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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잊혀진 제자도 (눅 9:5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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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인의 동네에서 거절을 받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신다.
그 가는 길에서 제자가 가야할 제자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오늘 말씀은 제자도의 핵심이 담겨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담겨 있다. 우리의 상식과 정서에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셨기에 우리의 정서와 의지에 반하더라도 말씀을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말씀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첫 번째 제자도

어떤 사람(57절) -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했을 것이다. 그는 따름을 강조하고 싶었다.
예수님(58절) 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머리 둘 곳없다는 것은 편안히 쉬며 안식할 수 있는 처소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잠시 휴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도 없는 고단한 삶,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다.

사마리아의 동네에서도 문전박대를 당하고 다른 마을로 가셔야만 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여우는 굴에서 쉬고, 새는 자기 집(둥지)에서 쉬는데, 인자(나)는 머리 둘 곳(쉴 곳)조차 없다. 너는 지금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를 따르겠다고 하지만 정말로 너는 어디로 가든지 나를 따를 수 있는거니? 그런거니? 나는 내 피곤한 몸을 누일만한 곳 하나 없는 삶을 산다. 사마리아에서도 우리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아무 것도 없는 그 곳이 내가 가는 곳이다. 너는 정말 그런 곳도 갈 수 있는 거니?” 

*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해 본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소유주이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물의 주인이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을 골로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골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있느니라.”

  그런 분이 왜 이 세상사는 동안에 머리 둘 곳 하나 없이 그렇게 고단한 삶을 사셨는가? 왜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자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소유하지 않으셨는가? (역설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그 만물을 다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이들과 함께 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 학용품, 장난감, 먹을 것, 옷 등 10만원 어치를 샀다고 해 보자. 그것을 사온 다음에 자기 것을 나누고, 이것은 내 것이라고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사람은 누굴까? 바로 철없는 아이들이다. 아버지인 나는 바락바락 우기지 않는다. 이미 그 물건들은 모두 다 내가 돈을 지불해서 산 나의 소유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의 것으로 샀다고 해도 내 돈을 지불하고 산 것이기에 그것에 대해 넉넉한 마음으로 그것을 소유하지도 않으면서도 그것은 내 소유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주인이셨지만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소유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다. 그것을 소유한 자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것을 소유한 우리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 세상의 것을 잡으려고, 이것이 내 것이라고, 이것만은 잡아야 한다고 소리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얼마나 유치한 삶인가?
  제자는 어디로 가든지, 어떤 삶을 살든지, 어떤 곳에 거하든지 주님으로 인해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제자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간직하고 사셨기에 가장 부요한 삶을 사셨던 주님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다.

2. 두 번째 제자도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라”
그 사람 이렇게 말한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나를 믿지 않아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하여금 육신적으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이 말씀은 장례식은 쓸데없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잘 알아야 한다.
그 사람 생각에 먼저 해야 할 것(우선순위- 나로 먼저 가서)은 “죽은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사(장례)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의 마지막 절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해야 할 것(우선순위)은 나를 따르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나라에서의 관계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보다 우선되어야할 가치라고 하신다.

  여러분은 복음을 전하는가?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을 가장 큰 사명으로 알고 있는가? 여러분은 올해 몇 명을 전도하기로 했는가? 오늘까지 몇 명을 전도했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맺고 있는 관계의 마지막을 매듭짓고 정리하는 그 시간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관계가 시작되는 그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우리가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너무 그 슬픔에 오랫동안 얽매어 있지 마라.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이끄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한다. 주님은 그것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고 하셨다. 그것이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함으로 그 사람의 영혼에 복음의 씨앗을 심는 것이, 장사함으로써 사람의 육신을 땅에 묻는 것보다 더 영적 가치가 있음을 알라고 하셨다. 

3. 세 번째 제자도

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61절) -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62절) -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먼저 가족과 작별하는 것을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농부의 쟁기의 비유를 통해서 그의 생각을 바로 잡아주신다. 농부가 쟁기질을 할 때 정면에 있는 이랑의 끝을 보고 소를 몰면 바르게 밭을 갈 수 있다. 그런데 발밑을 보거나 뒤를 돌아보면 바르게 밭을 갈 수도 없고 처음에 정해 놓은 목표 지점과는 상관없는 곳에 도착해버리고 만다. 그것처럼 “하나님의 나라, 천국, 믿음”이라는 목표를 정했으면 그것을 바로보고 끝까지 가야한다.

  때로는 인간적인 관계가, 경계적인 손실이, 사람들의 비난과 수군거림이, 또 내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고뇌와 의심들로 인해서 우리의 목표인 하나님의 나라가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굳건한 목표를 절대로 상실해서는 안 된다. 쟁기가 잡은 내 손에 굳은살이 박히고, 피가 나도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해야 한다. 틈만 있으면 교회를 빠지려고 하고, 믿음을 접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사탄 8복에 대해서 들어 보셨는가? 사탄이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1. 피곤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나의 가장 믿을 만한 일군이 될 것임이요
2. 목사의 과오나 흠을 보고 트집을 잡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할 것임이요
3. 자기 교회이면서도 나오라고 사정사정해야만 나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교회 안에서 말썽꾸러기가 될 것임이요
4. 남의 말 옮기기를 좋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것이요
5. 걸핏하면 삐죽거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교회를 곧 그만둘 것임이요
6. 하나님의 일에 인색하고 헌금하지 않는 자도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일을 가장 잘 돕는 자일 것임이요
7.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바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마침내 나의 조롱거리가 될 것임이요
8.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자기의 형제와 이웃을 미워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이니라. 노멘.

  초보운전자는 누구나 자동차 뒤에 붙이는 이름이 있다. "초보운전"이라는 말이다. 어떤 초보운전자가 운전을 하는데 차를 몰고 나가면 사람들이 차를 자기 차 뒤에 바짝 붙여서 늘 위협을 했다. 그러자 그 남편이 자기 부인의 초보운전이라는 그 딱지 아래에 한 마디를 더 썼는데 그 이후로는 절대로 다른 차들이 뒤에 바짝 붙지 않았다고 한다. 그 남편은 이렇게 썼다.
"초보운전-자주 뒤로 밀림"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과 신앙에 어떤 이름을 붙이고 다닐 것인가? 
우리의 이름은 예수님의 제자이다. 제자가 살아가야 할 길은 제자도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잊혀진 제자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과 교회는 제자(또는 제자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제자가 되어 제자를 삼으라”했지만 “제자”가 되지 않고도 영원히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다는 가르침이 교회 안에서 용인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돈, 더 많은 건물, 더 많은 프로그램, 더 많은 교육이 아니라 그 분의 제자(도제, 학생, 배우는 사람)이 되어 인간 실존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법을 그 분께 배우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보여주는 교회는 언제나 위에서 말한 그런 것들(더 많은 사람, 돈, 건물, 프로그램, 교육)이 하나도 없거나 거의 없을 때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다. 비결은 거기에 있다. 그들이 제자가 되었다는 데 있다.

  제자란 그리스도처럼 되겠다는 의지와 그래서 그 분의 믿음과 실천 안에 거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자신의 일상사를 그 목표에 맞추어 체계적이고 점진적으로 재조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제자도를 버리면 우리는 내 마음을 채우는 평안, 사랑이 관통하는 삶,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권에 비추어 매사를 바라보는 믿음, 아무리 낙심되는 상황에서도 견고히 서 있는 소망, 옳은 일을 행하고 악한 세력을 물리치는 능력을 잃는다.” 

  제자도는 우리들에게 더 이상 잊혀진 추억이 되어선 안 된다. 제자도가 우리들의 삶이 되어야 하고, 목표가 되어야 하고, 현실이 되어야 한다. 제자도를 버리는 교회는 병들고, 제자도 없이 복만 쏟아내는 교회는 세상을 오염시키고, 제자도를 버리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약속한 풍성한 삶을 잃는다. 앞으로 성경을 볼 때 여러분의 눈이 다른 어떤 단어보다 “제자”라는 말이 더 머물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요 본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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