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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거인들 (행 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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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대한민국만큼 복된 나라도 없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가 이처럼 사시사철이 있으며 또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만큼 고난을 많이 당한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5천년의 역사 가운데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내내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하며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의한 강제 점령과 그 후에 남북이 서로 갈라져 6.25 전쟁을 겪으며 숱한 어려움을 겪어 왔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마지막 때에 주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아니 이렇듯 어려움만 당하던 나라였기에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한국의 봉사단원들과 선교사들이 침략을 위한 앞잡이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져서 그들 가운데서 큰 반발 없이 맡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에 정말 감사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아랍 국가라든가 회교권 국가에서는 복음을 전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여전히 있기에 우리는 더욱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모든 어려움들 가운데서도 오히려 좋은 사람들을 준비하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나가신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깊은 좌절 속에 고린도로 왔던 바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평생의 동역자요 중보자가 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이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바울로 하여금 고린도에서 만나 평생을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협력하도록 준비해 주셨던 좋은 믿음의 동역자들입니다. 그들을 통해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그 역사하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유스도를 생각해 봅니다.

고린도에 온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담대히 말씀에 붙잡혀서 복음을 전하게 될 때 유대인들의 반발이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대들며 욕을 해대자 바울은 회당에서 나와 회당 바로 옆에 있는 디디오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으로 옮겨서 그곳에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게 되고 그에 따라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온 집안 식구가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고린도에 사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에 일 년 반 동안 머물면서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그리고 회당장 그리스보가 큰 힘이 되어 준 것이 사실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임의 장소가 된 집 주인인 디디오 유스도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디디오 유스도라는 사람을 사도행전 1장의 마가의 다락방에서 보았더랬습니다. 120여 성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며 기도에 힘쓸 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자살한 가룟 유다 대신 다른 사람을 세워 사도의 자리를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들 가운데서 일어나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성령께서 다윗을 통해 유다에 관해 말씀하신 것 중에, 유다가 예수님을 잡아간 사람들의 앞잡이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다는 우리와 행동을 같이했던 사람이며, 우리처럼 사도직을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한 대가로 받은 돈으로 밭을 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밭에서 거꾸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창자가 밖으로 나온 채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소문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밭을 자기들 말로 아겔다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겔다마란 피의 밭이란 뜻입니다.

시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집을 폐허로 만드시고 아무도 그 곳에 살지 못하게 하소서!’ 또, 시편 다른 곳에는 ‘다른 사람이 그의 직책을 차지하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시던 동안, 우리와 같이 다녔던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야 하겠습니다. 뽑힐 사람은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실 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우리와 함께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유스도라고 알려져 있고 바사바라고도 불리는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그 때, 사도들은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두 사람 중 누구를 선택하셨습니까? 자기 직분을 떠나 자기가 원래 속했던 곳으로 간 유다를 대신해서 이 사도의 직분을 맡을 사람이 누구인지를 저희에게 보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제비를 뽑아 보니 맛디아가 뽑혔습니다. 이때부터 맛디아는 다른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습니다. 한데 이때 추천되기는 했지만 제비를 뽑았을 때 사도로 뽑히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유스도입니다. 그는 나중에 일곱 안수 집사 가운데도 들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유다 대신에 새로운 제자를 뽑기 위해서 추천되었던 사람이 일곱 안수 집사를 세울 때 세움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제비를 뽑을 때 제자로 뽑히지 못한 것 때문에 낙심해서 믿음을 떠난 것이 아닌가요? 그랬기에 일곱 안수 집사 가운데도 그 이름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요? 하지만 우리는 이 비밀을 사도행전 18장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오순절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고 난 다음 예루살렘을 떠나 고린도로 옮겨왔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곳 고린도에 성공적으로 정착을 하였고 그랬기에 회당 바로 옆에 그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저를 괴롭히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열두 제자 중 하나로 뽑힌 맛디아는 그러나 그 이후 성경에 단 한 번도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유스도는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나 그 집을 복음을 위한 전진 기지요 교회로 사용되도록 도운 사람으로 기록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골로새서 4장 11절에는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용의 꼬리가 되기보다는 닭의 머리가 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남을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대로 비록 이인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일인자다운 삶을 살았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이 유스도라는 사람입니다. 유스도는 회당 바로 옆에 그 집이 있어 어찌 보면 위험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집을 바울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장소로 내어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나중 바울과 함께 체포되고 감옥에서 함께 고생했던 참다운 영적 리더였습니다. 이처럼 유스도는 사도로 선택되지는 않았지만 어떤 사도들보다 더 사도다운 삶을 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찌 보면 남들처럼 화려한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같이 수고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관심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둘이 함께 경쟁하다가 한 사람을 뽑히고 한 사람은 떨어졌다고 하면 그것도 제비를 뽑아서 한 사람이 뽑히고 다른 한 사람은 뽑히지 않았다고 한다면 뽑힌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하겠지만 뽑히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음에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나를 더 큰 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나로 잠시 더 낮은 자리에 있게 하시니 그 은혜 감사합니다”하고 엎드린다면 이보다 좋을 수가 없겠지만 자기가 뽑히지 않은 것이 하나님께 외면당한 것으로 여겨서 큰 좌절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조금도 낙심치 않고 오히려 앞서 뽑힌 자보다 더 겸손하게 엎드려 더욱 기쁨과 감사한 마음으로 섬기며 묵묵히 복음을 위해 협력하며 어려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 사람이 진정 하늘나라에서도 큰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큰 자로 하나님 앞에 든든하게 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소스데네를 생각합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지방의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되어 부임을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장관이 바뀐 것입니다.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그걸 기회로 유대인들이 합심하여 바울에게 몰려가 그를 재판정으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갈리오에게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갈리오는 한 마디로 유대인들의 고소를 기각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고소한 사람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들어다가 재판정 앞에서 마구 때립니다. 아니 분명 유대인들은 바울을 고소했었습니다. 그런데 고소가 기각되었다고 해서 자기들의 회당장인 소스데네를 붙들어다가 마구 때렸다니 이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갈리오 총독에게 고소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사람이 우리의 법을 어겨가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보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정치적인 범죄의 조목을 들지 않고 로마법으로 인정되지 않는 종교를 전하는 불법행위에 대해서 고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발 내용도 어찌 보면 문제가 좀 있습니다. 사실 유대교는 로마에서도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를 섬기라고 유혹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면 좀 이해가 될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라고 유혹하고 있다는 이 고발장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자기 논리의 모순에 이들은 빠지고 말았던 것이요 따라서 갈리오 총독이 한 마디로 자기들의 고소를 기각하자 결국 이것은 고발장을 잘못 작성한 회당장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여 자기들의 대표인 회당장 소스테네를 붙들어다가 마구 때렸던 것입니다. 사실 소스데네는 그리스보가 예수를 믿게 됨에 따라 그 뒤를 이어서 회당장이 된 사람입니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회당을 이끌어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들의 회당장을 마구 때린다니 이것은 유대인의 법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서슴지 않고 자기들의 지도자인 회당장을 붙들어다가 마구 때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들이 얼마나 비뚤어진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소스데네는 유대인들의 강권에 할 수 없이 바울을 고발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 반대로 자기가 앞장서서 정권이 바뀐 틈을 타서 바울을 혼내주자고 자기가 앞장섰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자기들의 고발 사건이 기각이 되자 누군가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였던 것이요 그래서 회당장에게 책임을 물어 마구 때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회당장이었던 소스데네가 그런 유대인들의 모습에 이건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가 이윽고는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장 1절로 2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총독이 바뀐 틈을 타서 바울을 고소하였다가 실패하자 자기들의 대표인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서 마구 때렸던 것이 소스데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만들고 더 나아가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로 변화되게 만든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스데네로서는 자기가 회당장으로 섬기던 고린도의 유대인들로부터 얻어맞고 나서 이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예수를 알게 되고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으니 얻어맞은 것이 그에게는 큰 복이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소스데네를 변화시켜 귀한 일꾼 삼으신 하나님을 우리는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오늘 우리들 가운데도 나타나 우리들 모두를 귀한 일꾼으로 세우시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대인들이 갈리오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했을 때 바울은 입을 열어 자신을 변호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고소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당연한 권리입니다. 당시 로마법은 재판관 앞에 원고와 피고를 마주 서도록 하여 원고가 고소를 하면 피고는 자신을 변호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리오 총독은 바울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에 그것을 못하도록 막고는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고소하는 것이 어떤 범죄나 나쁜 행동에 관한 것이라면 내가 들어 주겠소. 그러나 여러분이 지금 말하는 것은 언어와 명칭과 여러분들의 율법에 관한 것들이오. 그러니 이런 문제는 여러분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시오. 나는 이런 사건에 재판관이 되기는 싫소.”
이 말을 하고는 갈리오는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냈을 뿐 아니라 재판정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들어다가 재판정 앞에서 마구 때릴 때도 이 일에 조금도 참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갈리오의 판결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만일 갈리오가 유대인들의 고소를 받아들여 복음을 전하던 바울에 대하여 유죄를 선고하였다면 각 지역의 행정관들도 갈리오의 판례대로 바울을 정죄하였을 것이고 결국 바울은 선교에 큰 어려움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리오가 유대인의 고소를 물리침으로써 이루 이와 비슷한 사건에 대한 판결의 전례가 되어 결과적으로 바울의 선교 행위를 쉽게 해주는 결과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하나님을 섬기라고 유혹하고 있다고 고발을 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그 일을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며 하나님께 해가 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교회를 어지럽게 한다거나 교회를 깨뜨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교회를 깨뜨리는 일을 하고 있으니 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모든 것을 사랑의법으로 하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과연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일이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를 헤치는 일이 과연 하나님의 질서와 사랑의 법을 지키는 것이라 할 수가 있겠느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총독이 바뀐 틈을 타서 바울을 고발하였던 유대인들의 행위가 결국 바울의 선교를 돕는 결과를 가져오지를 않았습니까? 또한 회당장이었던 소스데네로 하여금 오히려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로 바뀌도록 만들지를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당장으로 보면 일 년 반 동안이나 평화롭게 말씀을 가르치던 바울이 고발당하는 사건이 정말 감당하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결과 오히려 더 복음의 걸림돌들을 빼버리게 되는 결과가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바울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어려움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그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어려운 일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 그 뜻을 밝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고난을 통해 우리들로 하여금 좋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고자 하신다는 것이요 어려움들이 있기에 장차 오히려 더욱 쉽고 편하게 하나님의 맡겨주신 일들을 이루어 나갈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오히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들이요 이로 인해서 오히려 더 은혜롭고 복된 날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유스도와 소소데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겪었던 아픔이 진정 주 안에서 큰 거인이 되는 디딤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바울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바울을 지켜주셨습니다. 오히려 좋은 일꾼들과 만나서 함께 주의 일에 힘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좋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도 그렇게 우리가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의 날들이 우리로 하여금 오히려 믿음 안에서 좋은 일꾼이 되도록 하는 양약이 되는 것이요 더 큰 복을 누리게 만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고난 가운데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좋은 일꾼들이 되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큰 상급과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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