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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를 진짜 사랑하시는 예수님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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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결정과 결단과 행위들은 다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교회인 우리가 선교를 하든지, 사회적인 기여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과 삶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만일 저에게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라고 외치며 말하고 싶습니다.

높은뜻 숭의교회의 청년대학부 전임목사로서 저는 여러분들께서 우리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며, 그 사랑에 감격해서 찬송하며 예배하고, 그 사랑 때문에 내 민족과 내 나라 더 나아가 열방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이 제 소원이며 목표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 사랑을 전하고 말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육체로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들과 보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많은 분들이 저의 설교 스타일을 아실 것 같습니다.
저의 설교에 큰 영향을 끼친 한 영화가 있는데 그것은 아주 오래된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입니다. 거기서 유호성이 한 말 “난 한 놈만 패!”라는 대사가 제 설교에 큰 영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 때 가급적 한 사람을 표적으로 삼고 내내 그 사람을 이리 저리 살펴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늘 제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한 사람으로 당첨되신 분은 ‘베드로’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베드로’는 훌륭한 사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분에게 어떤 유감이나 억하 감정이 전혀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 저는 ‘베드로 형님’의 어두운 면을 좀 부각시킬 것입니다. 이때까지 여러분들이 생각했던 베드로와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 아마 제가 천국에 가면 베드로형님을 만날 것인데 그 때를 위해서 이렇게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가장 처음으로 부른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12제자 중 가장 ‘선임 제자’입니다.
유대인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게 첫 번째는 의미가 많습니다.
첫 번째는 권위가 특권이 많습니다.  장자가 그렇고 첫 열매가 그렇습니다.

주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을 가지고 그 베드로가 평소에 어떤 사람인지를 냉철하게 보고 싶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봄으로 저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부각시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다 “베드로도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라고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로, 베드로는 늘 믿음이 좋은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제자들을 배로 먼저 보내시고 홀로 계셨습니다. 그때 바람이 불고 물결이 거세져 제자들이 어려움에 빠진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그런데 수영 쳐서 가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답게 바다 위를 걸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인 줄 알고 소리치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때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하였습니다. 그 요구에 예수님께서는 “오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라는 그 말을 믿고 단순한 베드로는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유효기간이 짧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자마자 바로 바람을 보고 무서워서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어부 출신으로 수영솜씨가 있는 베드로도 그 때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살기 위해 베드로는 예수님께 소리 소리 질러서 구해 달라고 합니다.

그 때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즉시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고” 건져주십니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바다 위를 걸었던 최초의 사람이지만 의심함으로 바로 빠졌습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 대단했던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두 번째, 베드로는 빨리 빨리 이해하고 예수님의 말귀를 잘 알아들었던 제자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은 것으로 말미암아 소위 유대인들이 중요시 하는 ‘장로들의 전통’을 범했다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조목 조목 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떠난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위선과 교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 후 그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이 마15:12에 의하면 그 말을 다 알아 듣고 걱정되어서 예수님께 와서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이야기를 다 알아 듣고 바리새인들이 입장에서 그렇게 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후에 바로 베드로가 다시 등장해서 이렇게 깨는 듯 한 질문을 예수님께 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마 15:15) 그 때 16절에서 기가 막힌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다시 형광등 같이 늦게 깨닫는 베드로형님에게 자세히 잘 설명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귀나 가르침을 그 때 그 때 잘 알아들은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세 번째, 베드로는 예수님께 심한 꾸중도 많이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마 16장에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심한 꾸중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는 명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면서 엄청난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과연 베드로가 신앙이 대단할까요?
사실 그 놀라운 신앙 고백이 베드로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도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대단해서 그 고백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베드로로 하여금 그렇게 알게 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칭찬 바로 뒤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기에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때 바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모든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엄청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하셔야 했던 것을 인간적인 생각으로 방해했을 뻔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일생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을만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네 번째, 베드로는 졸지 말아야 할 중요할 때마다 잘 조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변화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십니다.
그 때 요한복음 9:32에 보면 베드로가 깊이 졸다가 깨서 엉겁결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12 제자 중 따로 셋만 데려가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하시는데 거기서 조는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겟세마네 동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을 아시고 너무 고민하고 슬프셔서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과 가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특별히 더 가까이서 기도하도록 부탁하십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라고 친히 부탁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오시니깐 베드로는 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섭섭하셔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베드로는 결정적일 때 참 잘 조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베드로는 자신의 위치나 명예에 관심이 많았던 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투기도 잘하고, 성질을 잘 내는 사랑이었습니다.
마 18장에 보면,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때 첫 번째 수제자로 알고 있는 선임 베드로가 가만히 있었을까요?

또한, 마태복은 20장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두 아들을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청탁을 한 것입니다. 그 후에 마20:24에 보면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이 여기거늘..” 합니다.
여러분 열 명의 제자들 중 가장 분히 여겼을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되십니까?
그것은 베드로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선임제자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끔씩 12 중에 셋을 따로 세우실 때가 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입니다.
그 셋 중 둘만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하면 베드로는 낙동강 오리알이 됩니다.
그러니 제일 분하고 섭섭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6장에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에 칼을 빼서 군사의 귀를 친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때 베드로를 말리시고 그 귀 고치셨습니다.


여섯 번째로 큰 소리만 뻥뻥 치고 뻐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베드로는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라고 큰 소리 치며, “일곱번까지 하오리까?” 라고 떠벌립니다.
그때 그 마음에 교만을 아는 예수님께서 한 마디로 잠재우십니다.
“일곱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하라!” 즉 일곱 번에 70번을 곱해 버리십니다. 그 다음을 계속 보면 베드로는 아무 대구도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또 큰 소리 치는 베드로가 나옵니다.
신앙생활에 거의 흠 잡을 때가 없는 모범적인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오는 장면입니다. 어쩌면 그때 예수님이 데리고 다니는 제자들보다 훨씬 훌륭한 그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워낙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에 싸여서 가버립니다.

그때 그 기회를 베드로가 잡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큰 소리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베드로는 어떤 보상심리도 있고,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교만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큰 소리의 절정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날 드러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오늘 밤에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베드로는 큰 소리 뻥뻥 치며 이렇게 두 번씩이나 장담(壯談)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났던 자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잡혀 가시고 베드로는 그 예수님을 좇아 갑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첫 번째는 한 여종이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하는 말에 베드로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라고 부인 합니다.

두 번째로는 다른 여종이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하는 말에 베드로는 맹세하면서 부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부인합니다.
세 번재로는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알아보고는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라고 할 때, 베드로는 이번에는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누구를 저주하였을까요? 그 사람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일까요?

  문맥상으로 보면 예수님일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하여 손가락하며 욕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도 베드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큰 형님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자기는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이야기했던 베드로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전히 고기를 잡은 것을 보면, 베드로는 늘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은 듯 싶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이시라면 이 베드로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찾아 가시겠죠?  왜요?
복수하러 찾아가지 않을까요?
만일 제가 인간적으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찾아 가야죠..
그 웬수를 찾기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 가야죠!

그 날 하루 종일 고기잡이 하였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를 발견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리고는 사람을 뜯어먹는 식인 물고기  153마리를 그물 가득히 선사해야죠.
그물이 넘쳐서 배가 뒤집혀서 고기들이 베드로를 뜯어먹게 해야 좋은 복수가 되겠죠?

아니면 예수님처럼 조반을 준비해야죠.
많이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베드로 불러다 놓고 한 마디도 안 하면서 떡과 고기를 먹일 것입니다.
배가 터져 죽을 때까지...
제가 좀 심합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마 그렇게 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찾아 가셔서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지친 그에게 그물 가득히 고기를 잡게 해 주십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리고 밤새 일해서 지치고 배고픈 그들에게 정성껏 손수 조반을 지어서 먹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미안해하고 할 말 없어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처럼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러분 이 말 이면에 있는 또 하나의 말씀을 오늘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난 니가 무슨 짓을 했어도 아직도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어린 양이라면 그것은 바로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내 어린 양’은 예수님의 존재 이유이며 전부입니다.
그 어린 양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전부인 ‘내 어린 양’을 들 떨어지고 성질 더럽고 나약한 베드로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베드로를 세우시고 견고케 하시어서 당신의 전부를 맡기는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는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약한 시몬을 반석인 베드로로 만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임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같은 사람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에서 베드로를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베드로 같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똑 같이 물으실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는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도 베드로처럼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번 여름이 여러분들이 그렇게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여름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여름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만들 계기로 ‘전교인 수련회’가 마련되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 교인 수련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계기를 마련할 것입니다. 그저 놀고 쉬는 수련회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아가서 회복되는 수련회가 될 것입니다.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라도 참석하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기도로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앎으로 하나님과 더 친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세상은 참 살기 쉽지 않습니다
어디서 어떤 일을 당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신앙과 의지라는 것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뿌리를 든든히 내려야 합니다.
그 뿌리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충만케 되고 그 사랑에 대해 믿음과 체험이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문희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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