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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막 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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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마가복음 7:24-30)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는 동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녀 때문에 예수 믿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28절에서 “주여 옳소이다만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자식의 문제를 끌어안고 부스러기 은혜만이라도 기대하는 이 여인의 말에서 절박한 심정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답답한 환경과 현실속에서 주님 앞에 나와서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 위해서는 이 여인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의 믿음을 주님께서는 큰 믿음이라고 칭찬하시고 그 소원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가졌던 큰 믿음이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1.이 여인의 믿음은 불리한 상황의 조건을 극복한 믿음이었습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좇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이 여자는 헬라여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자를 “가나안 여자”라고 소개합니다.
왜 똑같은 사건임에도 헬라여자, 가나안여자라는 표현이 나왔을까요?
유대 백성들은 그 당시에 유대 백성이 아닌 비유대인, 즉 자기들을 빼놓고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 통상적으로 헬라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세계문화는 문자 그대로 헬라문화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대 사람들도 이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유대백성은 독특한 자기 문화를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빼놓고 유대 땅 지경 안에서 자기 족속이 아닌 이방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향해서 가나안 사람, 헬라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본문에서는 수로보니게의 족속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수리”라는 말은 시리아라는 뜻이고, “보니게”는 페니키아라는 뜻으로서, 오늘날의 표현대로 한다면 이 여인은 “시리아의 베니게”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24절에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역은 두로라는 지역으로서, 두로라는 곳은 갈릴리 바다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쪽에 위치한 이스라엘과 아주 가까운 이웃마을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반유대적인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유대인들  역시 이들을 최대의 모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보면 “개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이러한 두로 지방에 가셨을까요?
오늘 본문의 사건에 대한 일련의 과정들을 추적해 보면,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자기를 향해 율법을 파괴하는 자로 규정했던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고 그들에게 핍박을 받으신 예수님은 잠시동안 휴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스라엘 땅 안에서는 그런 휴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예수님은 두로 지방으로 가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신뢰했던 이 여인을 만난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문자 그대로 하나의 감격이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방인 가운데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 수가 있었을까요?
이 이방여인은 신앙적인 백 그라운드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습니다.
그 당시 여자는 남자에 비해 이류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옛날 유태인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께 세 가지의 감사기도를 드렸는데 하나는,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 유태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드리고, 둘째는,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드리고, 셋째는, 내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했습니다.
이 짤막한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얼마나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여자들의 인권이 박탈당하고 천시당하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가끔 전도를 해보면 “지금 제가 상황이 워낙 어려워서 못 믿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열등한 조건이나 나의 무력함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더욱 필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내 육체의 질병 때문에 하나님의 치유를 바라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내 인생의 불리한 조건이 오히려 축복의 통로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여인은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믿음에 도달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의 불리한 조건을 극복한 이 여인의 믿음을 우리가 오늘 배워야할 믿음인 것입니다.


2.이 여인의 믿음은 냉소적인 거절을 극복한 믿음이었습니다.

27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러분, 이것이 허락입니까? 거절입니까?
거절이죠. 거절도 그냥 거절이 아니라 거의 모욕에 가까운 거절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흥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편견이 아니라 테스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이 테스트를 통해서 이 여인이 “어떻게 반응하나?”를  확인하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우리의 삶은 테스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도청문제, 감청문제, 몰래카메라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 행동 하나 하나가 낱낱이 감시되고 있다”라고 생각해 보면 얼마나 끔찍합니까?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사건이나 문제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주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땅의 삶 전체가 사실은 테스트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오히려 이 여인의 믿음이 드러날 수 있는 하나의 창을 제공하시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똑같은 기사를 기록한 마태복음에는 이 여인의 절박한 간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처음에는 침묵하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문제로 인하여 절박한 가운데 “주님, 나를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했을 때,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런 대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침묵을 거절로 해석하여 “그러면 그렇지. 주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실리가 없어”하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조하면서 신앙의 자리에서 쉽게 후퇴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구체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믿음의 속성상 지속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회용 자동기계에다가 동전을 집어넣고 거기서 내가 필요한 콜라나 사이다 혹은 어떤 음료를 끄집어내는 것처럼, 기도를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으신 하나님은 내 과거도 아시고 현재도 아시고 미래도 아시기 때문에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을 믿고” 지금은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당장 응답이 나타나지 않아도 우리는 주님을 계속해서 믿고,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이 여인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주님을 지속적으로 믿고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의 풍성한 응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신뢰와 끈기 있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집요함을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침묵할 때도 실망하지 말고 계속해서 주님께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절 뒤에 미소를 지으시면서 한없는 연민으로 나를 바라다보고 계시는 주님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고 이런 시련의 현장에서도 주님 앞에 엎드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냉소적 거절을 극복할 수 있었던 믿음, 이것이 이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3.이 여인의 믿음은 주님의 은혜에 매달리는 믿음입니다.

28절을 읽겠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얼마나 윗트 있는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존심도 없나?” 그럴지 모르지만 은혜를 받으려면 우리는 이 자존심을 극복해야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자세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여인에게 주님에 대한 분명한 신뢰가 그 마음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여기서 발견합니다.
28절에서 여자가 예수님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주여” 이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주경학자는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에게 처음 나와서 “주여”라고 부른 사람은 이 여인 밖에는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미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오기 전에 “예수가 주님”이라는  믿음이 그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 이 여인의 “주여”라는 이 표현은 단순하게 예수님을 그저 질병만 고치는 분 정도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메시아, 자기 삶의 주인, 자기 인생을 구원하시고, 자기 인생을 새롭게 하시고,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기대처럼 빚어 만들 수 있는 나의 구원자,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을 보면,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도록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여인이 구약성경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시다”라고 믿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메시아의 약속을 보면, 그 메시아의 약속 가운데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좀더 자세히 연구하고 싶으신 분들을 이사야서 60장, 61장, 62장들을 읽어보세요.
메시아로 오시는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싸메주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만민들에게 구원자로 오실 구세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한 구세주로 묘사되어 있는 이 구약의 약속을 붙들고 간구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27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것은 표면상으로는 거절처럼 들리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여자가 이 말씀을 거절로 듣지 아니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아마도 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려면 말씀을 자세히 들어야 합니다.

여기 27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구원역사의 섭리는,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먼저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이 이방사람들을 제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속사 섭리의 순서로서 먼저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시고, 그 다음에는 복음이 어디로 갑니까?
이방인에게로 갑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이 약속을 붙잡고 엎드렸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나 자신이라고 여러분은 생각되지 않습니까?
교회생활 가운데 보면, 은혜 받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내 가슴속에 다가오는가?,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는가?,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감동이 있고 감격이 있는가? 하는, 이 말씀과 나의 거리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요1:12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을 똑같이 자녀로 삼아 주시고, 부스러기가 아닌 가장 놀라운 은혜를 준비하신 주님은 이 여인을 테스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여, 부스러기 은혜라도 내게 주옵소서”라고 말씀을 붙들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여 테스트에 합격한 이 여인에게 주님은 마침내 커다란 은혜를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이 여인은 은혜를 입어 딸이 고침을 받았고 귀신에게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따라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주님을 신뢰하고 더욱 더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여 이 여인처럼 큰 은혜를 경험하시고 체험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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