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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는 어떤 곳인가?(5) : 세상의 소금과 빛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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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어떤 곳인가? (5) "세상의 소금과 빛" / 마5:13-16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을 보시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었고 제자들이 함께 모여서 이룬 교회를 향해서 하신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저들이 바로 세상의 빛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엡5:8). “너희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빌2:15,16). 예수님께서는 오늘 아침에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여러분들과 우리교회를 향해서 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오늘 아침 “교회는 어떤 곳인가?” 라는 주제로 다섯 번째 설교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서론적으로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하느냐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여야 하느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여야 하느냐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시면서도 동시에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라고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면서도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어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요20:21).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그리고 세상에 나아가서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사도 바울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권면하면서도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살아가라고 권면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이 세상의 정욕은 다 버리되 세상을 떠나지는 말고 세상 안에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도록 노력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2:12,13).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세상과의 관계는 부정과 긍정을 함께 붙잡는 역설적인 긴장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역설적인 긴장 관계를 “두 사이에 끼었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을 듯도 하고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좋을 듯도 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1-24).

사도 바울은 솔직히 세상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도 세상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성도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 된다면 죽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에서 사는 길을 택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대단한 고백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훌륭한 위인들은 가족이나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삶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자기의 죽음까지도 포기했습니다. 대단한 고백이었습니다. 너무나 수준 높은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가 30여 년 전 후암교회에서 청년들을 가르치면서 빌립보서 1장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수준 높은 역설적인 신앙의 고백을 전했을 때 상당수의 청년들이 충격을 받으며 선교사와 목사와 사역자들로 헌신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과 세상과의 관계는 부정과 긍정을 함께 붙잡는 역설적인 긴장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 안에서 살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세상에서 무슨 역할을 하여야 할 것입니까?

첫째, 교회는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교회와 신자는 기질과 특성이 소금으로 바뀌어진 존재라고 말씀했습니다. 본래는 소금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 기질과 특성이 소금으로 바뀌어진 존재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이제] 세상의 소금이니.” 존재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진흙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소금이라.” 소금이 하는 일 세 가지가 있습니다. 존재에 변화가 일어났을 때 역할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썩는 것을 막는 일입니다. 생선에 소금을 뿌리면 생선이 썩지 않습니다. 무와 배추에 소금을 뿌리면 무와 배추가 썩지 않습니다. 삶은 콩에 소금을 뿌리면 콩이 썩지 않습니다. 소금은 썩는 일을 방지합니다. 두 번째는 맛을 내는 일입니다. 생선에 소금을 뿌리면 맛있는 굴비도 되고 맛있는 고등어도 됩니다. 무와 배추에 소금을 뿌리면 맛있는 김치가 됩니다. 삶은 콩에 소금을 뿌리면 맛있는 된장이 됩니다. 소금은 맛을 냅니다. 세 번째는 스스로 없어지는 일입니다. 소금은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녹아서 없어지고 맙니다.

세상에 대한 신자와 교회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와 교회는 첫째로 썩어져 가는 세상과 사회를 썩지 않도록 막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과 사회는 그 대로 놔두면 썩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가정도 썩고 학교도 썩고 사업도 썩고 정치도 썩을 수 밖에 없습니다. 거짓과 부정 부패 그리고 폭력과 향락과 퇴폐가 판을 치고 있는 곳이 이 세상이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100여년 전 복음이 한국에 들어 왔을 때 교회는 소금의 역할을 했습니다. 썩어져 가는 한국의 사회가 썩는 것을 막는 일을 했습니다. 정직 운동이 일어 났고 절제 운동이 일어 났고 사랑 운동이 일어 났습니다.

신자와 교회는 둘째로 맛이 없는 이 세상의 삶을 맛이 있게 만드는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복음이 북미 대륙에 들어 갔을 때 교회는 사람들의 삶에 보람과 의미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소명의식과 사명의식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가정을 돌보는 일을 비롯해서 노동하는 일, 공부하는 일, 사업하는 일, 정치하는 일에 보람과 의미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의 맛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찬란한 기독교 문화를 창조했습니다.

신자와 교회는 셋째로 세상의 어느 곳이나 깊이 파고 들어가서 녹아서 없어지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없어진다는 것은 희생을 의미하고 손해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도 손해를 보고 시간도 손해를 보고 건강도 손해를 보고 마지막에는 생명도 손해를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체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사람은 소금이 되지도 않았고 소금의 역할을 할 수도 없습니다. 소금이 된다는 것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정과 높임을 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희생하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썩는 것을 막고 있습니까? 함께 썩어져 가고 있습니까? 한국교회는 지금 향락관광 퇴폐관광을 막지 못할 뿐 아니라 골프관광과 향락관광에 함께 참여하기도 합니다. 맛을 내고 있습니까? 오히려 맛이 없어지게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의 맛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스로 없어지며 희생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며 이익과 명예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한국교회는 존경을 받는 대신 비난과 멸시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모두가 내 탓이라는 겸허한 참회도 별로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하지만 저는 최근 아프간에 억류되어 있는 22명의 젊은 이들을 위해서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혹 저의 생명 하나와 22명의 생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까?” 라는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혹 제가 없어지고 저들을 살릴 수는 없습니까?” 라는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 엄청난 말을 너무 쉽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다가 어제 새벽에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존재는 별 가치가 없기 때문에 혹 미국의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아프간 탈레반 관할 지역에 가서 자기가 그곳에서 사는 대가로 22명의 인질들을 풀어달라고 요청한다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 없어질 수 있는 소금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프간을 살릴 수 있는 의인 열명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소금은 세상을 살리고 자신이 없어지는 존재입니다.

둘째, 교회는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교회와 신자는 기질과 특성이 빛으로 바뀌어진 존재라고 말씀했습니다. 본래는 빛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 기질과 특성이 빛으로 바뀌어진 존재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이제] 세상의 빛이니.” 존재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존재에 변화가 일어났을 때 역할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빛이 하는 일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어두움을 몰아내는 일입니다. 숨어 있던 것들을 밝히 드러내는 일입니다. 더러운 것도 드러내고 잘못된 것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둘째는 밝음과 따뜻함을 가져다 주는 일입니다. 빛이 비치면 따뜻함과 기쁨이 생깁니다. 빛이 비치면 아름답고 좋습니다. 셋째는 방향을 제시하는 일입니다. 등대의 빛은 배가 항해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자동차의 전조등은 자동차가 운전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빛은 방향을 제시합니다.

세상에 대한 신자와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와 교회는 첫째로 어두움을 몰아내는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어두움과 죄악을 드러내는 심판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100여 년 전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 한국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던 도덕적 사회적 죄악을 드러내는 일을 했습니다. 미신을 타파했습니다. 첩 제도를 타파했습니다. 남녀 차별제도를 타파했습니다. 신자와 교회는 둘째로 어두운 이 세상에 밝음과 따뜻함을 비치는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어둡고 차가운 이 세상에 밝음과 따뜻함과 사랑의 빛을 비치는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따뜻한 빛을 비칩니까? 우선 얼굴에 웃음을 나타내며 빛을 비칩니다. 우리교회 신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많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부드러운 말과 칭찬의 말을 하면서 빛을 비칩니다. 우리교회 신자들의 입에는 부드러운 말과 칭찬의 말이 많다고 합니다. 그 다음 아름다운 영혼의 노래를 부르므로 빛을 비칩니다. 우리교회 성가대원들의 입에는 아름다운 영혼의 노래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밝음과 따뜻함과 사랑의 빛을 비칠 때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따뜻해지고 즐거워집니다. 신자와 교회는 셋째로 혼돈 가운데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세상은 지금 방향을 잃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왜 공부를 하고 있는지 그 이유와 목적과 방향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원에 가면 다 되고 영어를 공부하면 다 되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외국으로 영어 연수를 가면 다 되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현대인들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목표와 방향을 보여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삶의 방향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공부를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삶의 방향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신자와 교회는 하나님을 밝히 보여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빛도 소금처럼 자기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자신을 태워서 없앱니다. 그리고 어떤 사물을 밝히며 드러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자기 자신을 비추며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어두움을 몰아내며 부정과 부패와 불의를 심판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어두움 속에 빠져서 부정과 부패와 불의와 타협하고 있습니까? 밝음과 따뜻함의 빛을 비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차갑고 냉정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혼돈 가운데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을 바로 제시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우리 자신이 혼돈에 빠져서 우왕좌왕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빛은 자기 자신을 태우면서 세상을 밝히고 세상에 밝음과 따뜻함을 가져다 주는 화로 불이고 그리고 망망대해와 같은 세상에 올바른 삶의 방향을 가리켜 보여주는 등대입니다.

셋째, 교회는 세상에서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한 마디로 요약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소금과 빛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착한 행실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는 삶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신자와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인들의 죄를 씻어주고,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고, 상처 입은 자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을 하기 위해서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고 신자들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착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저가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10:38).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권면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에게 할찌니라”(갈6:10).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목적도 결국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는데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착한 일들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신자와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나바와 도르가와 고넬료와 루디아와 브리스길라는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우리 교회의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교사들이 시간과 몸을 바쳐 어린이들을 위해서 착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전도부원들 구제부원들 봉사부원들은 시간과 몸을 바쳐 착한 일들을 항상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구제 헌금과 선교헌금을 하므로 간접적으로 세계 곳곳에 착한 일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신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 중의 하나가 세상에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 교회나 신자는 참된 교회도 아니고 참된 신자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존재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행실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목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을 때 존재와 행실에 혼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존재와 행실의 목적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둘 때 우리의 존재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되고 우리의 행실이 건강하고 아름답게 됩니다.

인간은 목적 지향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공부하는 목적도 결혼하는 목적도 자식을 낳는 목적도 직업을 가지는 목적도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 목적도 자기의 이익과 행복 추구에 둡니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는 목적도 자기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자기의 삶이 더 행복해지는데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을 행하는 목적도 자기가 칭찬을 받는데 두기도 합니다. 결국 목적이 분명하지 않을 때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집사의 존재에 혼란이 생길 수도 있고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집사가 하는 일에 회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일이나 선한 행하는 일을 자기 만족이나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할 때 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은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하되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고 분부하십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해도 그 목적이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데 둔다면 우리의 모든 착한 일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지자가 되고 사도가 되고 위대한 목회자와 선교사가 된다 하여도 만약 그 목적이 우리의 이름을 나타내고 우리의 영광을 추구하는데 둔다면 우리의 모든 수고는 허사로 돌아가고 맙니다.

마7:22,23을 읽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며 주의 일은 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날 주님께서 하실 무섭고 준엄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두면서 사는 사람이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고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기적인 동물인 우리 인간이 어떻게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됩니다. 많은 훈련을 받으면 조금씩 이루어집니다. 실패와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 조금씩 이루어 집니다. 기질이 변화되고 행실이 변화되면 조금씩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도 조금씩 변화되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강제적인 명령이 아닌 부드러운 권면의 말씀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극히 이기적이고 극히 부패한 우리들을 향해서 거의 불가능한 일을 분부하셨습니다. 우리들을 너무 높이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너무 귀하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너무 가능한 존재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너무 고맙고 너무 황송한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너무너무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사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소금과 같이 세상 어디에나 들어가 녹아서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썩음을 방지하고 맛을 내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의 역할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둡고 차가운 세상에 밝음과 따뜻함을 가져다 주는 행복 산출의 역할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로 제시하는 안내자의 역할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그리고 우리교회를 오늘의 소금과 빛으로 만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그리고 우리교회를 세상에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수 있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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