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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전연승의 은혜 (수 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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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연승의 은혜
여호수아 11장 1-23절

(1) 하솔 왕 야빈이 이 소식을 듣고 마돈 왕 요밥과 시므론 왕과 악삽 왕과 (2) 및 북방 산지와 긴네롯 남편 아라바와 평지와 서방 돌의 높은 곳에 있는 왕들과 (3) 동서편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산지의 여부스 사람과 미스바 땅 헤르몬 산 아래 히위 사람들에게 사람을 보내매 (4)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민중이 많아 해변의 수다한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 (5) 이 왕들이 모여 나아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가에 함께 진쳤더라 (6)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 (7)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졸지에 습격할 때에 (8)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 고로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쫓고 동편에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쫓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죽이고 (9)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 (10)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더니 그 때에 여호수아가 돌아와서 하솔을 취하고 그 왕을 칼날로 쳐죽이고 (11)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불로 하솔을 살랐으며 (12) 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취하여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명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 (13) 여호수아가 하솔만 불살랐고 산 위에 건축된 성읍들은 이스라엘이 불사르지 아니하였으며 (14) 이 성읍들의 모든 재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탈취하고 모든 사람은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15)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16)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남방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의 산지와 그 평지를 취하였으니 (17) 곧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 산에서부터 헤르몬 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까지라 그 모든 왕을 잡아 쳐죽였으며 (18)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과 싸운 지는 여러 날이라 (19)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 바 되었으니 (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21)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22)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23)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불패의 신화

일전에 KBS에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어떻게 드라마 제목에 ‘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까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고 또 관계된 글들을 읽다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23번의 전투를 치렀는데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승리한 것이 아니라 350여척의 적선을 파괴하면서도 자신의 배는 단 한 척도 잃지 않는 대승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명량해전은 유명합니다. 단 12척의 배로 전투함과 보급선을 포함한 333척의 배를 이긴 세계 해전사에 유례가 없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러일 전쟁 때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물리쳐 일본의 영웅이 되었던 도고 제독도 이순신을 가장 존경하는 장군이라 하며, 이순신을 바다의 신, 전쟁의 신으로까지 높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해서 23전 무패의 엄청난 업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승리의 비결을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적과 자신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한 후 자신이 승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형을 이용해서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로 당시 임금이던 선조가 이순신 장군으로 부산포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를 거부하다 관직을 박탈당하고 맙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를 거부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승산이 없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하면 백전백승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연전연승의 은혜’라 하였는데 실제 가나안 땅 전투에서 여호수아는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출애굽기 이후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가데스바네아 에서와 아이  성 전투의 단 두 차례의 패배를 경험한 것 외에는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두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했던 이유는 모두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입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는 열 두 정탐꾼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열 정탐꾼들이 가나안 족속은 거인이고 우리들의 메뚜기 같다고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광야 40년 유랑의 벌을 내리셨는데 이를 거부하고 가나안을 진격하다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는 아간이 여리고 성 전투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몰래 물건을 훔친 것이 원인이 되어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두 전투 모두 여호수아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개인적으로는 전혀 패배해 본 적이 없는 불패의 사람이었다 할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둔 전과가 바로 다음 이어지는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장 7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이편 곧 서편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 산까지에서 쳐서 멸한 왕들은 이러하니 ....... 9 하나는 여리고 왕이요 하나는 벧엘 곁의 아이 왕이요...” 해서 도합 31왕의 이름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이런 놀라운 전과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정상의 자리에 선 이후에, 아니면 인생을 마치는 날이 되어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며 이런 전과를 기억할 수 있다면 참으로 신이 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북부 연합군들과의 전투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서 전투를 크게 세 번 치렀습니다. 첫 번째는 여리고 성과 아이 성으로 이어지는 중부지역 전투입니다. 두 번째는 가나안 남부 기브온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세 번째는 북부지역 하솔 왕 야빈을 중심으로한 연합군들과의 전투이고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의 마지막 대 전투가 됩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자 오늘 읽은 23절에서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하고 말씀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여호수아처럼 연전연승하는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이순신 장군만 불패가 아니며, 여호수아 장군만 연전연승이 아닙니다. 우리도 세상을 향하여 승리하는 인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긴 싸움을 싸워라

여호수아가 이 세 번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또한 이긴 싸움을 싸웠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미 승리의 약속을 주셨고, 이 확신 가운데 여호수아는 전쟁에 나아갔습니다. 여리고성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6장 2절 말씀으로 먼저 승리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아이성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8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 남부 지역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10장 8절을 보십시오.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오늘 읽은 북부지역 연합군들과의 전투도 또한 그렇습니다. 11장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

여호수아는 모든 전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승리의 약속을 받고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십니다. 만군(蠻軍)의 여호와는 전쟁 용사의 신이십니다. 만군의 뜻은 일만 ‘만’에 군사 ‘군’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은 수많은 천군천사들 가운데 좌정하시면서 사열을 받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승리의 약속을 주셨으므로 이보다 더 큰 보장을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만 이런 승리의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이런 승리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우리가 예배하고 모시는 주님은 바로 세상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예수님의 승리에 대해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2:15)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님이 이제 이 세상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예수님은 이 권세를 믿는 자들에게 주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7, 18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여러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권세를 보십시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이 쫓깁니다. 요즘 보면 무병이니, 신이 내렸니 하며 마치 귀신이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뱀을 손으로 집고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습니다. 실제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멜리데라는 섬에서 독사가 그 손을 물었지만 전혀 해가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는 자연만물을 다스리며, 모든 해를 이길 정도로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시시한 인생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지지 마십시오. 사울이 다윗에게 주었던 축복이 여러분에게도 임하기를 바랍니다.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삼상26:25)

예수는 승리자

제가 칼 바르트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이 칼 바르트는 20세기 신정통주의를 연 신학자입니다. 그런데 이 칼 바르트에게 막대한 영향을 마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블룸하르트 부자(요한 블룸하르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입니다. 저는 그중 아버지 블룸하르트의 일호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는 평범한 목회자에 불과했는데 그의 목회를 결정적으로 바꾸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귀신에 들렸던 고트리빈 디투스라는 소녀와의 영적 싸움이었습니다. 이 소녀는 귀신에 들린 전형적인 빙의 현상을 보였습니다. 이상한 말을 하고 이상한 형체가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거품을 내 품고 자주 병에 걸리기도 하였고, 이 소녀가 발작을 할 때는 그야말로 영화의 장면들처럼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 갑자기 흔들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지역의 목회자였던 아버지 블룸하르트는 이 사건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 그 소녀의 손을 잡고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손을 모으고 기도해! 예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마귀가 하는 것을 충분히 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그러자 발작이 멈추고 소녀가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가장 깜짝 놀랐던 것은 블룸하르트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에 이런 능력이 있는 것에 놀랐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적싸움은 1년 반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언니의 병 때문에 이 소녀의 동생까지도 병에 걸렸었는데 이 싸움은 결국 성탄절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납니다. 이때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데 그 동생이 발광을 하면서 큰소리를 지르다가 귀신이 최종적으로 떠나갔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이 소녀의 입으로 외쳤던 것은 “예수는 승리자다” “예수는 승리자다”는 외침이었습니다. 이 ‘예수는 승리자’다는 말은 이후 블룸하르트 부자의 신앙적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이성을 신뢰하는 자유주의와 진보적 낙관주의가 판을 치던 19세기였습니다. 그런데 인간 이성으로는 제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예수의 이름의 능력으로 제어한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이 마을에 놀라운 각성운동과 참회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블룸하르트' 목사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목사관에 찾아와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했습니다. 만성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을 끊고 회의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믿게 되었으며 병든 사람들이 다시 그들의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동안 텅 비었던 교회가 가득 찼고 평일에도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 성서를 읽고 찬양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정규적인 예배 외에 특별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는 승리자이십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예수가 승리자로서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단지 귀신들과의 영적 싸움에서만 승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악한 습성과 좋지 않은 성격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벽, 술, 인터넷 중독, 성격적으로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성격들 우리가 버리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비록 현재의 싸움에서 한 번은 지고 한 번은 승리하며 연전연승의 은혜는 못 누린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보다 하나님의 비전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에 대해 요한일서 3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마지막 날 예수님을 보게 될 때 우리가 그와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우리 연약한 부분과의 일전일투를 벌이며 우리는 조금씩 예수를 닮아갑니다.

우리 저주스런 운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존재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힘든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우리가 얻게 된 족한 영광과 능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 18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영화나 연극도 그 중간과정이 밋밋한 것은 별 재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시련이 많고 클라이막스가 많아야 재미있습니다. 등산도 그렇고 어떤 목표점을 힘들게 올라야 정상에 섰을 때 그 기쁨이 더 큽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 인생을 뒤돌아보면 참 볼만 할 것입니다. 아이 성 전투의 패배가 있기에 가나안 전투는 더 빛납니다.

위대한 고난

우리는 문제에 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기는 존재로 부르셨습니다. 패배를 부지기수로 한다고요? 아닙니다. 시련은 우리의 밥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영양제와 같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고난은 우리를 정금처럼 빛나게 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 패배는 없습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입니다. 이미 우리는 부활의 승리자로서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그 앞에 있는 작은 패배들은 우리 인생을 빛나게 만드는 배경들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지긋지긋하게 여러분을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서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11장 20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끝까지 버티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비슷한 말이 출애굽 사건에서도 등장합니다.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하시니까 바로는 열 가지 재앙을 맞아도 꿈쩍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는 말도 되지만 바로가 끝까지 완고하게 버티었다는 뜻도 됩니다. 결국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온 애굽뿐만 아니라 온 가나안 땅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여러분을  찰거머리처럼 힘들게 하는 문제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영광을 드러내려는 뜻에서입니다. 여러분의 고질적인 문제와 싸우십시오. 바로 그것이 여러분을 위대하게 만들고, 여러분의 은사가 될 것입니다. 상처가 곧 은사입니다.

우리나라가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 고통을 받고, 서로 으르렁대고, 싸우고 미워하는 이유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이 한민족을 강하게 만드십니다. 고난과 위기가 있기 때문에 땅은 더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한반도는 일찌감치 중국이나 일본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 경쟁하다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사를 이런 섭리사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마 함석헌 선생님이 우리 역사를 이런 섭리사적인 관점에서 본 유일하신 분 같습니다.『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바로 그런 책입니다. 원래 그 책 제목은 ‘성서로 본 한국 역사’였는데 함석헌 선생이 보다 보편적인 의미인 ‘뜻’이라는 단어로 바꾸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얼마나 고난의 역사입니까? 우리의 역사는 외적의 침입과 약탈, 전쟁과 난리로 얼룩진 역사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삼국시대 이후 우리 역사에서 전쟁이 일어난 횟수가 1백 번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내란을 제외하고 이민족의 침략만 해도 5, 60 회가 되고, 그중 전국에 걸친 전쟁은 30회나 달했다고 합니다. 이중에서도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이 가장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선생은 몽고군의 끔찍스러운 약탈 행위를 이야기하다 말고 이렇게 탄식합니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 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 역사, 이것이 역사냐? 나라냐?”

이렇게 모진 고초를 겪은 민족이지만 함석헌 선생은 고난을 통해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다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민족사를 봅니다. 그 중 ‘고난의 선물’이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고난의 선물>
고난은 죄를 씻어준다.
고난은 인생을 씻어 깨끗하게 한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든다.
이마 위에 깊은 주름살이 갈 때 마음속에 깊은 지혜가 생기고,
살을 뚫는 상처가 깊을 때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향기가 높다.
평면적 세속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고난의 잔을 마셔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어 냄으로써 생명은 한 단계씩 진화한다.
핍박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상대방을 포용하는 관대함이 생기고
궁지와 형벌을 참음으로써 자유와 고귀함을 얻을 수 있다.
개인에게나 민족에게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아름다운 나라를 이루게 되었을 때 과거를 되돌아본다면 고난이 오히려 아름다울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이 만큼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와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시나리오의 결말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않고 우리 경주를 다 마치면 우리는 승리자의 월계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연전연승의 비결

여호수아의 연전연승의 비결은 다름 아닙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대로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싸웠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여호수아에서 계속 반복되는 주제인 말씀 순종이 그 원동력입니다. 11장 9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 여호수아에게 말과 병거는 유혹이었습니다. 고대시대 말과 병거 없이는 싸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생활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말이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고지에서만 전투했기에 병거가 없었습니다. 병거는 요즘으로 말하면 탱크와 같습니다. 그런데 싸움에서 노획물로 획득한 말의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사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의 승리가 자기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20:7) 승리는 말과 마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것이라면 가차 없이 버리는 것, 이것이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말씀 순종은 계속 반복됩니다. 12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취하여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명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 1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는 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광야로 몰아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떡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연단을 받고 나면 우리로 연전연승하며 하나님의 큰일을 하는 위대한 존재로 만드실 것입니다.

세번째 여호수아는 순종하되 신속히 순종하였습니다. 여호수아의 전투는 항상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그가 하나님 말씀에 재빨리 순종한 결과입니다. 오늘 읽은 7절 말씀입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졸지에 습격할 때에” 졸지에 곧 갑작스럽게, 신속하게 기습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해변의 수다한 모래와 같은 군사들과 말과 병거가 있을지라도 꼼짝 없이 당합니다. 여호수아의 전투를 보면 여기에서만이 아닙니다. 여리고성 전투가 있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칠 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수6;15). 아이 성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8장 10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백성을 점고하고” 남방 연합군과의 싸움에서도 역시 동일합니다. 10장 9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서 그들에게 갑자기 이르니”

말씀 순종하되 부지런히 순종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적들보다 한 발 앞서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주실 때 즉각 순종하십시오. 즉각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성과 욕망이 어느새 그 감동을 저 심연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고 맙니다. 하루를 허송 세월하지 말고 열심히 사십시오. 역사상 부지런한 자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지 게으른 자가 쓰임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부지런한 새벽의 사람이었기에 연전연승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부지런한 분이셨습니다. 평상시에는 배를 만들고 수리하며, 군대를 훈련시키기에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정찰을 보내 적들을 부지런히 감시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이순신 장군의 승리를 정찰의 승리라고도 말합니다. 적들의 규모와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싸웠기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바쁜 중에도 『난중일기』를 쓰셔서 우리에게 당시의 상황과 조선의 정세를 정확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인생이 승리합니다.

여러분도 승리의 확신과 말씀 순종, 부지런함으로 연전연승하시는 위대한 사람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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