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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늘을 벗기니 다시 보인다 (행 9: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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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늘을 벗기니 다시 보인다 (행 9:15-19)

얼마전에 미국을 다녀 왔더니 편지가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하나하나 읽다가 이런 편지를 보았습니다.
<목사님. 존경합니다. 너는 강원도 산골에서 목회하는 목사입니다. 교인 10명 그것도 할머니뿐입니다. 재정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약한 교회입니다. 큰 교회 보조로 근근히 살고 있지요. 그런데 목사님의 성막 쎄미나에 참석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등록할 돈이 없습니다.
목사님! 저를 무료로 공부시켜 주시면 언젠가는 꼭 갚겠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저를 무료로 오라고 하여도 차비가 없습니다. 교통비 좀 보내주세요. 죄송해요.>
나는 이 편지를 처음 읽고 쓰레기 통으로 던지며 말했습니다.
<더럽게 얌체다.>
그리고 밖에 나가 일하다가 사무실로 돌아 왔습니다. 그 편지가 쓰레기 통위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읽었습니다. 다시 보고 났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공부하고 싶으면 그럴가?>
다시 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 갑니다. 다시 보면 달라집니다. 다시 보면 안 보이던 것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인물은 누구일가요? 모세입니다. 기독교 최고의 인물은 누구일가요? 바울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바울 이야기입니다.
바울의 예수 믿기 전에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의 뜻은 <가장 큰 자>입니다. 바울의 뜻은 <가장 작은 자>입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가장 큰 자가 가장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스스로 가장 큰 자라고 여길 때에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작은 자라라고 고백할 때 그를 가장 큰 자로 여겨주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를 거절하고 예수믿는 이들을 죽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도상에서 강력한 빛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습니다. 얼마나 강력한 빛이었는 지 눈이 멀었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하늘에서 예수님이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려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사울은 땅에 엎어진 채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 9;6)

그리고 사울은 다른 사람의 손을 붙들고 더듬더듬 다메섹으로 가서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서 안수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때 일어난 신기한 장면이 있습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행 9;18-19)

그러면 사울이 예수를 핍박한 이유가 무엇이었을 가요? 그 해답을 정확하게 주는 성경이 있습니다. 기독교 첫 순교자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이유가 세 가지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행 6;14)

본문에서 세 단어에 관심을 집중시키십시오.
1. 성전
2. 규례
3. 나사렛 예수

이 세 가지가 유대인과 크리스챤이 맞지 않아서 죽이고 핍박한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에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결론이 우리의 주목을 집중시키게 합니다.

<비늘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지라.>


사울이 다시 비늘이 벗겨지면서 다시 보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는 의미는 무엇일가요? 눈에 어떻게 고기 비늘같은 것이 생길 수 있을 가요? 사도행전을 기록한 저자는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의사적으로 유심히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 강력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이 쓰러질 정도의 빛이었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에게 백내장같은 생긴 것으로 많은 이들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정확한 것을 말해주지 못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비늘이 영적 비늘이 벗겨져 이 세가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 성전
2. 규례
3. 나사렛 예수

1. 성전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성전이 다시 보였습니다. 그 때까지는 건물이 성전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그런 것처럼 성전이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나 비늘이 벗겨진 후에는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냐>(고전 3;16)

다시 보니 달라졌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전을 우상처럼 받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집 성전은 단지 건물일 뿐인 데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성전을 바벨론으로 하여금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은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솔로몬은 성전을 지으면서 그 성전에 하나님이 안 계실 것을 믿었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솔로몬이 그 성전을 무너질 것을 믿으면서 지었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성경이고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역사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솔로몬은 성전을 지으면서 너무나 많은 금을 사용하면서 불안하였습니다. 미드라쉬를 보니까 솔로몬은 능력이 있어서 아버지 다윗이 모아 놓은 금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자기가 금을 준비하여 지었습니다. 지구 상에서 가장 전쟁이 많은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언젠가는 적군들에 의하여 성전이 무너질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땅위에 성전을 지으면서 땅밑으로 굴을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적에게 성전을 점령 당하면 귀한 금 성물들을 감추려는 의도였습니다. 그 동굴이 1984년 발견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으면서도 그 성전이 무너질 것을 믿고 짓는 모습이 성경에 발견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 하겠거늘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 오리이까>(왕상 8;27)

예레미야도 성전을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다녀 오시다가 수가성 우물 가에서 여인을 만나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할 때였습니다. 그 여인이 물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라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이 산에서 예배하였는 데 당신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이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요 4;23-24)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거룩은 땅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배도 장소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에서가 죽이려고 하자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떠나게 됩니다. 브엘쉐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다가 벧엘에서 하늘을 이불삼아, 땅을 요삼아, 돌을 베게 삼아 잠에 들었습니다.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이 서계셨습니다. 야곱이 말했습니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그리고 그 곳 이름을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도 처음에는 그 땅 <이 곳>이 하나님의 집, 성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20년 만에 다시 돌아 왔습니다. 형 에서가 그를 다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야곱은 그 곳에소 하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곳 이름을 엘벧엘이라 불렀습니다.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한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라.>(창 35;7)

구약시대에는 지성소만 지성소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휘장이 찢어진 후로 내가 가는 곳이 성전입니다. 바울은 비늘이 벗겨지면서 장소 성전이 마음 성전으로 바뀌어 다시 보였습니다.

2. 규례가 보였습니다.
사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자 모세의 규례 즉 율법이 다시 보였습니다. 바울은 오직 율법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율법 파괴자로 알았기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예수믿는 이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행 6;14)

예수님이 모세의 규례를 고치려고 하니까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보니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를 가장 흥분시키는 바울의 책은 역시 로마서입니다. 그래서 어떤 저자는 이런 책을 썼습니다.

<로마서가 나를 흥분시킨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로 종교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로마서 서문에서 감리교를 창설하였습니다. 로마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 10;4)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0-13)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율법과 복음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오직 믿음의 신앙이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믿음>

그런데 그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이 있습니다. 친구 목사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83세 인데 예수가 안 믿어진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사시다가 병원 중환자실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친구 목사는 아버지를 빨리 구원시키고 싶었습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야지 아버지를 지옥을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숨을 거두시는 아버지 옆에서 안타깝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버지. 빨리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영접하세요. 빨리요. 그래야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빨리요. 빨리요...> 아들 목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깝게 외쳐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면서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안 믿어져.>
믿어진다는 것은 큰 축복중에 축복입니다.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안 보이던 믿음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죽일 때 바울이 본 예수는 율법 파괴자요, 성전 파괴자요, 유대교 배신자였습니다. 그러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나서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는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바울은 비늘이 눈에서 벗어진 것을 얼굴에서 수건이 벗어진 것으로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 하게 하려고 수건을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 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3-17)

비늘벗고 예수님을 보니까 구세주였습니다.
수건 벗고 구약을 보니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의 역사 2천년>이라는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미국 예일대학 교수 자루스라브 페리칸 박사님께서 저술하신 책입니다. 이 책은 <오직 예수>의 책입니다. 예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하였습니다. 역사적인 해석, 영적인 해석, 문화사적 해석등 <오직 예수>입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예수님 이후의 2천년 역사는 결국은 <오직 예수>를 통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예수를 어떻게 받아 드리느냐에 따라서 축복이냐 저주냐? 구원이냐 멸망이냐? 지옥이냐 천국이냐로 갈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 모든 사람의 운명은 결국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드리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원한 책입니다.

어느 사형수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전도하여도 받아드리지 않던 그가 사형 집행을 며칠 앞두고 목사님을 만나게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예수 이야기하면 이도 안 들어 가던 강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형을 앞두고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왜 예수를 믿고 싶은 마음이 들었나요?>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어려서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정말 인간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임을 알았습니다. 죽음을 앞두고는 모든 것이 필요없었습니다. 죽음 앞에는 돈도 명예도 재산도 사람도 다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는 파괴자로 알았었는 데 비늘이 눈에서 벗겨지면서 <오직 예수>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1. 성전이 장소 성전에서 마음 성전으로 다시 보였습니다.
2. 율법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는 데 복음으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보였습니다.
3. 나사렛 예수는 율법의 파괴자, 성전의 파괴자인 줄 알았는 데 그는 구원자라는 사실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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