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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의 친밀함 (시 73: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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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친밀함 (시 73:27-28)

1. 친밀(intimacy)

영국의 한 출판사에서 상금을 내걸고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공모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 천 건이 접수되었는데요. 그 중에서 선택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쁨은 곱해 주고 고통은 나눠 갖는 사람
나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언제든지 만나도 싫지 않은 사람
나에게 진심으로 충고해 주는 사람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1등은 따로 있었습니다. 1등으로 선택된 친구의 정의는 “친구란 온 세상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아주 특별한 친구, 정말 가까운 사이의 사람이 있으시지요? 친구가 없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의 경우, 그의 면역 체계에는 부정적인 것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미국의 어느 병원은 친구가 없거나 혼자 살아감으로서 면역 활동이 현저하게 떨어져 암 등의 병이 더 빨리 진전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스탠포드 대학 의료센터의 데이비드 쉬피겔 박사는 암 치료의 방법으로 인간관계의 결속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인간관계야말로 암 치료와 회복을 가장 빠르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지 이런 병이나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도 좋은 친구가 있으면 외롭지 않고, 큰 힘이 되며, 때로는 이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이런 친구 사이, 혹은 가장 막역하고 친한 것을 뜻하는 “친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친밀”, 혹은 “친밀감”이라는 단어를 정말 좋아합니다. “친밀”이라는 말은 관계적인, 즉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 끼리에서 있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친밀하다’는 것은 ‘어떤 사람과 더불어 지내는 사이가 매우 친하고 가까움’을 뜻합니다. 영어로는 “intimacy”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아주 절친한 사이’, 나아가 ‘육체관계를 맺는 사이’를 뜻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친밀함”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관계는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배우자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 모든 것을 터놓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이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친밀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은 친구, 그 이상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이 “친밀함”이라는 말이 가장 잘 아울리는 또 다른 한 관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과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2. 하나님과 친밀함

오늘 본문인 시편 73편에는 "아삽의 시"란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아삽이라는 이 시인은 최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는 악인들이 더 잘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것 때문에 무지하게 갈등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발걸음은 미끄러질 뻔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다가 그가 그 위기를 잘 극복했는데요. 그가 신앙의 위기를 극복한 것은 성전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17절). 즉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하나의 진리를 발견했는데, 그것 때문에 신앙적인 갈등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기도하는 가운데 발견한 진리는 무엇일까요? 우선 시인은 악인들이 서 있는 곳은 매우 미끄러지기 쉬운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18절). 악인들이 서 있는 곳은 시인이 볼 때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없는 아득히 높은 곳이요, 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이며, 그만큼 좋은 곳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영적인 눈으로 보니까, 그곳은 죄의 유혹을 받아 넘어지기 쉬운 곳이요, 스스로의 욕심 때문에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는 곳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높은 자리, 형통한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세상과 인간적인 욕망을 따라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과 주의 진리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깨달은 시인은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낮은 곳, 좀 못한 자리, 가난한 자리, 때로는 부족하고,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실패하는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자리에 있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볼 수 있었고, 또 세상의 욕심을 따르는 자들과 가까이 하지 않고 주님의 백성들과 가까이 할 수 있었습니다. 즉 세상의 가치로,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아, 못한 것 같고, 실패한 것 같아도, 그것 때문에 성도들과 친하게 지내고,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었으니 도리어 감사하다는 것이죠. 세상과 가까운 것보다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을 그가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어떠할지보다 그 자리가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라면 바로 그것이 복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가까이 해 보아야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것이 세상에서의 성공과는 다르다, 혹은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악인의 마지막인 “파멸(18절)”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까이 대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축복은 물질이나, 건강이나, 지위나 명예, 또는 인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가까이 함”이라는 말이 “친밀함”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다는 말은 곧 하나님과 친밀해 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가까이 하다”라는 말은 ‘공간적으로 거의 틈이 없이 가까운 관계’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둘이 딱 붙어서 빈틈이 없는 사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조금 전에 이 ‘친밀함’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부부 사이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 여러분들이 주목할 것은 친구보다 더 가까운 부부 사이, 그리고 그 부부 사이보다 더 가깝고 구체적인 관계가 바로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우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고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할 때에 우물쭈물하거나, 남 이야기 하듯 하거나, 아니면 굉장히 추상적이고 모호한 이야기를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가깝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남편이나 아내, 혹은 가장 절친한 친구에 대해서 아주 기분 좋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듯, 하나님과 가깝다면, 하나님과 친밀하다면, 그 사람도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는 하나님과 친밀해 지려고 노력 중입니다. 특히 성령 하나님과 친밀해 지려고 노력 중인데요. 새벽에 기도 자리에 앉을 때면, “성령님, 제 마음을 살펴 주세요. 혹시 제게 거룩한 당신을 거스리고 저와 당신의 관계를 가로 막은 죄나 잘못이 있다면 깨닫게 해 주세요. 오늘 설교 할 때에 저를 도와주세요. 당신의 영감으로 기록된 당신의 말씀을 당신의 도움으로 설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로 하여금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보고 바로 알게 해 주시고, 이러이러한 제 목회의 현안들, 가정이나 개인적인 문제들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알려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가까이, 나와 함께 계신 성령님과 친하게 대화하듯 기도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이렇지를 못했습니다. 굉장히 추상적이고 의미적으로, 그리고 지식적으로 주님을 찾고 불렀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 곁에 가까이 계신 주님을 향한 친밀한 표현은 분명 아니었던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가까워집시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집시다. 이것이 이 세상이나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이고, 복된 일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복이 온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하면서, 가까이 함 그 자체도 복이지만, 가까이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복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복(토브)”이라는 말은 형용사로는 '좋은, 선한, 즐거운, 유쾌한'의 뜻이고, 명사로는 '좋은 것, 선, 이익, 번영, 복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주로 사용된 의미는 ‘실제적인’ 혹은 ‘경제적인 이익’을 언급하는 것이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즉 본문이 말하는 복은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이고 경제적인 복이라는 것이죠.

1) 그렇다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감으로서 얻을 수 있는 복, 하나님과 친밀해질 때에 얻을 수 있는 복은 어떤 것일까요?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라 죄송합니다만, 중심을 파악하면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군 시절에 초급 장교가 누릴 수 있는 그 이상의 혜택을 누렸습니다. 전방 부대에 있으면서도 공항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동해안을 끝에서 끝까지 다니면서 항공관측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주일에는 대대 교회, 사단 교회, 그리고 군단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 덕분에 군단장과도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육군해군공군 합동 작전을 위하여 진해 작전사령부에 파견된 적도 있습니다. 팀스피릿 한미 합동군사훈련에 통역장교로 참가하여 영어 한 마디 하지 않고 군단 사령부에서 지낸 적도 있습니다. 1군사령부 정신전력 관련 논문대회에 논문을 내어서 군단장 상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파견을 나갔다가 자대에 돌아오면 마치 해안 별장과도 같은 동해안 최북단의 해안초소에서 무더운 여름을 보내면서 해안경비를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남다른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집안 배경 때문일까요? 제 뒤에 힘께나 쓰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돈 많은 친척이 돈을 좀 썼을까요? 시편 73편 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나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능력의 손, 이적을 일으키시는 손, 홍해를 가르신 손, 태양을 머물게 하신 손, 무슨 병이든 낫게 하신 손, 바다를 잔잔케 하신 손, 하늘 문을 열어서 복을 주시는 손으로 붙들어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군대 생활이 참으로 화려했던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저를 붙드셨기 때문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사 여러분의 삶에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많도록 하실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감으로서 얻을 수 있는 복, 하나님과 친밀해질 때에 얻을 수 있는 복은 어떤 것일까요?

요즘 거의 대부분의 차에 니, 이니 하는 것이 다 있습니다. “전방 100m에서 비스듬 우회전 하십시오.”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전방 200m에서 유턴 하세요.” “좌회전 하시면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이것이 조용히 운전을 하고픈 분들에게는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완전 기계 ‘노홍철’이거든요.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길이나, 속도측정기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경우, 그리고 외롭게 운전하는 것이 싫어 말동무가 필요한 분들에게는 얼마나 요긴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비유가 우리 주님께는 조금 어울리지 않습니다만,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의 인생길에 바로 이와 같은 최첨단 위성 네비게이션이 있습니다. 어느 누군가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적도 없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인공위성보다 여러분의 모든 것을 고도의 인공위성보다 더 잘 아시고 보시고서 여러분을 인도하시니, 이와 같은 위성 네비게이션이 어디 있겠습니까? 크고 작은 일에서 실제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정말 많습니다. 여러분들도 그와 같이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셔서 늘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세 번째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감으로서 얻을 수 있는 복, 하나님과 친밀해질 때에 얻을 수 있는 복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주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폭풍우(사4:6,25:4, 욥24:8)나 높은 산들에 있는 위험(시 104:18)으로부터 피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 생각지 못했던 일이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원수들이나 어떤 일들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 되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제리스 브라간’이라는 사람이 미국 테네시 주 교도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교도소 내에서 몸집이 작고 약한 사람들이 지내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교도소 안에서는 덩치가 큰 죄수들이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브라간은 체구가 작고 젊은 죄수 하나가 교도소 마당을 겁 없이 거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젊은이에게 시비를 걸거나 그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죄수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왜 아무도 저 친구를 괴롭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저 젊은이의 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젊은이의 아버지는 테네시 주 동부에서 온 거대한 몸집의 터프가이였습니다. 그는 그쪽 세계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보스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요. 그런 그가 작고 유약한 자기 아들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교도소에 들어와서 아들과 함께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죄수들에게 ‘누구든지 자기 아들을 괴롭히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 후 삼 년이 흘러, 그는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아들만 감옥에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아들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언제라도 다시 감옥에 돌아와 보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고서도 참 비유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아들을 위해 교도소에 들어온 헌신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충분히 하나님을 연상하게 해 줍니다. 성도를 위협하는 거인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 사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호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 하나님과 친밀한 성도의 복이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또한 아주 구체적이고 다양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우셔서 이러한 모든 것을 다 받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라!

오늘 본문을 지은 시인은 한때 크게 실족하여 인생과 신앙의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 더 잘 되고 더 잘 사는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어렵고 힘들게 사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과 친밀하기보다 세상과 친하고 어울리는 것은 결국 파멸로 가는 길이라는 것, 그리고 세상과 친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하나님과 친하고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비교할 수 없는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분에서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 하는 사람, 여러분이 가장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은 아주 특별한 한 단어를 우리에게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친밀함”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 말은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부부 사이에서만 가능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이와 같은 “친밀한” 관계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친구보다, 배우자보다,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하나님과 친밀해 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고, 그것이 복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과분하고 특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만이 아니라 또 다른 복들까지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 하나님과 친밀한 것은 정말 복 중의 복입니다. 그것을 다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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