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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 양성의 중요성 (행 18: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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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고 모든 것의 마지막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마지막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을 통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보아라,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의 마지막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음의 전파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그러나 처음은 언제나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가 넘치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먼저 감사한 마음으로 하면 그것은 나와 모두에게 복된 일이 됩니다. 설사 그로 인해서 내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해도 그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큰 감동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일본에서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다가 그만 주금에 이른 한 유학생의 이야기가 우리와 온 일본을 감동으로 몰아넣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누구도 그 유학생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 유학생이야말로 자기 목숨까지 내어준 진정한 의인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조금 다르다고 해도 이렇게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에 헌신했던 한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봉사활동을 떠났다 피랍되어 죽임을 당한 배형규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들의 마음을 참으로 아프게 합니다. 그는 자신도 병으로 고통당하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봉사단을 이끌고 위험을 무릅쓰고 봉사활동을 떠났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잣대를 들이대서 위험지역에 무리하게 선교활동을 떠났다고 하며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렇기에 그분을 높이 칭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 차인표씨가 자신의 카페에 올려놓은 글을 소개합니다.
악어들이 득실거리는 어느 강가에 “위험”이라는 푯말이 서 있습니다. 강을 건너던 작은 배가 뒤집혀 아이들이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그들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 무리의 어른들이 강으로 뛰어 듭니다. 아이들을 한명, 두 명 구하던 그 어른들은 이내 악어의 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기 시작합니다.

강가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할까요? 아니면, “위험”이라는 푯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네 의지로 갔으니 알아서 해라" 할까요? 혹은 "지금 악어에게 물리고 있는 사람이 나와 같은 종교인가, 아닌가"를 분석할까요?
일면식도 없는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을 돕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던 착한 사람들이 악인들의 손에 붙잡혀 생명이 위태로운 지금. 그들을 바라보면서, "유서 쓰고 갔으니, 조용히 죽어라", "내가 낸 세금으로 몸값 지불하지 말아라" 라고 말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입니다.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들을 돕는 게 밉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질투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돕습니까? 나를 먼저 도와야만 착한 사람들입니까? 내가 먼저 살고, 그 다음 내 부모랑 자식들이 잘 살고, 내 친구들이랑 주변의 내 편들이 다 잘 살게 된 다음에, 그래도 여력이 되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이기심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긍휼한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 스물세명의 소중한 분들에 대한 모함이요, 매도이고, 평가할 가치가 없는 나쁜 생각입니다.

크리스천을 욕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지,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 중에서도, 돌아가신 배형규 목사님과 아직 억류되어 있는 스물두 분은 선하고, 훌륭한 분들입니다. 이 분들은 존재함으로써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보석 같은 사람들입니다.

큰 교회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주위의 크리스천 때문에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싫고, 이해 할 수 없는 집단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을 보고 양치기를 탓하지 말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순결하고 깨끗해야할 양이 더럽고, 지저분합니까?
새하얄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냄새나고, 털에는 벼룩이 있습니까? 순할 줄 알았는데, 손을 내미니 그 손을 물어 버립니까?
그 더럽고 사납고 무례한 양을 거둬들여 보호하고 사랑하고 인도하는 양치기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양들을 그토록 사랑하게 만들었는지 말입니다.

양치기가 품은 양들은 천천히 바뀌어 나갈 것입니다. 지금은 우둔하고, 못나고, 기억력이 없어서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또 저질러 양치기를 슬프게 만들지 모르나, 어제 보다는 오늘, 오늘 보다는 내일... 그렇게 하루에 조금씩 양들은 변해 갑니다. 양은 결국 양치기의 모습을 닮아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순교하신 배형규 목사님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듯 말입니다.

이글에 대해서도 찬성하는 네티즌들은 “정말 감동적인 글이다” “피랍자들이 살아 돌아오길 원한다”는 반응도 있는 반면 “현재 문제가 되는 기독교와 피랍자들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모르고 있다”는 비판 글도 상당수라고 합니다.
한 네티즌은 미니홈피에 ‘지나가다’란 대화명으로 “국민 모두가 이번 일로 가슴 아파하고 있고, 어찌됐든 살아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같다”며 “아프가니스탄은 선교활동이 법적으로 금지된 나라여서 선교로 인해 개종할 경우 사형에 처하는 나라인데 이런 나라에서 단기선교를 가는 행위가 선하고 훌륭하냐. 그 나라의 문화, 종교를 무시한, 지극히 오만한 선교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울 사도 그는 어떻게 보면 이렇듯 유대인들의 비난과 배척의 표적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바울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헌신적인 수고를 통해서 점점 더 퍼져가는 복음의 불길아래 제자 삼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 앞에 우뚝 서게 된 위대한 전도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에베소까지 동행한 바울과 아굴라 부부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과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에서 서로 만났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로마로부터 쫓겨나 고린도에 정착을 했고 바울은 아테네에서의 전도 활동에 사실상 실패를 하고 고린도로 옮겨왔습니다. 실패자끼리 만나서 일을 함께 한다고 할 때 그 결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보지 않아도 그 결과야 뻔하지 않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보십시오. 이들이 함께 만나 함께 일하면서 마음이 맞아 오직 말씀에 붙잡혀 예수님을 전한 결과 고린도에 놀랍도록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 심지어는 회당장으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고린도 시민들이 믿게 되었고 그 결과 이들을 좋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기 위해서 일 년 반 동안이나 고린도에 머물면서 저들을 가르치게 되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실망과 좌절 속에 쓰러져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총독이 바뀌는 것을 기회로 다시 바울을 헤치고자 하는 일이 생기게 되자 바울은 이제 그들과 다투지 않기를 위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돌아옵니다. 물론 때로는 거의 대부분 일방적으로 바울이 두들겨 맞고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한 번도 유대인이라든가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들과 마주 싸우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바울은 이것을 새로운 곳으로 옮겨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랬기에 지금도 그는 고린도를 떠나 시리아와 겐그리아를 거쳐 에베소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아굴라부부가 바울과 함께 동행합니다. 그들은 서글프게 로마에서 쫓겨난 뒤 새롭게 자리를 잡게 된 고린도에서의 생활보다는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고린도에 일 년 반 동안 머물렀던 바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 년 반 동안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면서 새로 믿게 된 사람들을 가르쳤고 그에 따라 당연히 아굴라 부부도 이 가르침을 통해 온전한 말씀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이들은 고린도에서 보다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바울을 돕는 동역자로서의 힘들고 어려운 삶을 자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뒤에 쓴 편지들에서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 대한 고마움을 거듭 거듭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제자 삼는 사역을 통해 아굴라 부부는 좋은 제자로 새롭게 태어나 바울과 함께 수고하며 동행하는 동역자까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에베소에 잠시 머물면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좀 더 머물러 달라는 그들의 청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하고는 베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에 내려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도들에게 그동안의 사역에 대해 보고를 합니다. 그리고는 처음 자신을 파송했던 안디옥으로 돌아갔다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모든 신자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것으로 그의 2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을 결산해 볼 때 가장 귀한 결실은 바로 고린도에서 만나 에베소까지 동행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도 바울의 좋은 후원자가 되었던 아굴라 부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이 아굴라 부부만 생각하면 힘이 절로 날 정도였으니 이들이야말로 정말로 귀한 동역자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렇듯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주의 종과 함께 동행하며 돕는 귀한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에베소에서 만난 아굴라 부부와 아볼로입니다.
아볼로라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왔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으며 교육을 많이 받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에 관한 도도 배워서 알고 있어서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말하고 자세히 가르칠 정도로 준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요한의 세례밖에는 몰랐다고 했습니다. 아볼로가 이렇듯 회당에서 용기 있게 말하며 가르치더란 말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에는 무언가 부족함이 있는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를 자기들의 집으로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 주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대해서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이 그들은 이렇듯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 있게 전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불확실하게 알고 있는 아볼로를 볼 때 그를 데려다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정도로 말씀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일 년 반 동안 말씀을 배움으로서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아굴라 부부는 바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배웠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주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자신 있게 전하는 사람을 데려다가 보다 자세히 가르칠 정도로 확실한 말씀의 사람으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굴라 부부가 바울의 제자였다면 아볼로는 이미 말씀의 사람이었기는 하나 아굴라 부부를 만남으로 해서 보다 확실한 말씀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었기에 넓은 의미에서는 아굴라 부부의 제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굴라 부부로부터 말씀을 보다 자세히 배우고 알게 된 아볼로는 더 이상 에베소에만 머물러 있지를 않고 아가야 지방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 에베소의 신자들은 아가야로 떠나는 아볼로를 격려하여 줄 뿐 아니라 그 곳의 신자들에게 아볼로를 영접하라고 편지를 써줍니다. 아가야 지방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는 사람들 앞에서 유대인들과 열정적으로 토론을 하여 그들의 주장을 물리쳤으며, 성경을 이용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했습니다. 그 결과 아가야 뿐 아니라 고린도에까지도 아볼로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 나중에 나는 바울을 따른다 나는 아굴라를 따른다 하고 서로 이야기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끼쳤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볼로 역시 아가야와 고린도에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내는 귀한 일꾼이 되었던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2장 2절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내게서 들은 가르침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가르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칠 것입니다.”라고 해서 바울이 디모데를 그리고 디모데가 충성된 사람들을 그리고 그 충성된 사람들이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처럼 바울이 아굴라 부부를 그리고 아굴라 부부가 다시 아볼로를 그리고 아볼로가 아가야 지방과 고린도에서 다른 충성된 사람들을 가르쳤던 것이 바로 복음의 아름다운 성장의 밑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말씀을 자세히 배워 좋은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갈 뿐 아니라 말씀을 알기는 해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말씀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마치 구슬도 잘 갈고 닦아야 좋은 구슬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수 있도록 일꾼들을 가르쳐 세워나감으로 주의 종과 함께 수고하는 하나님의 귀한 사역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가장 지치고 낙심해 있을 때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하셨고 바울과 함께 일하면서 바울에게 배우고 그 감동과 감격을 안고 고린도를 떠나 낯선 땅 에베소까지 동행한 아굴라 부부에게 아볼로를 만나게 해주심으로 초대교회 선교의 귀한 역사가 이어지게 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패자들을 세워 오히려 승리자로 세워나가시는 하나님께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교훈 삼아 실패한 사람들을 서로 격려함으로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세워나가는 일에 함께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실패한 사람이요 너도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쩌다 우리 이렇게 실패한 사람들끼리만 모였냐고 하지 마십시오. 비록 나도 너도 실패한 사람이라고 해도 서로를 격려하다보면 오히려 승리자로 새롭게 태어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아울러 함께 일하면서 서로 격려하는 가운데 그 주어진 기회를 살려 제자 양육에 힘썼던 바울 사도 그리고 바울에게 배워 역시 아볼로라는 좋은 제자를 키워낸 아굴라 부부 그리고 아굴라 부부에게 배워 아가야와 고린도에 좋은 제자를 키워낸 아볼로의 모습을 보면서 제자 양육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했기에 그 경험을 살려 더 좋은 사람을 세워나갈 수 있다고 그렇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제자 삼는 일은 누구 한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이 일은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서 보듯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말씀으로 잘 배우고 익혀 좋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고 한 번 실패했다고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랬기에 더 좋은 일꾼들을 세워나가는 제자 삼는 사역자가 될 뿐 아니라 아름다운 믿음의 동역자요 좋은 후원자로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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