생긴 교회요, 때묻지 않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첫 믿음, 첫 사랑을 가지고 성령 충만해서 시작한 교회요, 몇 천 명이나 되는 성도들의 공동체였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다시 교회를 선택한다면, 어떤 교회를 선택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는 교회를 선택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교회를 선택하고 싶습니까? 각자 한번 자신에게 던져볼 수 있는 가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과 평안을 주는 교회가 있다면 그런 교회를 택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봅니다. 병을 안고 씨름하는 사람에게 병이 나을 수 있는 교회를 소개해준다면 얼마나 반가워하겠습니까? 가난을 이기지 못해서 하루하루 피곤하게 사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예수님에게 오세요. 하고 말하면 그 말 때문에 교회를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성향입니다. 실패하여 주저앉아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낙망하지 마세요. 하면서 소망과 희망을 주는 교회로 인도한다면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교회를 나오는 목적이 단순히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머문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다운 성도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펴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누군가가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난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 건강한 교회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어서 좋은 교회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의 최종 정착지가 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교회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땀과, 눈물과, 희생이 제단에 스며들 때 이런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묵상하는 초대교회가 그렇게 아름다운 교회였다면, 그런 교회를 만들어낸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초대 교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신앙 생활 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예수 믿고 세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방 종교와 이방 문화 속에 길들여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전통적인 유대교에, 구약의 종교생활에 물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이처럼 한 시대뿐만 아니라, 다음세대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1.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이 교회가 세상 앞에 희망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 앞에 순종하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42절 말씀을 보십시오. 42절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 구절을 원문에서 곧바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과,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는 일, 그리고 기도하는 일을 꾸준히 계속하니라.' 요즘 말로 하면,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교제했다는 뜻 아닙니까?

지난번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은혜의 교회 박정식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천에 창녀들과 극빈자들이 모여 있는 학익동에다 아내와 함께 천막 교회를 치고 이곳 주민과 함께 복음을 위해 살겠다는 다부진 각오로 개척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치유 사역이 우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매일 은사집회 하고 매일 성령의 역동성을 구했지만 병자도 낫고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역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안 변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시기와 반목, 그리고 분열의 뼈아픈 경험을 해야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민이 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부터 사 복음서를 붙잡고 묵상하기 시작했는데 거기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말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가르침"이라는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성경을 보아도 이 단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갈급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니 "가르쳤다"는 단어가 눈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르쳤다에만 동그라미를 계속 치면서 읽었답니다. '가르쳤다'가 '기적과 이적'보다 아홉 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기적과 이적조차도 기적과 이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여기서 목사님이 깨달은 것은 왜 사람이 안 변하나? 왜 안 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거꾸로 사역을 한 것입니다. 매일 은사집회 하고 매일 성령의 역동성을 구했지만 '가르치는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이게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거기서 새롭게 목회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목회를 포기하려다가 아니구나 다시 한번 해봐야겠다는 불꽃이 가슴에 와 닿자 그는 달동네에서 미친 듯이 제자훈련을 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 교회가 한국에서 제자훈련을 통해 성장한 대표적인 교회로 많은 교회의 사례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초대 교회의 제자훈련은 단지 고급지식을 나누어주는 그런 사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정일 뿐입니다. 교회의 초점이 무엇이냐면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이런 가치관을 그 가슴속에 담도록 돕는 과정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공부 프로그램은 이런 가치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은 당신을 위해서 생명을 받치셨습니다. 그 결과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는 그의 공동체와 그의 거룩한 비전을 위해서 우리의 전인격을 드려야만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아무리 많이 모여도 이런 열린 가슴, 하나님의 불꽃이 우리 가슴에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바꾸실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120명의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에 이 불꽃이 점화될 때 하루에 3,000명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문제는 얼마큼 하나님의 동역자들을 교회에서 양성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흥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부흥은 숫자가 늘어나는 게 아닙니다. 부흥은 하나님이 우리 가슴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정이, 하나님의 심장이,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 가슴에 충만해지는 게 부흥입니다. 부흥의 의미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임재 앞에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나와 어떤 관계가 되는지를 피를 토하듯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배우는 가운데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첫째, 예배관이 달라졌습니다. 46절을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했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밤낮으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 거룩하신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순간, 순간 끓어올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도들의 모습은 예배하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만큼 예배가 중요합니다. 위대한 영적 거인이라 할 수 있는 요한 웨슬레는 이런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입이 만 개라면 만 개의 입을 다 벌려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주님의 은총을 찬송하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어 열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 지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예배의 심정이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일을 지키고, 주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이 주일 예배를 통해서 기독교가 이어져왔고, 이 세상을 바꾸어 왔습니다. 우리는 이 예배 시간 동안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해 실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혼이 기뻐 춤을 춥니다. 우리 영혼의 세포가 기뻐 춤을 춥니다. 우리가 제대로만 예배를 드리며 이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 해 계시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는데, 그 영광 앞에 어떻게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예배의 성공자가 인생의 성공자입니다.(록펠러) 이런 놀라운 은혜가 분명히 이 자리에 있음을 우리 모두가 믿어야 됩니다.

두 번 째로 나눔의 공동체로 변화를 가져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소유가 인생의 최고의 축복이라고 알았지만, 그들 속에 성령의 임재를 통해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보세요. 이들이 누구입니까? 저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 폭도였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들이었지만, 이젠 이렇게 완전히 변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4절과 3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이 은혜의 공동체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것이라는 소유를 과감하게 내려놓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나누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초대 교회 안에 사는 사람들이 '핍절 한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퍼 주어도 결핍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연변 과기대에 있는 교수들의 사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이 대학은 공산주의 국가에 세워진 기독교 학교입니다. 당국에서 여러 규제가 있지만 이 학교를 입학한 학생들 가운데 처음엔 예수를 알지 못한 채 입학한 학생들이 대다수인데 졸업할 때가 되면 대다수의 학생이 이미 예수를 영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중국까지 온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이 몸답고 있던 유명 대학이나 연구소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붙들려 온 사람들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이들은 월급을 한 푼도 받지 않는 자비량 교수들입니다. 그들을 아는 지인들이 십시일반, 후원한 것으로 겨우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 마져 확보 안 된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사랑의 통장'이라는 공동 통장을 만들어서 쓴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후원을 받은 교수 가운데 돈이 남으면 이 통장에 넣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동료 가운데 없는 사람들이 이 통장의 돈을 꺼내 사용한다고 합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자기의 소유를 포기한다는 것이 쉽습니까? 쉬운 게 아니잖습니까? 한 예배학자는 헌금 행위를 가르켜 "생명을 바꾸는 사건"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님께 우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헌금 행위입니다. 이 헌금을 드리는 구체적인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흑인들의 예배에는 뜨거운 정서적인 교감이 있어서, 대체로 예배시간도 길고, 설교자의 메시지에 회중들이 목소리로 화답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한 흑인 교회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교회는 주저앉아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일어나 걸어야합니다." 회중들이 큰 소리로 화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일어나 걸어야합니다." "걷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복음화의 과제는 너무나 긴급합니다. 교회는 달려가야 합니다.!""맞습니다! 달려가야 합니다."" 세상은 너무 넓습니다. 열방 중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교회는 날아가야 합니다." " 예, 맞습니다. 교회는 날아가야 합니다. 날아갑시다." "여러분, 이제 선교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구체적으로 돈으로 헌신합시다." "---" 침묵 중에 한 성도가 외쳤습니다. "우리 교회로 하여금 다시 그냥 걷게 합시다" 혹시 이 흑인 성도와 같지 않습니까? 신앙 고백 따로, 헌신 따로는 아닙니까? 유명한 웩의 선교사 스터트의 고백을 상기합시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려 주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어떤 희생도 결코 지나친 것일 수는 없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생각하면 필요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오늘 내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정확히 아시고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위하여 그 능력을 베푸시는 넉넉한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설령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고 해도, 그 필요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지 않았더라면, 그 분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엡3:20절에 보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으로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누구보다 깊이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되면 우리는 눈을 뜨게 됩니다. 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삶의 가치가 예수님처럼,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한 섬김입니다. 그것은 희생입니다. 헌신입니다. 자기 포기입니다. 물질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소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내 시간도 내 인생도 내 재능도 나의 삶 전부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재능을 가지고 돈벌이를 합니다만 이제는 돈을 벌어야 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 주소서" 하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섬김과 나눔이 있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기 47절을 보세요.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 하게 하시니라." 할렐루야!! 이들의 삶을 보고 당시 예루살렘의 모든 자들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저들이 믿는 하나님을 보고 또 그 앞에 달라진 사람들을 보고 그들 역시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거리는 더 이상 피를 부르고, 저주하는 죽음의 거리가 아니라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축복의 현장이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이렇게 힘있게 체험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런 간증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볼 3장에는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며 뛰며, 찬송하며,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상징적인 모델입니다. "내게 금과 은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베드로와 요한이 외쳤을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걸으며 뛰며 발과 발목에 힘줄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하더라!!" 세상은 그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예수 앞에 나아와 무릎 꿇고 주님을 영접합니다. 더 이상 세상에 휩싸여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은혜의 공동체 안에 살아가는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부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초대 교회의 부흥이 파도처럼 밀려와 우리의 영혼에 적셔지기 바랍니다.

이제 이 은혜를 부여잡고 비전의 각을 세우고 믿음의 날개를 펴서 지경을 넓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누가 "잃어버린 구원의 감격, 행복한 신앙생활, 삶의 기쁨과 환희를 어디가면 찾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는 "예! 우리교회에 가면 구원의 감격과, 인생의 환희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이 은혜가 여러분 위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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