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절망의 은혜 (고후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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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사회의 모습이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우선 자살율의 급격하게 증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에서 자살율이 2위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지난 2005년 한국인이 사망하는 원인 중 자살이 4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0년 전의 9위에서 5계단 뛰어올랐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어서 국제적으로도 ‘자살대국(大國)’이라는 오명을 들을 처지입니다. 통계청이 내놓은 ‘2006년 한국의 사회지표’를 통해 “지난 2005년 인구 10만명당 자살로 사망하는 사람 수는 26.1명으로, 사망 원인 중 4위를 차지했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은 1995년 인구 10만명당 11.8명이 자살로 사망해 9위를 기록한 것에 비해 10년 사이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국가별 연령구조 차이를 감안해 OECD 기준으로 산정한 자살률도 2005년 인구 10만명당 24.7명으로 회원국 중에서 1위였다고 통계청은 밝혔습니다. 특히 자살은 20대와 30대의 사망 원인 1위, 10대와 40대의 사망 원인 2위를 기록해 우려를 낳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 우울증환자의 증거입니다. 요즘 특히 젊은층 가운데에 우울증 환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외이민의 증가입니다. 작년에 인터넷상품가운데 대박상품이 바로 해외이민상품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자살하고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해외이민을 생각할까요? 특히 젊은 사람들이 왜 이런 모습이 많아지는 것입니까? 삶에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낙심과 절망에 처해 질때가 많습니다.
거기에는 성도나 목회자나 예외가 없습니다.설교의 대가로 꼽히던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설교가로 인정받았던 스펄젼이라는 목사님은 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지독한 영적 침륜상태로 인해 많은 고통과 두려움을 겪고 있기에, 여러분들 중에는 제가 처한 그러한 극도의 처절함을 겪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를 소원합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낙심과 절망은 차별하여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일에 성공한 사람에게 더 많이 더 크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깊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영적인 거장 바울은 자신의 낙심과 절망의 문제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히 8절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9절에서는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구체적으로 어떤 절망을 경험하엿는지 본문에서는 소개하지 않앗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인간적으로는 더 이상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을 경험한 것이 분명합니다.
믿음의 거장인 바울로서도 사형선고를 받은 정도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그 세기가 큰 것임을 보게 됩니다. 여기 바울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살 소망도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가 내린상태였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살다가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비참한 지경에서 바울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잇었는가?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바울의 자기신앙의 체험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 절망의 현실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특히 우리나라 민족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감정을 누르고 혼자서 몰래 눈물흘리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한이 많아서 한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본문 8절에 바울도 그렇습니다.“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소망까지 끊어지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이었다고 말합니다. 살소망이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9절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심정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바울은 대단한 의지의 사람입니다. 바울을 옆에서 보면 그는 울을때 울지 않고 슬퍼할 때 슬퍼하줄 모르는 아무 대단한 의지와 이성적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은 어떻습니까? 절망 중에서 자기의 약한 입장 힘든 내면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잘 표현하는 사람이 자신의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 있습니다. 표현할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아플때 아프다고 말하고 힘들때 힘들다고 말하는 그때에 치유가 일어납니다.눈물흘리고 싶을때 흘리고 말하고 싶을 때 말하는 것이 절망을 이기는 시작입니다.
종종 우리 사회에 자살하는 분들을 보면 삶이 철저하게 은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려워도 어렵지 않은 것처럼 외로와도 외롭지 않은 것처럼 위장할 때 더욱 절망하게 됩니다.
데이빗 A 씨맨즌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중에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영적으로 미숙한 어린아이같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고 고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가로막는 어린아이같은 잘못된 생각 중에 “용감한 아이는 울지 않는다”라고 하는 모토입니다. 많은 경우에 특히 남자들은 눈물을 흘리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의 문화는 ‘강하고 조용한 사람’을 추켜올리고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진정으로 승리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조용하고 고요하고 냉정한 모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자제력을 발휘하여 무표정하고 감정도 없는 금욕주의자가 결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슬픔과 낙망과 절망을 표현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절대 죄가 아니고 패배가 아닙니다.
지난 주간에 티비프로그램 중에 눈물에 대한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습니다.
눈물이 ‘신이 준 묘약’이라고 소개하면서 눈물을 통한 삶의 치유를 소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그 내용 중에 제가 감동깊에 본 것은 40대 후반의 한 남자의 이야기였습니다. 부인과 갈등하면서 이혼을 할 수 밖에 없는 심각한 위기가 가정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절망의 가정이 희망의 가정이 될 수 있었던 길은 눈물때문이었습니다. 군 장교 출신으로 냉정하고 이성적이고 딱딱하기만 하던 모습으로 살던 사람이 우연히 눈물을 흘리는 가족수련회에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부터였습니다. 아내를 향하여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아내 앞에서 눈물흘렷습니다. 아이들의 표현에 의하면 원수같다는 아버지가 그 아들을 붙들고 눈물흘렸습니다. 자기의 절망을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눈물로 시인하고 고백하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눈물은 절망의 부부생활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눈물은 냉냉한 부자지간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은 천국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약한 나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힘든 나의모습을 숨기지 마십시오. 내모습 그대로 내려놓고 고백하고 표현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조차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는 슬퍼하고 눈물흘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슬픈 현실을 받아들이고 슬퍼하고 슬픔을 표시함으로서 보내신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을 보면 낙망 중에 있었던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낙망 중에 다윗이 힘들었던 그의 감정을 얼마나 적나라하게 표현합니까?
여러분 종종 목장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제가 듣습니다.
낙망과 상처의 감정을 사랑하는 영적 가족들에게 나누면서 치유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쏱아놓았더니 새마음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어디가서 말할 수 없었던 부끄럽고 힘들고 수치스럽기까지 한 나의 삶이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서로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나누는 고백 속에는 성령님의 놀라우신 치유와 회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절망 중에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게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4절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허용하시고 환난 중에 위로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환난이 없으면 좋을 것이고 그러면 위로도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왜 환난을 허락하시고 위로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환난 중의 위로를 경험하여서 어려운 사람들을 잘 섬기기 위한 목적입니다.
4절 중반절에 보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합니다.고난과 환난을 주시는 이유는 바로 환난 중에 받는 위로를 경험하면서 남을 위로하고 돕는 자로 쓰기 위한 목적인 것입니다.
대부분 위대한 상담자들을 보면 환난의 경험 절망의 경험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경험한 사람들이 한마디 말을 해도 진정으로 필요한 위로을 합니다. 행동을 해도 필요한 위로의 행동을 합니다.
둘째 더욱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절망은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바울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바울은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9절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합니다.
환난을 당할 때 가장 먼저 버려할 것이 “자기”를 의뢰하지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버린다는 것인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나 환난의 도나니에 들어가면 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병에 한번 걸려보면 얼마나 인간이 연약한가! 를 우리는 경험합니다.
특히 죽음의 고비를 한번 경험하게 되면 그것은 더욱 크고 절실합니다.
그래서 보면 인생의 죽을 고난을 경험한 사람들이 인생을 성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한계를 보았기에 교만하지 않고 자기를 의뢰하지 않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고 잇는 것이지만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다가 비로서 고난의 때가 되면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만하다가 고난을 겪으면서 자기 한계를 보면서 자기 신뢰에서 벗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이 내게 유익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바울이 고난을 깊이 만남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의 불청객을 만날 때 우리 하나님을 의뢰하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절망 중에 하나님을 깊이 의뢰한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한번 생각하여 보고 싶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부모로서 가장 수치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자식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절망 그자체입니다. 그는 99세가 되기까지 그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절망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아들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4:18-19)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히11:12에 보면 “이러므로 죽은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생육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죽은 자와 같았는데 절망한 사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조상들의 경험과 자신의 절망의 경험을 통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나를 도우신 하나님 나의 조상을 도우신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도우시고 미래에도 나를 도우심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이지만 어떤 고통이 와도 하나님이 나를 견고하게 하실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찬송 작가인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는 서른 두 살이 되었을 때 인생이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느낀 나머지 이런 인생을 계속 살기보다 차라리 인생을 포기하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에 뛰어내릴 작정으로 마부에게 테임즈 강을 향해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표정을 수상하게 여긴 마부는 청년을 내려놓고는 그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가 강에 투신하려는 순간에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이 청년을 향해 이렇게 격려하고 돌아갑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가 이런 일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 용기를 가지고 굳세게 사십시오.” 그 마부 때문에 그의 첫 번째 계획은 실패합니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음독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웃집에 사는 사람이 우연히 그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가 아직 숨쉬고 있음을 확인하고 해독제를 먹여서 살려 냈습니다. 두 번째 자살에도 실패한 그는 ‘내가 이래서는 죽을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하여 이번에는 면도날을 가지고 손목의 동맥을 끊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놀랍게도 면도날이 부러지는 바람에 세 번째 시도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네 번째는 꼭 성공하리라 결심하며 목을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목을 매단 순간 또 이웃집 사람이 와서 매달려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곧 끈을 풀어 병원으로 데려가 살렸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어렴풋하게 ‘아, 나는 죽을 수도 없는 운명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적인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폐해져 정신병 징후에 시달렸고 계속해서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사랑했던 이웃들의 배려와 손길을 통하여 교회로 초청 받았고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에게 가장 도움을 주었던 분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찬송가405장)을 작사했던 존 뉴톤 목사님이었습니다. 존 뉴톤 목사님은 그의 친구가 되어 늘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며 상담해주고 격려하면서 그의 믿음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목사님처럼 시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양육해준 목사님을 따라 그도 자기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위해서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쓰여진 찬송시 중에는 찬송가가 되어 전세계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는 곡이 무려 67곡이나 됩니다. 그 중 우리 찬송가에 세 곡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샘물과 같은 보혈은”(258)입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혹시 여러분의 죄 때문에 절망하십니까?
주님의 보혈을 더욱 의지하시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죄를 정죄하지만 주님의 보혈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의 죄를 정하게 하실줄 믿습니다.
우리 중에 정신적으로 힘들고 마음을 붙일 곳이 없는 인간적인 외로움의 사람들이 있습니까? 보혈을 흘려주신 그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을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물질의 어려움 때문에 매일같이 힘들고 어려운 현실의 삶을 보내고 있습니까? 모든 것되시는 주님을 의지하심으로 염려과 근심을 그분께 맡기시고 더욱 그분을 의지하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소망없는 세대에 오직 우리가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어떤 절망이 있더라도 더욱 주님을 의지하시기는 삶으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3. 절망중에 서로 돕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고후 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바울은 절망 중에 기도를 부탁합니다. 바울은 절망 중에서 기도로 돕는 은혜를 요청하고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 기도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친구가 언제 생깁니까? 절망이 있을때 기도의 친구도 생깁니다. 우리는 서로 절망할 때 서로 서로 기도의 부탁과 나눔을 부탁하면서 기도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오히려 절망을 통하여 더욱 기도하면서 기도의 귀한 동역자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편안하고 아무 일도 없으면 서로 기도를 나눌 꺼리도 없습니다.
저도 종종 성도님들에게 기도요청을 받습니다.그런데 대개 언제입니까? 절망중에 있을 때에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더욱 영적으로 가까워지고 더욱 하나가 되는 느낌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측면에서는 적당한 고난은 교회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만약에 교회가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힘든 점도 없어보십시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도요청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목회자에게 여러분의 기도 요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다른 성도들에게 목장식구들에게 기도요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바울같이 영적인 거장도 기도부탁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앗습니다.
바울은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니 사람들에게 기도요청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을 향해 여러분들이 기도하여 준다면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웃을 돕는 일이 단지 기도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말로 격려하면서 도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재능을 통해서 도울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여러분의 절망의 자리에서 소망의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목장교회가 여러분의 절망의 자리에서 등대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과 탄식의 자리에서 나를 위해 눈물흘리고 함게 손잡아주는 나의 이웃이 있음을 경험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때로 주변의 한마디가 나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합니다.때로 어떤 한 사람의 사랑의 차 한잔이 나를 절망에서 소망으로 전진하게 합니다.어떤 한 사람의 한끼의 밥이 나를 희망을 향한 도전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내가 잘 나갈 때에는 전혀 도움이 될 것같지 않았던 것들이 이렇게 절망 가운데서는 희망의 도구가 됩니다.
나가는 말)
절망 가운데서도 은혜를 경험하는 삶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절망을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절망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절망을 통해서 서로 도움이 되는 만남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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