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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쉼의 은혜 (막 6: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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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의 은혜 막6:30-31

(막 6:30-31)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2차대전 후 20세기 중반의 유럽은 완전히 정신적인 공백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인간을 믿었습니다. 문예부흥과 휴머니즘의 영향으로 인간이 위대하고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2차대전이 일어났고 히틀러는 유대인을 600만명이나 죽였습니다. 그것도 가장 비참하고 끔찍하게 주였습니다. 나치 정권은 프랑스와 스위스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민족끼리 서로 모략과 암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성이 완전히 황폐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그들은 철저하게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인간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가’.

바로 이때 F 셰퍼 목사가 스위스의 알프스 산록에 라브리 공동체를 세웠다. 라브리(L’Abri)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은신처,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그가 라브리 공동체를 세운 목적은 진정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 파괴된 인간성을 되찾고 일그러진 신앙을 회복함으로써 유럽 정신사의 황폐한 골을 메워 시대의 정신적,영적 지주 역할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라브리 공동체에 학자 예술인 종교인 엔지니어 등 각계의 수많은 지성인이 모여 셰퍼 목사와 함께 쉼과 회복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통해 진정한 치유와 회복과 자유의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럽 사회의 정신적, 영적 지주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쉼과 회복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참된 쉼을 통하여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매우 많은 사람들이 피서와 휴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쉼이란 전인적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안에서 참된 쉼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모든 쉼들마저도 방황이고 피곤이며 괴로움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모두 알프스의 라브리로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인생의 라브리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라브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고, 물질이 많으면 행복도 이에 비례할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위와 권세와 물질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러나 정작 있어야할 행복감이 거기에 없을 때 커다란 실망을 안고 좌절해 버립니다. 또 미래에 행복이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녀들을 대학, 대학원까지 교육시키고, 시집 장가를 보내면 행복이 다가오겠지]라고 생각하다가 막상 그때가 되면 허무와 공허만이 자신 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 좀 더 많은 재산을 모아 마음에 드는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아름다운 치장을 하면 행복이 다가오겠지 라고 믿다가 그것이 실상 이루어지면 얼마 되지 않아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결코 그 집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은 자기가 입은 옷의 호주머니 안에 숨어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행복은 절대 행복해지기로 결심한사람에게만 얻어지는 것이며 예수님 안에서 얻은 행복만이 참 행복이요, 영원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갈 때 진정한 쉼을 얻게 됩니다.

  너희는 수고한 너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워 파송하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능력을 받아 각 곳에 흩어져서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병고침의 역사가 일어나고, 귀신을 쫓아내는 역사가 일어나고, 죄인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전도의 열매를 맺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잠깐 쉬어라'고 휴식의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휴식이란 원래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 한자에게 안식일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육간에 휴식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쉼은 누구에게나 무슨 일이나 필요합니다.
(사 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음악 악보에는 음표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음표가 진행되다가 반드시 쉼표가 나옵니다. 노래와 연주에 숨을 고르며 잠시 쉴 수 있는 쉼표가 있습니다. 산언덕을 오르면 쉬어 갈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고 걸어 다니며 봐야 하는 전시회 한 구석에는 쉬어 갈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쉼터가 필요합니다. 서울 종로의 탑골 공원은 노인들의 쉼터입니다. 그늘에 앉아 장기, 바둑,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강원도 산 속 깊숙한 곳에 통나무로 자연휴양림 쉼터를 짓고 쉬고 싶은 사람에게 손짓을 합니다.
교회는 지친 영혼의 쉼터가 되어야 하고 주일은 피곤한 몸과 마음을 주님 안에서 쉬는 날입니다. 주일에 자신도 은혜의 그늘 아래 쉬어야 하고 남도 잘 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따로
‘따로’는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개별적으로’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맡기신 전도와 방문 사역을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주위에 언제나 사람들이 몰려 와서 잠시도 쉴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몰려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친 제자들을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띄어 놓기 위해서 ‘너희는 따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쉼을 얻고 삶에 새로운 활력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일상의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야 합니다. 새로운 광고 문안이 텔레비젼에서 히트 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입니다.
예수님은 힘들고 지치고 새로운 힘을 얻고자 하실 때, 복잡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서 떠나셨습니다.

(마 14: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마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마 20: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홀로 떠나셨습니다. 혼자 있기 위해서 떠나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떠나셨습니다.
신앙적인 진정한 쉼은 사람들에게서 잘 떠나는 것이고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한적한 곳에 와서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휴식은 한적한 장소가 아니라 수십만 명의 인파가 들끓는 해수욕장이나 계곡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잘못된 레저 문화에 오히려 영혼이 오염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갈 필요가 있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내가 왜 사는지, 내 본래의 사명은 무엇인지 자신을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곳, 내 꿈이 자랐던 곳, 주님과 처음 만난 체험의 곳을 찾아 따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음 놓고 부르짖으며 기도하고, 복잡한 세상의 일을 잊고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며 쉬는 것이 휴식의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한적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한적한 곳”(에레모스)이란 외롭고 적막한 “광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광야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셨던 곳이 광야였습니다.

(사 63:13)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사 63:14)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렘 3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렘 31:3)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 약속을 성취했습니다. 왜냐하면 구름 기둥과 불 기둥 대신 예수가 곧 하나님의 임재이며, 만나 대신 예수님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한 떡, 곧 생명의 양식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짬깐
쉬는 것은 잠깐입니다. 계속 쉬기만 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잠깐 쉬라고 했습니다. 휴가 기간이 끝나면 우리는 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지금 정부에서는 주 5일 노동제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를 잘 활용하면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러나 잘못하게 되면 시간을 세상에 빼앗길 우려가 있습니다.

  쉬어라
  다른 가족에 대한 배려를 하고 쉬어라
한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젊은 부부가 늙은 어머니를 집에 홀로 남겨놓고 바캉스를 다녀왔더니 노모가 굶어 죽어 있었습니다. 그 옆집도 바캉스를 다녀와 보니 개가 굶어 죽어 있었습니다. 이웃의 고발로 두 집 부부가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죽은 집 부부는 무죄가 되었고 개가 죽은 집 부부는 유죄 판결이 났습니다. 이유는 이랬습니다. “개는 동물이다. 묶어놓고 굶겨 죽었으니 사람 잘못이다. 동물 학대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는 동물이 아니다. 사람이다. 건강한 분이었기 때문에 배고프면 냉장고를 뒤질 수도, 슈퍼에 갈 수도, 이웃에서 얻어먹을 수도 있었다. 자기가 먹기 싫어서 게을러서 죽은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자기 생명을 보호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그 판결 맞습니다.

그러나 노인이 왜 식사를 안하고 굶어 돌아가셨을까요? "화나서"입니다. "너희들만 가냐"하는 생각이 드셨던 것이지요. 나이드신 어머니나 아버지가 "괜찮다 너희들이나 다녀와라."고 하는 것…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속지 마세요. 속지 말자 위장 평화" 같이 모시고 갈 수 있도록 노력하시고 같이 갈 수 없으면 노여움이 생기지 않도록 여러 가지 신경쓰고 배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된 '쉼'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리를 지키면서 쉬고 천국백성으로서의 신분을 지키며 휴가를 즐겨야 합니다. 물론 사람된 도리도 다해야 합니다.

  새로운 창조를 바라보며 쉬어라
사도 요한의 제자였으며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의 일화입니다. 자고새 한 마리와 놀고 있던 폴리캅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성자라는 분이 어떻게 새와 놀며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폴리캅은 빙그레 웃으며 “활도 쓰지 않을 때는 줄을 풀어 놓아야지,언제나 줄을 매어 두면 못쓰게 되고 맙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만물이 그러하듯 인간에게도 적절한 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쉼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휴식이 주는 편안함만을 위한 쉼이 있는가 하면, 다시 일하기 위한 쉼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쉼은 후자의 쉼이었습니다.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쉼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날에서 셋째 날까지 빛, 궁창, 바다와 육지를 만들어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또 넷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 해, 달, 별, 새, 물고기, 짐승, 사람을 만들어 반드시 자연의 질서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모든 창조를 마치고 쉬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7일째 되는 날에 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피곤해서 쉬신 것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쉬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쉼을 창조하셨다고 이해를 합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쉬시기 전에는 이 세상에는 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쉼을 창조하신 것이 됩니다.

랍비의 창세기 주석인 창세기 랍바는 일곱째 날에 무엇이 창조되었느냐고 물으면서 “고요, 평온, 평화, 휴식”이라고 대답합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중요한 것을 창조하신 날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의 날입니다. 엿새동안 일할 에너지를 창조하고 사랑을 창조하는 날입니다. 안식과 노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안식은 노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휴식은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휴가는 일상에서 떠나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창조의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한 피아니스트와의 대담에서 아나운서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복잡한 콩나물을 한 개도 빼놓지 않고 다 잘 다루시니 정말 놀랍군요?”이 질문에 피아니스트가 대답했습니다. “실은 콩나물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야 연습하면 다룰 수 있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콩나물과 콩나물 사이의 쉼(pause)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예술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음표의 사이는 인간에게 홀로 있는 순간이고 활동 뒤에 가려진 세계일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뛰어다니는 그 음표 사이의 쉼표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이 확연히 달라질 것입니다.

몇 사람의 예술인이 모여 인생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삶이 피곤하고 창작에 한계를 느낀다고 푸념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생동감 넘치는 얼굴로 말을 꺼냈다. '지친 생활에서 활기를 찾고 예술적인 영감을 얻는 비결이 내게 있습니다.' 모두 그를 주목했을 때 그는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 집에 있는 작은 골방이 회복의 쉼터지요. 나는 지칠 때면 거기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다시 생기를 얻고 일어나지요. 골방의 기도가 나를 있게 했습니다.' 이 사람이 불후의 명곡을 남긴 하이든 입니다.
 
최근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재테크보다 중요한 것은 시테크이고 시테크보다 중요한 것은 쉼테크이다” 쉼도 테크입니다. 쉼을 새로운 창조의 시간이 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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