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구원 그 이후의 신앙 (창 22:1-18)

  • 잡초 잡초
  • 450
  • 0

첨부 1


구원 그 이후의 신앙 (창 22:1-18)

우리나라에서 복음화 율이 가장 낮은 곳이 경상도지역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를 조사해 보았더니 이유가 있더랍니다. 찬송가 189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그렇게 찬송을 해야 되는데 경상도 사람들은 그 피가 아니라 커피로 속죄함 얻었네 그래서 커피가 어떻게 우리를 속죄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이 변질되어져서 복음화율이 제일 낮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설은 아닌 것 같구요.

구약의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어린양의 피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를 지나서 신구약 성경에 가득히 담겨져 있습니다. 골고다의 언덕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지신 십자가가 있고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보혈의 피가 구원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흘려야 될 피는 구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일 본문과 똑같은 본문입니다. 지난 주일은 양식으로 살지 말고 씨앗으로 살아라 그래서 「축복의 씨앗」이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구원 얻는 신앙 그 이후의 신앙」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부르러 오시는 것은 구원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 그 이후의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는 우리에게 더 나은 단계, 다음 단계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너희의 과거를 버릴 수 있느냐 물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시작입니다. 죄를 버리는 것 세상을 버리는 것,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가치를 버리는 것, 인생의 목적을 버리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떠나는 것 - 과거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요구합니다. 너는 미래를 포기할 수 있느냐. 예수를 얻기 위해서 너의 보물을 포기할 수 있느냐.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 너의 미래까지도 나한테 맡길 수 있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완성이요 구원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의 중요한 다른 양면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신앙의 명제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떠나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두 번째 명제는 내가 제일 사랑했던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그렇게 가지고 싶은 것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버리는 것입니다.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기 때문에 시험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시험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구원 그 이후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네 신앙이 진실한 것이냐? 너는 정말 그리스도인이냐 우리에게 묻는 것이지요.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가지고 싶은 것 얼마만큼 포기할 수 있느냐 묻는 것입니다. 첫 번째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을 때에는 약속을 주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은 빼앗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시험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시험이 무엇입니까? 다음 단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다음 축복의 자리로, 다음 은혜의 자리로, 다음 영광의 자리로, 다음 성소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관문, 그게 시험이지요. 여기서 떨어지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없는 겁니다. 대학 입학 시험에 떨어지면 대학에 못 들어가지요. 몇 번이고 다시 쳐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시험한 단어로 되어있습니다만 원문이나 영어 성경에는 다른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유혹"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험받지도 아니하시고 누구를 시험하지도 아니하신다 할때 여기 시험은 유혹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시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할 때 여기 시험은 시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시련을 겪습니다. 우리가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은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이 시련을 이겨내면 복이 되고 성숙이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에 시험이라는 이 단어는 유혹도 아니고 시련도 아니고 테스트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관문을 얘기하는 것이지요. 이번에 하나님이 찾아오는 방법도 독특하고 여러번에 걸쳐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찾아오셨지만 찾아오신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내용도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시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무슨 얘기입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명령만 하십시오. 뭐든지 요구만 하십시오. 제가 흔쾌히 기쁨으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자세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그때 이사야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똑같은 대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찾아오셔서 요구하시면 명령하시면 말씀하시면 당연히 "예"라고 대답해야 될 것인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예하고 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경험할 수 있는데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데, "예"라고 못하기 때문에 한번도 "예"라고 대답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늘 구원얻는 신앙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지요.

저희들 학교 다닐 때에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 무엇인가? 했을 때에 아이들이 연구하고 연구하고 한 말이 "들에 콩깍지는 깐 콩까진가 안깐 콩깍지인가? 안 깐 콩깍지는 어떻고 깐 콩깍지는 어떠냐 깐 콩깍지나 안깐 콩깍지나 콩깍지는 다 콩깍지지."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게 아니고 "예" "아니오"라는 말이 제일 어렵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 살아가다가 참 감사한 일이 있을 때에 "감사합니다" 해야 되는데 그게 어렵데요. 잘못한 일이 있을 때에 "미안합니다"하면 모든게 끝나는데 그말이 제일 어렵데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예"해야 되는데 그 "예"가 대단히 어렵데요.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 기뻐하지 않는 자리에 머물 때에 "아니요" 하고 일어서야 되는데 그게 굉장히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시험"이 무엇입니까? 1+1이 얼마고 이렇게 묻는 시험정도가 아닙니다. 대단히 가혹하고 잔인한 테스트였습니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실 때에 찾아오신 하나님이 반갑지요. 내게 재물 주시고, 명예 주시고, 치유를 주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신다고 할 때에 "아멘"하고 받아드린다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구원 그 이후에 찾아오시는 신앙의 테스트는 아무나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들 이삭을 주신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이삭을 바치는 요구는 구원 그 이후의 신앙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 나라 얻기 위해서 예수를 얻기 위해서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 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평생 교회를 들락거리면서도 일주일에 몇 번 예배를 드리면서도 예수 믿은지가 십년 이십년이 되고 그럴듯한 직분도 가지고 있고 교회 프로그램생활에 익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차원 높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시험에서 미끄러져서 구원얻는 신앙 싸움만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시험 타령이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구원 그 이후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뭘 요구한 것입니까? 이삭을 요구하는 겁니다. 이삭 앞에 붙어 있는 형용사 꾸밈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2절에 보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원문에 보면 "네 독자" 네 네 네 라고 되어 있습니다. 12절에도 "네 독자 네 아들" 16절에도 "네 아들 네 독자" 여기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독자 이삭은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른 것 다 포기하고서도 이것만은 버릴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누군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다 포기하고 마지막 하나 남기라 하면 뭐 남길래? 그러면 아들 이삭을 남겼을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되어 버렸습니다.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그것 다른 것 다 포기해도 포기할 수 없는 그것, 그것을 나를 위해서 버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묻는 것입니다. 혹독한 시험이지요. 순교적인 요구지요. 이삭을 버리는 것은 아브라함에게는 적어도 순교입니다.

기독교는 순교의 종교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순교의 피를 먹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에게인 1907, 부흥을 노래하지만 한국교회는 순교의 피가 있었기 때문에 부흥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위기를 맞이한 것은 순교의 피가 말랐기 때문입니다. 얻는 신앙, 구원 얻는 신앙에는 익숙합니다. 복 받는 신앙에는 익숙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한국교회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이삭을 바치는 순교하는 그 신앙을 버렸기 때문에 순교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한국교회 부흥이 메말라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그마한 예배당 하나를 건축하면서 보니까 여기에는 피가 묻어야 올라가 지더라구요. 그냥 올라가 지지가 않더라구요. 이 예배당을 건축할 때 건축 위원장은 김경환 장로님이셨습니다. 예배당 철골이 올라간 다음에 철근 공사를 하게 되는데 강도가 제대로 되어야 되고 굵기가 제대로 되어야 되고 이음이 잘 엮여져야 튼튼해집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저랑 김경환 장로님이랑 매일같이 철근공사하는데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고 내려오는데 김경환 장로님께서 헛발을 디디는 바람에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어요. 이 철근공사 김경환 장로님 갈비뼈로 한 겁니다.

그 당시에 박수선이라고 하는 연세드신 할머니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공사할 때 성도들이 둘러서서 기도하고 그늘 밑에 돗자리 깔아놓고 기도하고 가곤 하거든요. 돗자리 깔아놓고 기도하고 가시다가 "내가 피를 팔아서라도 빨리 예배당 지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돌아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장례 치루다가 제가 그 얘기를 했더니 자녀들이 "교통사고 보상금은 어머니의 피 값인데 이걸 자식들이 나눠 쓸 수는 없지 않겠느냐 어머님의 마지막 유언이 피를 팔아서 예배당 짓겠다고 한 말이 마지막 유언인데 예배당 짓는데 바치자." 그래서 저에게 돈 뭉치를 들고 왔어요. 그 돈을 제가 쓸 수가 없더라구요. 끝까지 가지고 있다가 공사 다 끝난 다음에 공사하시는 분한테 예배당 십자가 이것으로 세웠으면 좋겠다고. 하늘에 올라가 계신 박수선 집사님 이렇게 예배당 내려다 보시면서 큰 십자가 불빛 있으면 얼마나 좋아하시겠느냐고 그랬더니 돈 뭉치가 컸던지 고급스럽게 하면 될텐데 돈이 많으니까 십자가를 크게 세워버렸어요. 그래서 십자가가 저렇게 큰 겁니다. 이게 그 어른의 피 값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중보기도실에 들락거리는 분들이 골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교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부족한 저를 위해서 기도하는 분들이 우리교회에 참 많이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순교입니다. 내가 복 받기 위해서 기도하는게 아닙니다. 나 잘되자고 기도하는게 아닙니다. 내 자식 위해서 기도하는 것 아닙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지만 혼자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뼈아픈 뼈를 녹이는 기도의 제목을 거기다 올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도제목을 가지고 울면서 기도하고 나오는 겁니다. 이 시간에도 지금 누군가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있을 겁니다. 시간을 죽이는 아무런 사심이 없는 시간을 죽이는 순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전채플을 건축할 때에도 순교와 눈물과 땀 희생 피가 묻어 있어야 그 비전채플이 세워지는 거지요. 하나님은 지금 이삭의 순교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이 요구는 하나님의 신비가 숨어 있는, 하나님의 깊은 비밀이 숨어 있는 요구입니다. 그 이삭은 아브라함의 이삭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아 네가 네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기로 결단했느냐 그래 고맙다. 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 외아들 예수를 골고다 언덕에서 죽이기로 결단했어. 나무 장작 걸머지고 모리아 산에 오를 때 네 마음이 아팠지.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내 아들을 나는 지켜 볼 거야. 칼을 뽑아들고 나무를 벌려놓고 그 아들을 나무 위에 올려 불사르려 할때에 칼을 내리치려 할 때에 네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그 아들이 피 흘려 부르짖는 모습을 나는 지켜 볼거야.'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예요. 아브라함에게 요구하는 이 요구는 잔인한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잔인한 결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진 결단을 창세기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을 바치는데 앞마당에서 바치면 어떻겠어요. 뒤뜰에 가서 바치면 어떻겠어요. 그러나 모리아산에 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골고다 산에 올라야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구원 그 이후의 신앙은 예수 믿고도 병들 수 있어요. 예수 믿고도 만사 형통한 것이 아니라 실패할 수 있어요. 손해볼 수 있어요. 욕을 얻어먹을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버리지 아니하고 예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붙들고 살 수 있겠느냐. 이것이 없다면 네 신앙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병들었을 때에 실패했을 때에 손해보았을 때에 그래도 예수님 붙들고 일어설 수 있느냐 묻는 것입니다. 믿음 가지면 만사형통한다 하지요. 그러나 믿음 가졌기 때문에 지구상 도처에서 저 모슬람 국가에서 불교 국가에서 낯설고 물설은 국가에서 지금도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사람들이 순교의 재물이 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지구 도처에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북한 땅에 들어가서 탈북했다가 예수를 믿고 북녁땅으로 돌아가서 예수를 전하다가 공개 처형될 위기에 처해있는 우리의 동포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은 입 다물고 있는데 온 미국교회가 일어났습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 그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여론을 전세계에서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일이 잘된다. 예수 믿었기 때문에 예수 이름 빌려서 세상을 다 묻어버리자. 이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목표는 예수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갈등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갈등하면 잘못 사는 것입니다.

3절에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갈등없는 순종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주저함이 없는 순종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너는 헌신할 수 있느냐? 네 기도해 보고. 그는 이미 순종이 아닙니다. 너는 내게 내려놓을 수 있느냐? 네 제가 결단하고 기도하고 내려놓겠습니다. 이미 순종이 아닙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 말씀할 때에 제가 집에 가서 장례하고 오겠습니다. 너는 자격 탈락 끝. 너는 나를 따르라. 고기 잡은 것 시장에 가서 팔아서 여비 좀 마련하고 따르겠습니다. 끝.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즉시 따랐던 제자들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영광스런 제물이 될 수 있고 그들만이 하나님의 참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던 것이지요.

기도하고 순종하겠다 하면 이미 무자격자입니다. 답은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골고다 언덕에도 오를 수 있고 모리아 산에도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결단하고 나면 자기를 부인하고 나면 죽고 나면 십자가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도 십자가가 아직도 무겁게 느껴지십니까? 신앙생활하고 헌신하고 교회생활하는데 시험타령이나 하고 힘겹게 느껴지십니까? 아직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해서. 죽지 못해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에 언제나 따라 붙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여러분 무거운 짐을 올려놓았을 때에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죽은 시체에 태산을 올려놓아도 무겁게 느껴지지가 않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면 자기를 죽이고 나면 하나님 앞에 바치고 나면 십자가는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지면 질수록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감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 바치고 시간 바치고 물질 바치고 온갖 것 바치고 기뻐 춤추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죽으면서 춤추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십자가가 영광이 됨을 알기 때문이지요.

아브라함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즉각적인 순종,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구원 그 이후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 갈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기로 결단했으면 그 다음부터는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바치라 얘기할 때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하지 않아서 바치는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냉혈동물이라서 바칠 수 있었던게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니까 하나도 무서운게 없는 게지요. 세상이 기독교 핍박을 포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최고의 인생의 절정은 순교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모리아산 언덕에는 이삭의 순교와 함께 아브라함의 순교가 어우러져서 영광스런 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은 순종하는 예수님의 순교의 죽음과 함께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는 아픔이 있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뜻이면, 아버지의 뜻이면, 아버지의 뜻이면 여기에 깨끗한 순종입니다. 갈등없습니다. 당당한 댓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당당히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목마르다" 부르짖는 예수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마음이 아파 고개를 돌리시는 것이지요. 자기 아들을 죽이면서 칼을 뽑아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찌했을까요?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예수 믿었는데도 아직까지 예수님이 찾아오지 않습니까? 오랜세월 기도하며 몸부림했는데도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주지 않습니까? 이 일 좀 해결해 달라고, 다음단계로 나아가고 싶다고, 성숙하고 싶다고, 예수 닮고 싶다고, 이 문제 좀 해결해 달라고, 나도 복 받고 싶다고 하나님 앞에 오랜세월 매달리고 매달려도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주지 않습니까? 구원 그 이후의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직도 깨끗하게 때묻지 않은 순결한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12절) 하나님이 이삭을 죽이는게 목적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 구원하는 백성들이 피흘리고 발가벗고 손해보고 찢어지고 고난과 고통과 환란가운데 뭉개지고 깨지는 것 - 그것 하나님이 기뻐하는 분이 아니지요. 죽어야 할 자리에서 네가 죽을 수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씨티스 도드라는 캠버리지 대학에 존경받고 사랑받는 한 지성인이 있었습니다. 런던 귀족 가문 출신입니다. 훌륭하고 행복하게 자랐습니다. 모자람이 없이 자랐습니다. 이 아이가 대학시절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정치계로 가면 대통령에 오를만한 사람이고, 사업을 하면 갑부가 될 수 있는 사람이고, 공부를 하면 총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내 부모들이 내게 걸었던 기대, 내가 어린세월 꿈꿔 왔던 나 자신의 인생에 여정의 걸음들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주님이 날 부르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그 호화스러운 저택을 떠나 아프리카로 갑니다. 그의 전기집 안 장에 그가 살던 호화스런 영국의 저택 한 채가 나옵니다. 그 밑에 보면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나무 몇 개에 천막 걸쳐놓고 그 밑에 둥지 틀어 살고 있는 거지 집 같은 움막집 한 채가 나옵니다. 영국의 저택을 버리고 움막에서 평생을 삽니다. 아프리카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생명을 바쳐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별 열매를 걷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죽어가면서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날 위해서 예수님 죽으셨고 날 구원하셨다고 하면 내가 걸어왔던 아프리카에 발자국 발자국 고난과 눈물과 배고픔과 두려움과 공포와 시달리는 온갖 고난들은 고난일 수 없다. 내 인생에 최고의 영광이요 감격일뿐이다." 그는 이름없이 죽어갔습니다. 그냥 죽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프리카에 라인하르트 본케를 통해서 씨디스가 죽은 그 자리에서 리빙스톤이 죽은 그 자리에서 의미없이 죽은 그 자리에서 한번에 수십만명이 물길처럼 하나님 앞에 돌아오고 있습니다. 에이즈가 창궐했던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치료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약과 창녀촌, 술주정뱅이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경제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꿈도 희망도 없던 아프리카 젊은이들이 우리는 뒤늦게 예수를 믿었으니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가 한다. 그들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얼마전 나이지리아에선 단 며칠간에 라인하르트 본케의 전도현장에 345만명이 몰려들었습니다. 지구촌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예수를 믿었습니다. 하루에 수십만명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아프리카 전역에 37%의 사람들이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씨티즈가 죽은 자리에 그의 피를 먹고 이런 영광스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다 받았다. 구원 그 이후의 신앙으로 네가 나아갔다. 통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13절) 여기 신비한 뜻이 있습니다. 그냥 양 한 마리가 메에~ 와서 하나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날 잡아 잡수시오 그러면 될텐데 한 숫양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사막의 가시덤불 수풀에 숫양이 걸려서 음메에~ 부르짖고 있습니다. 뿔에 걸린 자기 살을 찌르는 가시가 아파서 음메에 메에~ 울고 있는 한 마리 숫양 그는 예수입니다. 가시관 면류관 쓰시고 내가 목마르다 부르짖는 그 양입니다. 양 껍질 벗겨서 번제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옷이 벗겨졌습니다. 살이 찢겨졌습니다. 벗겨지는 그 양, 수풀에 걸려있는 그 양은 예수님이십니다. 번제를 다 마치고 죽이기로 결단했던 아들 이삭의 손을 붙들고 모리아산을 내려오며 아들과 아버지는 얼마나 감격스런 웃음을 웃었을까요? 얼마나 기쁜 큰 웃음을 통쾌한 웃음을 웃음을까요? 승리했도다. 다 이겼도다. 순종했도다.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도다. 아들 이삭아. 이게 이삭이었구나. 이게 웃음이었구나. 아들 이삭을 줄 때에 너 하나 바라보고 기뻐한게 이삭인줄 알았는데 이 승리의 통쾌한 웃음이 이삭이었구나.

사람들이 초조하게 도련님을 죽이고 내려오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춤을 추며 손을 잡고 웃으며 내려옵니다. "살아오셨군요 돌아오셨군요. 하나님이 살려주셨군요." 그 아들을 얼싸안고 아브라함을 얼싸안고 웃었던 사람들의 웃음 이게 이삭이었군요. 하나님의 비밀이 여기 있었군요. 네 사람이 춤추며 노래부르며 집에 들어섰을 때에 초췌한 얼굴로 밥을 먹지 못하고 사흘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일주일동안 금식하며 공포에 시달리던 그 어머니 사라. 여보 돌아왔군요. 이삭과 함께 왔군요. 살아온 이삭을 바라보며 그 어머니는 큰 웃음을 웃었을까요. 하나님이 이 웃음을 주시려고 이삭을 주셨는데 그 아들 바라보며 둥게둥게 웃는게 웃음이고 이삭인줄 알았더니 이런 멋진 웃음을 주시는군요. 이 이삭을 통하여 인류를 웃게 만들고 지옥에서 고통의 절망에 부르짖는 영혼들, 천국에서 웃게 만들려고 이삭을 주셨군요. 온 집안에 영광스런 웃음이 넘쳐났을까요. 이게 이삭인 것을. 최후에 웃는 자가 웃는 자니라. 하늘의 웃음 큰 웃음, 신앙 구원 그 이후의 신앙으로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류영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