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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복 (요 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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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젊은이들이 흔히 이야기 하는 말 중에 왕자병, 공주병이라는 용어가 있었습니다. 남자가 자기 잘난 멋에 산다고 하면 “제는 왕자병 환자야!” 라고 말합니다. 여자가 자기 잘난 멋에 살면 공주병 환자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나 착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주병 환자의 증세를 소개해 볼 것이니 혹시 내가 공주병 증상이 없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증세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나는 너무 너무 미안하다.
왜냐하면 나만 너무 예쁜것 같아서.
두 번째 증세는 나는 숲속에만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잠이온다.
이것은 백설공주 증세입니다.
세 번째 증세는 경복궁에만 가면 내 집에 온것 같아 마음이 편하다.
경복궁은 왕이 살던 곳입니다.
네 번째는 길에서 키 작은 사람을 보면 나머지 여섯 명은 어디 있는지 묻는다.
왜냐하면 백설 공주에는 일곱 난장이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증세는 너희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면 만원짜리 지폐를 보여줍니다.
만원에는 세종대왕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찌 보면 예수 믿는 자들도 일종에 왕자병, 공주병 증세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왕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공주가 되고, 왕자가 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공주요, 왕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잘 믿어지지 않으면 문제가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가 온 우주의 왕이라면 우리는 공주이고 왕자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곳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두운 가운데 불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만세계에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가리켜 부르는 칭호는 다르지만 곧 너희가 왕자요, 공주라는 의미입니다. 너희는 택함 받은 특별한 소유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한때 어두움 가운데 있었고, 절망과 좌절 가운데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살리심 받고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얼마나 좋은 칭호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좌절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한 소년이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기생이라 어머니와 같이 살수 없어 아버지의 본처의 집에서 함께 생활을 합니다. 그 집에는 이복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늘 이 소년을 구박합니다. “너는 기생의 자녀지. 너하고 우리는 근본이 달라.” 멸시하며 조롱했습니다. 이 소년은 기생의 아들이라는 말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왜 나는 하필이면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을까?” 그것이 늘 원망스러웠습니다. 때로는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나이가 들었을 즈음 어느 날 양지바른 곳에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는데 붉은 핏덩이 였습니다. 검사해보니 폐병 3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데려가 치료해 줄 사람도 없고 치료받을 돈도 없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시들어 죽어가는 인생뿐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마루에 멍하니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북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북치는 소리와 함께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소리에 그는 정신이 버쩍 났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뛰어 나갔습니다. 구세군 전도대가 북을 치며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달려가서 “아줌마! 아줌마! 나 같은 기생의 아들도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나요?” “그럼요!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소년은 “아줌마! 저 그럼 예수 믿을래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부터 그 소년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는 다고해서 그의 병이 곧 나은 것은 아닙니다. 더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차도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폐병으로 죽을 거야! 내가 언제 죽더라도 단 하루를 살더라도 사람답게 살아야지. 내가 예수님 가르침대로 한번 살아야겠어!.” 그는 자기 짐을 리어카에 다 실어 다리 밑 빈민굴로 내려갑니다. 그곳에 움막을 짓고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늙어 버린 몸 파는 여인들, 넝마주이들, 폐병환자들, 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진물을 닦아주고, 목욕을 시켜주고, 말씀을 전하고, 대화하고,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년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70세가 넘도록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저술과 책도 남겼습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일본교회가 자랑하고 일본의 성자라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꼬입니다. 그는 기생의 아들입니다. 그는 폐병 중기 환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삶이 아니라 희망의 삶이 되었습니다. 좌절의 삶이 아니라 그는 확신의 삶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20년, 30년 믿은 사람도 종종 좌절에 빠집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가? 내가 오늘 죽으면 천국에 갈수 있을까? 마음이 흔들립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자녀의 의식을 꼭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권세를 소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군인들은 전쟁할 때 권세가 있습니다. 길에서 교통경찰도 권세가 있습니다.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린 전경인데 모자 눌러 쓰고, 지나가는 덤프트럭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면 덤프트럭이 그 앞에 딱 섭니다. 그 덩치 큰 기사가 쩔쩔 매며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막내 동생같은 전경에게 떨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 전경에게는 국가가 준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권세가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는 권세가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이로 병든 자를 치료하며, 귀신을 내 쫒으며, 뱀을 집어도 해를 당하지 않으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니라.” 우리에게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권세 있는 사람입니다. 암행어사가 무엇입니까? 임금이 준 마패를 들고 나가면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형편이 어렵더라도 우리 안에 있는 구원과 생명,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만은 꼭 기억하시고 승리하시고 찬양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따라 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예수 믿으면 된다.” 그렇습니다.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살려면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 찬송 들고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별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예배드리고 있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영접이란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집 앞에 누가 초인종을 누릅니다. 나가보니 내 친한 친구가 왔습니다. “반가워! 얼른 들어오게” 이것이 영접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 마음문 밖에서 초인종을 누르며 우리의 마음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모셔드리고 영접할 때 우리 안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영접입니다. 그렇다면 거절은 무엇입니까? 내가 어디를 가려고 하는데 물건 파는 사람이 와서 물건을 사라고 하는데 내가 필요로 하는 것도 없고, 시간이 없고 해서 “다음에 오세요. 지금은 제가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거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모셔드릴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영접은 믿음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나의 구세주로 믿고, 그분을 내 마음속에 모셔드릴 때 그곳에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참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성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 제 안에 들어오셔서. 저의 모든 과거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를 다스리시고, 저를 지배해 주옵소서. 주님이 제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동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3절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혈통이라는 것은 족보, 혈연관계입니다. 목사의 자식이라고, 목사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그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가끔 착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렇게 잘난 척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혈통이 아닙니다. 예수 잘 믿는 목사나 장로님의 자식이라고 해서 구원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육정으로도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성적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으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적으로 거듭난다. 중생한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유대의 관원이고 국회의원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합니다.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니고데모는 오해를 합니다.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 “제가 어머니 배속에 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면 거듭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은 성령의 사건이요. 신비의 사건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 한다는 것은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셔드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어떤 권세를 누릴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바’는 아빠라는 아람어인데 요즘말로 하면 아이들이 부모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과 똑 같습니다. 아주 하나님에 대한 친근한 표현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해 주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돌이되기 전 조금씩 말을 배울 때 엄마가 말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어린아이가 ‘아빠’하고 부를 때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우리 아이가 나를 아빠라고 부를 때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은 너무 너무 기뻐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보셨습니까? 중요합니다. 우리 부모들도 아이들이 “아빠! 용돈주세요!” 그렇게 이야기 할 때 뿌리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100원 달라고 하는데 왜 달라고 묻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만원 달라고 하면 어디 쓸려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잘못주면 아이를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0원이나 100원 달라고 하면 예뻐서 더 주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기를 너무 좋아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아버지가 아무리 나쁘더라도 아들이 배고프다고 계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주는 아버지가 어디있으며,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안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와서 마음껏 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선지자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내가 참 복되도다.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맡기겠다.” 그 천국열쇠는 열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말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 카드를 맡긴 것입니다. 아이가 돈이 필요하다면 카드를 주면서 쓰고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카드를 맡긴 것과 똑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를 때 마다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채우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읽은 시편 1편에 배경은 복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시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이 받을 축복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시대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받을 복입니다. 시편 1편 3절에 보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쫒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막에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라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기근에도 늘 풍부한 수분을 공급 받을 수 있고 사철 푸르고 잎이 마르지 않고 열매를 맺고 그 행사가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시냇가에 뿌리를 내린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얼굴에 늘 기쁨이 있습니다. 싱싱한 활력이 있습니다. 그 인상이 다릅니다. 참 놀랍습니다.

가끔 저희 집에 정수기를 수도에 매달아 놓고 쓰는데 3개월 마다 필터를 교체합니다. 필터를 교체하는 분이 3개월마다 오십니다. 그분이 아마 예수 믿는 분인 것 같습니다. 어느 날은 교체를 하고 주스를 한잔 마시고 하는 말이 자기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여러 집을 다녀보면 이 집이 예수 믿는 집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인상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얼굴이 다르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얼굴에 인상이 다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어둡고 침울하고 괴롭다고 합니다. 여기 들어오니까 예수 믿는 집 같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영적으로 풍성한 삶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늘 예수님 때문에 기쁨과 감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잎이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싱싱한 기쁨을 늘 유지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시편 1편 1절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길을 쫒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싱싱한 기쁨을 유지하는 방법은 죄가 들어오지 않아야 합니다. 장로님이라도 권사님이라도 누구와 싸우고 오면 기쁨을 상실해 버립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 싸움만 하고 오면 무슨 기쁨이 있습니까? 억지웃음은 있을지 모르지만 샘솟는 기쁨은 없습니다.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범죄하고 나면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또 하나 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저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싱싱한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말씀의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시고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예배를 사모하십시오. 말씀을 자주 들으십시오. 말씀을 읽으십시오.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활력이 되고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런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세 번 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미래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그렇습니다. 앞으로 지구에 어떤 문제가 생길까? 기상 이변이 올까? 아니면 에너지가 고갈될까? 식량이 바닥이 날까? 이런 문제들이 많은 사람들의 고민입니다. 우리는 그런 문제보다도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이런 고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뿐 아니라 천국을 기업으로 받은 후사가 되었다고 로마서 8장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상속자가 되어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우리가 이어 받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자기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고 사셨는데 술만 먹으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돈 많이 벌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이놈아! 이 수저, 이 밥그릇, 이 집도 다 너의 것이야! 내가 죽으면…….” 그런 말이 늘 기억이 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기업이 우리에게 상속되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집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집이 있습니다. 이 땅에 집이 없어도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 집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있는 곳에 인도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저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 갈 곳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서울서 부산까지 밤기차를 타고 가서 추운겨울 새벽에 도착했다고 생각해보세요. 부모가 영접하기 위해서 나왔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아이고! 엄마 아빠 추운데 왜 나오셨어요?” “야! 이놈아! 네가 밤차타고 오는데 내가 어떻게 안 나올 수가 있어? 빨리 집에 들어가자!” 얼마나 좋습니까? 집으로 돌아가서 따뜻한 잠자리에 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없는 고아가 그 기차를 탔다면 그는 갈 곳이 없습니다.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잘수 밖에 없습니다. 내일은 어디로 가고, 어디서 아침을 얻어 먹을 수 있을까? 이것이 고민입니다.

우리가 시골에 어렸을 때 아이들과 묵주놀이를 했습니다. 돌을 동그랗게 갈아서 땅따먹기를 합니다. 그 돌을 손가락으로 쳐서 간만큼 줄을 거어서 땅을 땁니다. 그렇게 자기 땅이 크다고 자랑하고 싸우고 하다가 저녁때가 되면 엄마가 와서 밥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땅 딴것 다 던져 버리고 엄마 손 잡고 저녁 먹으러 들어갑니다. 집에 들어가면 된장찌개 냄새가 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땅따 먹고 아파트가 두 채니 세 채니 해도 엄마가 와서 “때가됐다. 가자!” 하면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그거 들고 갈사람 없습니다. 그저 헌금한 거나 남지 가지고 간 것은 다 없어진 것입니다. 알고나 계십시오. 아무리 많은 재산도 3대를 못갑니다. 자식들 때에 가면 다 흩어집니다. 여러분 그러나 어떤 아이는 엄마가 부르지 않습니다. 저녁이 되도 부르지 않고 갈 곳이 없습니다. 얼마나 외롭습니까? 천국에 우리의 본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시편 23편을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나그네의 일생입니다. 우리가 순례자로 일생을 살다가 마지막으로 주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시편 23편입니다. 사막에 음침한 골자기를 다니지만 주님이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6절에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 피곤하고 지친 몸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기쁨이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특권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녀만이 가질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 나에게 종말이 와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미래가 두렵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갈수 있는 것이 구원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제 부모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 가시밭과 같은 길을 걸어도 하나님이 성령으로 늘 동행해 주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또 우리를 마지막에는 영접해 주십니다. 시편 27편 10절에 보니 “부모는 나를 버릴지라도 여호와께서 나를 영접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를 낳아서 길가에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녀가 늘 그것이 상처가 되어서 “우리 부모는 나를 버렸다.”라고 말합니다. 가슴에 상처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한번 받아주시면 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영원히 우리를 안아주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얼마 전 항공기 사고가 났습니다. 캄보디아에 가서 13명의 한국인이 죽었습니다. 텔레비전에 보니 KBS 조정옥 기자라는 분이 죽는 순간에 자기 아이를 꼭 두 팔로 감싸 안고 죽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나는 위험할지라도 아이만이라도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자기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모르고 아이를 품었습니다. 물론 아이도 죽었지만 그것이 많은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어느 집 양계장에 닭을 키우는데 불이 나서 닭이 다 죽었습니다. 검둥이가 된 어미 닭을 치우는데 어미닭의 품속에서 새끼 병아리가 삐약 삐약하며 나오는 것입니다. 어미닭이 그 불속에서 새끼 병아리를 꼭 품고 자기 몸이 다 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새끼 병아리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육신의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고 우리를 그 품에 고이 안아주십니다. 그리고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9절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란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접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로마서 8장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이십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이 믿음의 축복, 이 믿음의 권세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늘 감사하시고, 감격하시고, 영원한 천국의 본향을 바라보면서 오늘 이 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명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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