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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마음 (요 4: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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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자신의 죄가 지적당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 두 가지다. 대부분 부인하거나 반항적이 된다. 그리고 지극히 소수만 순응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반응의 유형이 상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 보다 못하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무시내지는 저항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자신 보다 월등한 상태에 있다면 꼬리를 내린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어느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물 길러온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녀는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왜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한 동안 대화를 나누는 동안 대화가 잘 통하지 않자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하여 갑작스럽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이 한 마디는 여인의 가장 숨기고 싶었던 수치를 드러내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이 사마리아여인이 즉시 방어적으로 답변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인은 잡아 뗐으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허물을 다 드러내셨다. 이 여인은 과거에 5번 이혼당한 경험이 있었으며, 지금 남편도 정식 남편이 아니었다. 가릴 곳 없이 벌거벗은 것처럼 그녀의 수치가 다 드러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반항적이거나 순응적으로 나타난다. 만약 이 여인이 반항적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래요. 나는 팔자가 기구해서 5번씩이나 이혼 당했어요. 지금은 첩살이를 하고 있어요. 어쩔거예요. 왜 나의 아픈 과거를 들춰내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대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반대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자신의 과거와 사생활을 꽤뚤어 알고 있는 이 낯선 유대인 앞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추한 허물이 다 드러났지만 창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여인의 심령 속에 신령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젊은이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선지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1장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고, 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뵈올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또한 자기의 진실을 찾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 여인이 영적인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게 되었고, 그 순간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인식과 예배에 대한 열망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대화의 전환이 이뤄지고 예배에 관한 주제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주일날 아침 어느 부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교회당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교회당에 가까웠을 때 어린 아들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엄마, 아빠 오늘은 예배시간에 졸지 마. 나 창피하단 말이야. 알았지?”

그들이 예배당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신앙고백을 하고 있었다. 뒷자리 구석에 앉았다. 성경봉독과 찬양대 순서가 끝나고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됐다. 두 부부는 주보의 내용을 열심히 살펴보기를 마치고 설교를 듣는가 하더니 곧 졸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뜨기도 하고, 입술을 깨물기도 해보지만 소용없었다. 앞으로 숙이더니 뒤로 넘어가고... 아들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가,
“엄마, 아빠 졸지 말고 빨리 요금 내고 집에 가자!”

물론 지어낸 이야기지만 현대인들의 예배 한 단면을 잘 꼬집고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왜 이 젊은 부부가 지지부지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 속에 예배에 대한 열망이 없기 때문이다.
예배에 대한 열망이 없다는 말은 아직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도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격언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예배를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안다면 어찌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믿고 있기에 예배를 드리려고 나오기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졸고 있는 것이다.

눅5장에 보면,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밤이 맟도록 수고했지만 이상하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지시가 마땅치 않았으나 순종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다. 어떻게 되었는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혀서 다른 동료들을 불러 두 배에 가득 싣게 되었다.
육지로 올라온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된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앞에 나와 엎드린다.
자신의 죄인된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와 엎드린다. 그리고 결코 예배에 실패하지 않는다.

눅18장에, 두 사람이 성전에 나와 기도했다. 한 사람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기도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다. 또 다른 사람은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고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여러분, 외적으로 보면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은 참으로 모범적이고 폼나 보인다. 금식도 하고, 십일조는 당연한 것이고, 구제도 하고... 예배는 빠짐이 없고... 그러나 그에게는 핵심이 빠져 있다. 통회하는 심령이 없었다.

바리새인은 착각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 헌물을 좋아 하시고, 금식하는 것을 좋아 하시고, 구제하는 것을 좋아 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드린 모든 것은 하나님께 열납되질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섬기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을 내면 낼 수록 하나님은 더욱 진노하셨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선포하였다.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수한 제물이나 예배의 횟 수나, 장소가 아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고성능 음향기기와 고급의 다양한 악기와 아름다운 화음의 찬양대나 예배당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상한 심령, 곧 회개한 심령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해 뿐 아니라 올들어 상반기 내내 두 가지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고민해 왔다. 하나는 예배 회복이고 또 하나는 기도 회복이다. 수시로 이 주제를 가지고 의논했다. 어떻게 하면 예배가 활성화되고 또 많은 사람들이 나올 수 있을까?

예배의 형태를 바꿔보고, 좋은 악기를 들여 놓고, 고급의 음향시설을 설치하기도 했다. 대표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도를 짧게 하라고 지시했고, 은혜로운 찬송가를 고르기도 하고, 이런 저런 방법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하는 만큼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그래 7월 한 달 동안은 예배에 대하여 설교를 하자. 예배에 대하여 설교하고 강조하면 달라지겠지?! 물론 그 기대감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나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나의 생각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외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나의 잘못된 발상에 대하여 깊이 회개하며 먼저 내 자신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심령이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오늘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허물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예배자로 준비되어졌던 것처럼, 베드로가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깨닫고 그 앞에서 자신의 죄인된 것을 발견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죄인된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예배자로 경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여인이 예배드리던 그리심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면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없다. 성전에 나와 두 손 들고 기도하던 바리새인과 같은 신자들은 겉으로는 성공했으나 속으론 실패한 사람들이다.

진정으로 통회함 없이 나오는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같은 신자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을 의롭다 생각하고 예배드린 것으로 만족한다. 지각은 예사고, 피곤하면 졸수도 있고, 필요하면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것이 아니다. 교회당 바닥만 밟았을 뿐이다.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 없는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을 아는 사람들은 예배를 기다리고 사모할 것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고 기쁨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예배자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예배 시간이 지루해서 졸립고, 몸살날 지경으로 불편스러운가? 아니면 끝나고 다른 약속 장소를 연상하면서 공상에 사로 잡혀 있는가? 불행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들이는 것이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 먼저 통회하는 심령을 드리자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진정한 예배의 갱신이 이뤄질 수 있기를 바란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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