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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단이 전한 거짓말 (창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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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이 전한 거짓말(창3:4-5)

  안경의 렌즈를 어떤 색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다르게 볼 수 있다. 이 세상을 어떤 렌즈로 보느냐가 ‘세계관’이다. 태국이나 다른 불교권 나라에 가서, 선교를 할 때 물질적으로 크게 도와줄 수 있다. 그때 현지인들은 감사표현을 잘 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당연하다는 태도를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나 힌두교에는 ‘업보’가 있다. 업보의 세계관은, “좋은 업을 쌓으면 내세에 좋은 곳에 태어나고, 나쁜 업을 쌓으면 나쁜 곳에서 태어나게 된다.” 이 업보의 관점으로 보면, 도움을 받은 사람은, 도와준 사람이 좋은 업을 쌓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 자다.

  그렇기에 감사할 생각이 없게 된다. 사람들마다 이런 생각의 틀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들여도 자기 방식대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진정한 변화는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의 틀로 바뀌어야 한다. 핵심은 바뀌지 않고, 겉모습만 바뀌게 되면 무늬만 신자가 된다.

  우리 안에는 성경적 세계관과 비성경적 세계관이 혼합되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비성경적 세계관이 점차 제거되고, 성경적인 세계관이 삶의 원리가 될 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러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성경적인 세계관과, 비성경적인 세계관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관이 서로 다르기에, 서로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세계관의 싸움은 영적 전쟁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이고 치열한 영역이다. 손자 병법에 “知彼知己 百戰不殆”(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다. 이 원리는 영적 전쟁에서도 여전히 적용된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는 도리가 무엇이며,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다(요8:44). 본문은 사단이 최초의 인류에게, 최초로 한 거짓말이다. 사단이 전한 거짓말은, 크게 4가지인데, 4가지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 세계관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쓰인다. 이것은 사단의 공식이다. 사단은 이 공식을 약간 응용해서 문제를 제출하기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한다. (1) 죽지 않는다(신비주의), (2) 눈이 밝아진다(합리주의, 과학주의), (3) 선악을 알게된다(도덕주의, 율법주의) (4) 하나님과 같이 된다(범신론적 합일주의)다.

1. “인간이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세계관들(신비주의)

죽음은 인간의 가장 큰 문제며, 동시에 가장 풀기 원하는 문제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세계관들이 나타났다.

  도교는 장생(長生), 불노(不老), 불사(不死)를 꿈꾸어 왔다. 죽지 않는 경지에 이른 신선(神仙)이 되어 하늘로 승천한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변하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금을 갈아서 먹었다. 금이 소화가 되지 않자, 체내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 금으로 합성되게 하는 금단이란 환약을 만들었다.

  금단은 수은과 유황의 화합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영원히 살려고 소원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 금단의 열매를 먹고, 수은중독에 걸려 죽었다. 진시황의 죽음도 수은중독이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모색했는데, 단전에 기를 축적하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단전호흡의 기원이다.

  단전에 기를 쌓는 방법은 ‘내단법’이라고 하고, 약을 먹는 방법은 ‘외단법’이라고 한다. 오늘날 단전호흡이 건강차원에서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단전호흡의 목적은, 단순한 건강 추구가 아니라, 영원히 살고자 하는 데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없이도, ‘수행’이라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영생을 추구하는 인본주의 술수다. 우리는 건강차원에서 할 수 있지만, 귀신은 건강차원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 단전호흡이 건강에 좋다는 주장은, 매우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이다.

  단전호흡을 하다 정신병이나 신체의 병에 걸린 사람도 있고, 귀신들린 사람도 있다. 단전호흡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도, 사기가 침범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단전호흡은 사단의 가르침에 근거한, 영생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묵상하고 실천하게 되면, 성령님께서 역사 하신다. 그렇지만 사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하면, 귀신이 활동하게 된다. 사단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교두보로 삼아 역사 한다. 우리 안에 교만이 있으면 교만의 영으로, 의심이 있으면 의심의 영으로 역사 한다.

  또한 인도의 탄트리즘(Tantrism)도 영생불사를 주장한다. 탄트리즘은 흔히 밀교라고 알려졌는데, 나중에 티벳불교와 라마불교로 발전한다. 금강신(金剛身)을 획득함으로써 신(神)의 몸을 가지게 되고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금강신을 얻기 위해 호흡법을 배우고, 금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학과 결부하여 인간의 육체가 노쇠하지 않도록 모든 신체기관을 “6백만 불의 사나이”나 “로보캅”같은 인물로 바꾼다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진리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이들은 어떻게 하면 영원히 사는지 몰랐다. 사람들이 왜 죽게 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락했기에 죽음이 왔다. 죽음의 원인이 죄 때문인 줄 모르고, 물질적으로 접근했기에, 영생하는 방법도 지극히 물질적이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다. 선악과 안에 죽는 성분이 있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다시 살기 위해서는, 잘못된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불순종했기에 죽었다면, 살기 위해서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2 “눈이 밝아진다”는 세계관들(이성주의, 합리주의, 과학주의)

히브리어 원문은 “눈이 밝아진다”는 말을 눈이 “열린다”(ח󰙍󰘱)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표현은 무지한 상태로부터, 어떤 자각이나 통찰력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

  17-18C에 서양에는, 이성의 합리성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계몽주의”라는 철학사상이 등장했다.  “계몽(啓蒙, Enlightenment)”이라는 용어의 어원은 “밝아짐, 빛”에 있다. 사단의 별명은 (고후11:14) “광명한 천사”이며, 루시퍼라는 이름도 그 어원이 빛과 연관되어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계몽주의는 이성이야말로, 인간을 무지로부터 밝히는 빛이라고 주장하였고, 진리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으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신학도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성에 맞게,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이 나타났다.

  초이성적인 사실들을, ‘신화’나 교훈을 위한 ‘예화’로 취급해 버렸다. 예를 들면 오병이어의 이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떻게 물고기 2마리와 떡 5개로 수천 명을 먹을 수 있는가? 그때 많은 사람들은 도시락을 싸왔는데, 모두들 나누어 먹기 싫어서, 도시락을 내놓지 않고, 감추어 두고 있었다.

  그런데 순수하고 욕심 없는 어린아이가, 먼저 자신이 싸온 도시락을 내놓으면서, 나누어 먹자고 했기에, 어른들이 감동을 받아, 너도나도 도시락을 내놓고 나누어 먹었다. 기적을 보여주는 내용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나눔과 경제적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자는 말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매우 합리적이지만, 사실에 맞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이 모든 사실을 다 설명할 수 있는가? 없다.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과학도, 모두 다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성을 통해서 모든 사물을 보겠다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원초적 교만, 원죄 때문이다.

  계시는 이성이 합리화해 놓은 경험의 틀을 넘어서기에, 이성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계시에 대하여 폐쇄적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까지 이성으로 따지고, 이성에 수용되지 않으면 신화나 예화로 돌려버린다.

  지금도 이성을 존중하는 정신이, 이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과대한 신뢰를 가져와, 수많은 이성주의와 과학주의들이 성행하고 있다.

  인간의 심리적 경험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때, 뇌의 어느 부위에 엔돌핀과 같은 어떤 생화학 물질이, 얼마만큼 분비되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과학숭배자들은 지금은 과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지만, 미래에는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사단은 사람들이 믿는바와 두려워하는 바를 철저히 이용한다. 정령숭배지역의 사람들은, 초자연적 영의 실제를 지나치게 믿는다. 이런 지역에서 사단은, 노골적으로 영적 존재로 나타나서, 두려움을 주고 위협함으로서,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로챈다.

  그러나 현대화되고 세속화되고, 과학을 지나치게 믿는 사람들에게 사단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과학, 이성, 합리성이란 말로,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사단의 목적은 자기 정체를 알리거나 알리지 않는데 있지 않고, 영광을 가로채는데 있다.

  사단은 ‘눈이 밝아진다’는 세계관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사단은 인간을 부추겨서, 이성을 최고의 위치로 올려놓게 하고, 이성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단은 동산 중앙의 나무 실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실과를 먹은 후, (창3:7) “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하였다. 선악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처럼 되지도 못했다.

3. “선악을 알게 된다”는 세계관들(도덕주의, 율법주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양심으로 인하여, 도덕적 선을 추구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여, 양심이 부패했기에,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한다. 부패한 양심은, 하나님의 절대 기준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양심을 절대 기준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자기 기준으로는 선과 악을 구분한다. 이것이 바로 교만과 자기 의의 출발점이다.

  자신이 생각할 때, 선한 동기이면, 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할 때, 선을 행했기에 천국 간다고 생각한다.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자신에 둔다. 그러나 성경은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된 것은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의 양심이, 구원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

  타락한 양심을 구원의 출발점으로 삼은 사람들은, “내가 무슨 죄인이냐? 도둑질을 했냐? 강도질을 했냐? 나만큼 양심적으로 살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나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라고 말한다.

  그러나 양심이 무뎌지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다. 흉악한 죄를 짓고도 전혀 양심에 거리낌없는 파렴치한 사람을 때때로 본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기 죄를 깨달을 수 없다. 나아가 자신의 의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한다.

  선악에 대해서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만 있다. (창3:22)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했으니, 사단이 약속이 맞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인간이 정말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비웃으시는 말이다.

  저들이 마치 우리와 같이, 결과적으로, 절대 기준에서 선악을 아는 전능자인 양, 착각하는 존재가 되었으니, 이제는 못할 짓이 없겠구나, 자신의 동기와 기준에 비추어서,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 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교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도덕주의이고, 율법주의다.

  이슬람교, 유대교, 유교는 ‘선악을 알게 된다’는 도덕주의, 율법주의 세계관에 속한다. 유대교처럼 유교는 예(禮)라는 율법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예법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예법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예법을 잘 지켜서, 인격을 수양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듦이, 인생의 최고 목표다. 이슬람교는 착한 행위를 많이 하면 천당에 가고, 나쁜 행위를 많이 하면 지옥에 가는데, 알라 신은 겨자씨만한 차이도 구분해내는 미세한 천칭 저울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평생의 행위를 결산해보니, +1이 되어서 천당가고, 다른 이는 -1이라서 지옥에 간다면, 합리적인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처럼 행위구원론은 결과적으로 매우 우스꽝스러운 논리다.

4.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세계관들(범신론적 합일주의)

사단이 가장 잘 이용하는 전략이다. 사단도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기에, 인간도 동일한 방법으로 타락시키려고 한다. 에스겔 28장은, 사단의 타락사건을 잘 묘사해 준다.

  그러한 사상의 중심에는 교만이 있다.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논리다. 범신론은 교만으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자존심을 만족시켜주기에,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세계관들은 거의 예외 없이, 범신론적 신비주의 형태로 나타난다.

  힌두교, 요가, 탄트라, 불교, 성리학, 기(氣)사상 등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세계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범신론적 신비주의 세계관은, 수 천년간 면면히 내려왔다.  범신론적 신비주의는 자연을 곧 신으로 간주하며, 인간은 우주와 하나라고 생각한다.

  불교는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기에, 누구든지 깨닫기만 하면, 부처가 되고, 우주의 궁극자가 된다고 한다. 이는 인간이 곧 신이 된다는 말이다. 뉴에이지는 핵심 내용은 2가지다. 만물은 하나다. 인간은 신이다. 이 2가지는 분리될 수 없다. 모두 똑같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양하고 개성적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부정한다. 여기에 사단의 음모가 나타난다.

  범신론적 신비주의는 합일주의를 말하는데, 혼동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도 ‘하나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하셨다(요17:21). 성경이 말하는 하나됨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함으로 이루지는 합일이 아니라, 연합이다.

  사단은 고상한 철학과 그럴듯한 세계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사역을 부정한다.

사단은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흉내낼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다양성을 부정함으로,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보자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상들 뒤에는, 사단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 거짓말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도록 유혹하며 의심하게 한다. 사단의 최대의 공격은, 설교를 듣지 못하게 한다. 설교를 듣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목사를 미워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을 싫어하게 만들면, 아무리 좋은 설교도 들리지 않는다. 사단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우리를 유혹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든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실망하게 되고,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잃어버린다.

  사단 마귀를 이기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다. 말씀을 듣고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 주위를 맴돌던 마귀는 떠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잘 듣고, 예배를 성공시키기 바란다.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이단과, 이론을 받아들이지 말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변함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을 권위를 높이라. 마귀와 접촉하게 되면, 죄짓고, 죄로 인하여 사망이 오고, 심판이 온다. 초장에 물리쳐라.

  마귀의 말을 들으면, 항상 그럴 듯하다. 그렇기에 거짓말에 속지 말라. 뱀이 와서 말하기 전까지는 선악과를 보아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뱀이 속삭인 순간부터, 선악과가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6).

  뱀에게 그 말을 듣지 않았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듣고 난 후 헷갈렸다. 그러므로 말씀에 굳게 서야만 된다.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승리하셨다. 따라서 어떤 경우라도, 말씀을 꼭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십자가로 우리 죄를 해결하셨다.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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