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반석 위에 세운 집 (렘 1:4-10, 빌 3:7-11, 마 7:24-27)

  • 잡초 잡초
  • 555
  • 0

첨부 1


반석 위에 세운 집" / 2007년 7월 22일 

오늘은 저희들이 근심 속에 기도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희 동족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질로 잡혀있고 조속히 인질들이 풀려나길 바라고 우리 땅의 평화는 물론 아프가니스탄에도 평화가 있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우리 성가대 찬양대로 하나님께 영광 우리 모두에겐 평화 이 기도가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기도로 저희한테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하나님께서 가족들을 위로해 주시고 속히 이 일이 해결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얘기 나왔으니 몇 마디 말씀 드려야 되겠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이란 나라는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 극심한 고난도 겪어 왔고 아픔도 겪어온 거 다 압니다. 70년대 80년대에는 소련의 진입으로 인해서 아프가니스탄에 엄청난 피해가 있었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서 아프가니스탄이 잠시 소련의 수중에서 독립을 했지만 9.11테러 이후 빈 라덴이 숨어있는 곳이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해서 갈등 속에서 다시 미국의 점령을 받고 당시 정권을 잡은 탈레반이라 이름 하는 이슬람 극단 집단이 정권을 내놓고 지하로 숨었습니다.

오늘 그 집단이 분당 샘물교회 청년들을 인질로 잡고 지금 협상 중에 있는 걸로 압니다. 저희 교회도 8월 달에 베트남에 의료선교를 떠나려고 하는데 염려는 안하셔도 되리라 믿습니다. 베트남 같은 경우에는 우리도 참전해서 엄청난 전쟁 와중에 베트남과 우리 관계가 극단으로 치달았지만 지금은 그 나라 정부도 국민도 우리가 오는 걸 환영하고 있고 또 아무런 사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 같은 회교가 지배하는 나라와 기독교 사이의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너무 심각하고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평화가 있다고 하는데 이슬람 하나님과 기독교 하나님이 너무 달라서 그런지 종교가 개입되고 났더니 너무 힘들고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 속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반석에 세운 집처럼 평화의 반석의 나라들이 선다고 했는데 갈등하는 모래알이 돼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사죄하고 종교 뒤에 숨은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찾을 시점이 됐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관계는 너무나도 힘든 역사적 과거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서북 교회와 동북 교회 얘기 드렸습니다만 동북 교회 발전상은 동 구라파나 북 아프리카나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소위 비잔틴 세계의 기독교는 바로 그쪽에 살고 있는 회교도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동방 정교회는 회교도들의 힘 앞에 여지없이 굴복했고 험난한 교회 역사를 지녔습니다. 그리고 1900년대가 되고 부터는 회교가 물러가고 공산주의가 와서 이 동방의 교회는 회교의 압제 속에 또 공산주의의 압제 속에서 어려운 길을 걸어 왔고 이제야 조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와 갈라졌지만 동방교회가 회교 앞에 무릎을 꿇고 지나고 심지어 성지라 이름 하는 예루살렘까지 회교 손에 들어가자 서방교회가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잃은 고지를 회복하려고 이백년 동안 전쟁이 있었습니다.

누가 잘못했느냐 따지기 전에 이 두 종교는 서방의 기독교와 또 동쪽에 있는 회교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통해서 그 싸움의 여파가 오늘까지도 미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알라신 믿는 회교도와는 갈등하며 살아야 합니까?

우리나라 역사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6.25전쟁 때 북한의 침략을 받아서 밀리고 있을 때 UN결의에 의해서 UN 회원국 중 16개 나라가 우리를 도와주러 참전을 했습니다. 제일 큰 부대가 미국 군대였습니다.

두 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송해준 나라가 회교 국가인 터키였습니다. 터키가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송해 주었는데 1개 여단 병력을 파송해 주었고 앙카라 학교라는 학교도 세워서 학교를 못 다니는 아이들을 후방지역에서 도와준 일도 했다고 기록이 돼있습니다.

당시 터키여단에 요즘 우리식으로 말하면 군목입니다. 이맘이라 이름 하는 군종 장교가 앙카라 학교에 소위 도움도 주고 또 회교도 전파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게 아마 우리나라에 회교가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됐을 걸로 믿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회교사원이 한남동에 하나있고 전국적으로 8개의 지회가 있고 60개의 임시 기도처가 있다고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물론 터키란 나라는 아프가니스탄과 다릅니다.

터키란 나라가 2차 대전 후에 국가를 다시 세우면서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국가라는 정치는 구분하기로 그래서 종교는 종교고 정치는 정치라 해서 터키는 소위 종교적으로 말하면 종교의 세속화. 아니 정치와 종교는 각자 임무를 맡기로 하고 정치에 이슬람 종교가 개입하지 않기로 하고 아타튀르크란 초대 대통령의 뜻에 따라서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우리 기독교 국가는 아니지만 기독교가 아주 강한 힘을 가지고 번성하는 나라입니다. 터키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에 있는 여러 이슬람 국가들도 많이 돕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에 보면 스탄 이란 말이 끝에 들어간 나라가 아주 많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등등 전부 회교 국가의 공통 명칭입니다.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종교가 다르던지 같던지 간에 우리가 도울 일이 있으면 기꺼이 가서 도와야 되겠고 그래서 마침 아프가니스탄에도 군인이 파송돼 있는데 마침 선교 집단이 갔다가 오늘 탈레반의 인질이 돼서 비극을 맞고 있습니다.

참 재밌는 사실은 앞으로 우리가 이런 나라를 도울 때 꼭 종교적인 목적으로 가서 도와야 하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의료 베풀고 자선을 베풀고 신앙의 문제는 그 결과로 삼는 것이 현대 선교의 지혜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저희들이 선한이웃 클리닉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같이 예배를 드립니다, 본인들이 알아서 신앙에 귀화할 수 있도록 저희들이 기도로 또 성경책을 주는 걸로 의술로 이렇게 전하는데 선교를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라 선교하는 방법이 이제는 마음속으로 진실로 인간의 깊이에서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고 또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데 훨씬 더 좋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언젠가 1200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평화대회를 하려하다 중지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종교전쟁 이런 것들을 이제는 지혜를 발휘해서 새로운 차원의 선교로 가야 세상의 평화 동시에 진실 된 그리스도의 말씀이 효과적으로 전해질 것이다 이런 생각이 자꾸 들어갑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아랍 사람들 중에 회교만 있는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아랍인 기독교인들도 성경 말씀을 읽습니다. 회교도는 회교도대로 코란이라 이름 하는 자기들 성경을 읽고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읽습니다.

아랍에 가면 아랍어로 된 성경을 보면 성경 말씀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이 알라 라고 돼있습니다. 회교도 읽는 코란에도 하나님은 알라라고 되어있습니다. 교회를 가나 회교 모스크를 가나 알라께 기도하자고 하면 똑같이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쉽게 하나님 또 영어하면 GOD. 회교도 믿는 사람을 알라 이렇게 말하는데 아랍지역의 교회에서도 알라께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라는 생각도 많이 해보았습니다.

근데 오늘 우리에게 주신 예수의 말씀은 이 천년이 지났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주시는데 예수님이 만드신 것은 종교가 아니고 예수님이 보시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의 나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되는걸 목적으로 했지 예수님이 또 하나의 종교라 하는 집단을 만들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사회에 생긴 것이 종교란 이름의 기독교란 이름의 회교란 이름의 여러 종파와 종교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서 선민으로 삼고 온 세상 사람들 구원하실 가장 모범적인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택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지만 그러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실현 될 때는 사람은 구조가 필요했고 조직이 필요했고 이론도 필요했고 교류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종교라고 하는 것이 태어났습니다. 언제 야훼 하나님이 유대교를 만들라고 했습니까? 유태인들이 선민으로서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조를 만들고 세우다 보니 유태교라는 종교가 생겼습니다. 종교가 생기고 났더니 종교라는 구조에서 나오는 또 다른 사건들이 자꾸 생겨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우리가 늘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구주로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빌립보한테 보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고 내가 자란 다소라고 하는 내 고향은 당시에 위대한 학문의 도시였습니다. 지금의 터키에 있는 다소입니다.

이 다소에 위대한 학교가 있었는데 요즘말로 하면 다소대학 이었습니다. 거기서 사도바울은 철학도 공부했고 당시 유행하던 스토아 철학을 심취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준 이성이 가장 좋은 도덕의 기반이다. 철저한 이성 중심의 스토아 철학. 자연을 파괴하지 말고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인간다운 그리고 우주 질서에 맞는 인간의 세계를 만들자고 스토아 철학이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인간의 이성이 해결할 수 있고 또 자연과 함께 하면 자연과 합일된 이성이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요즘 말로 말하면 좀 낙관적이면서도 아주 인간 중심적인 그런 철학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배운 유대교는 율법에 따라서 모든 것은 법제화 돼있었고 하나님이 만드신 율법 속에 안주하면서 율법이 지정한 모든 합리적이고 하나님이 주신 제도를 잘 지켜나감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인간 사이에도 평화를 누린다고 배웠습니다.

유대교 율법을 공부했던 사도바울과 자연과 함께 약간은 금욕적이기는 하나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발휘해서 행복하게 다함께 모든 민족과 함께 살아가야 된다는 보편적인 덕을 강조했던 스토아 철학과 율법은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자신감 속에서 사도바울은 소위 예수라는 사람이 나와서 벌이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예수 일당의 얘기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예수 일당들을 핍박하기로 결심합니다.

나중에 사도바울 자신이 예수의 십자가 앞에 거꾸러져서 하는 말입니다. 그 말의 요체가 오늘 성경 본문에 나와 있었습니다. 나는 평생 동안 내가 펴 온 철학과 내가 펴 온 율법과 내가 아는 하나님과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것은 율법에서 나오는 우리가 만든 이념 체제에서 나오는 신학 체계에서 나오는 나 자신의 의가 항상 옳은 줄 알았습니다.

나 자신의 의가 내 속에 있는 의가 모든 것의 본분이었고 모든 것의 출발 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를 보고 난 나는 지금 제가 완전히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이웃에게는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너무도 이기적이었습니다. 나 혼자만의 의를 구하다가 내 의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의를 제가 핍박을 했고 잘못을 했습니다. 의는 나의 속에서 나오는 의가 아니라 내가 아닌 전혀 다른 분,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저한테 심판으로 오는 은혜로 오는 내가 관여할 수 없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의만이 진실 된 의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유는 내가 만든 의 가지고 살아봤더니 제가 죽음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의는 죽은 다음에 부활을 통해서 나한테 생명을 주십디다.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의처럼 예수그리스도 똑같이 죽었지만 우리가 죽인 그래서 죽은 예수그리스도는 죽음을 뚫고 부활이 열릴만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합디다.

내 의는 만들 수 없는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이 만들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을 저는 예수에게서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결단했습니다. 나만 옳다고 하는 의는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 저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시기로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 아무리 옳다고 믿어본들 그 의는 여러분의 생명을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것 버리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의를 여러분의 바탕으로 삼으십시오. 이 말씀을 사실은 오늘 예수께서 베드로 보고 하신 말씀.

네가 나를 주 예수 그리스도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 너의 고백 속에 반석이 되어 내 교회도 세우고 너한테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 교회를 세운다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도바울은 네 인생의 바탕을 내가 옳다고 내 학문과 내 지혜와 내 이성과 내 모든 것을 가지고 내가 바탕을 삼았더니 주는 홍수가 날 때 죽음이 올 때 저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저를 살려줄 사람은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도바울이 말하는 반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반석이 뭐냐 하면 베드로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반석은 하나님의 의인데 베드로의 말을 빌면 예수그리스도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아들이지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계신 하나님 죽었다가도 살고 죽음도 바꾸시고 영원한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 그분을 내가 반석으로 하면 내 죽음도 예수그리스도 위에 반석삼아 죽음도 가져다 놓겠습니다.

내 죽음도 당신이 생명으로 바꿔 주소서. 이 사실을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으키게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반석 얘기는 예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받은 고백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드냐. 여러 사람들이 세례요한이 다시 왔다고 합디다. 예언자 중에 하나 엘리사라고 합디다. 혹시 어떤 사람은 모세라고 합디다. 이렇게 말할 때 베드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예수께서 네가 바로 삶의 반석을 제대로 보았다. 네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보면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십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 그리스도 쉽게 말씀합니다만 주님이란 구약에 나와 있는 모든 하나님 이야기 여호와, 야훼의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직접 이름을 부를 수가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주인양반 그렇게 부르기로 했습니다.

주인양반, 주님 그러면 그 말은 곧 하나님 야훼를 의미했습니다. 주인양반. 그게 뭐냐. 아도나일. 그게 주인양반입니다. 그 주님이란 말이 헬라어 성경 때 희랍말로 번역 되면서 퀴리어스란 말로 번역 됐습니다.

그 퀴리어스란 말을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 그렇게 번역을 합니다. 주님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 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일으켰던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영원불변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분을 우리가 주님 그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부를 때 당신만이 모든 것의 출처시고 당신만이 생명이시고 당신만이 반석이십니다. 주님. 하나님. 그리스도는 누구냐 몇 번 설교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분은 반드시 누군가를 우리 땅에 보냈는데 우리 백성을 몽땅 구원해 줄 누군가가 우리한테 오실 거라 믿었습니다.

그분이 메시아란 사람입니다. 히브리말로 메시아 그러면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인데 메시아란 말을 헬라 말로 번역했더니 그리스도.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같은 분. 여호와 하나님이나 주님이 같은 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늘 우리한테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 당신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오늘 그리스도 안에 계십니다. 그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분이 우리의 반석입니다. 그분한테 나오는 의가 우리의 삶을 살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반석을 다른데서 구하지 마십시오.

내 의는 반석일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는 반석일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반석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오늘 우리가 다시 한 번 우리 신앙과 우리의 삶의 반석을 차지할 날이 왔습니다. 이 세상에 갈등이 어디서 생깁니까?

사람마다 민족마다 집단마다 자기의 의가 중요합니다. 서구나 동구나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자기의 의가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지배하고 있습니다. 다시 우리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일상생활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책을 하나 읽었더니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씀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다고 합니다. 아마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갈등할 때 그렇게 쓰나본데 시어머니도 하나님 믿고 며느리도 하나님 믿으면 시어머니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입니까 며느리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입니까?

장로교 하나님이 진짜입니까 천주교 하나님이 진짜입니까? 제가 생각하다가 이 둘 사이에는 분명히 한 가족인데 며느리와 시어머리를 묶어줄 반석인 공감대는 뭘까. 안방의 하나님 부엌의 하나님. 안방의 교회 부엌의 교회. 누구의 의가 옳을까? 안방이든 부엌이든 시어머니든 며느리든 그건 둘이 이룬 가정이고 그 가정을 이룬 근본적인 반석은 뭘까 생각했습니다.

아까 드린 말씀을 이렇게 수정하고 싶습니다. 안방에 가면 며느리를 사랑하는 시어머니의 말씀이 옳고 부엌에 가면 시어머니를 공경하는 며느리 말이 옳습니다. 틀립니까? 누구 말이 옳으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공경해야 합니다.

사랑과 공경이 없이 누구 말이 옳다고 하는 것은 편파적이고 갈등만 일으킬 뿐 공감대가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녀들아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들아 자녀를 사랑하라.

그 두 가지의 바탕이 하나님의 가슴속에 있느니라. 그 가슴은 예수그리스도에게 나타났고 예수그리스도는 오늘 십자가라 이름 하는 반석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십자가에 오면 안방에 가도 옳고 부엌에 가도 옳습니다. 왜 십자가를 떠나서 시어머니의 의만 가지고 며느리의 의만 가지고 누가 옳다고 하십니까? 오늘 둘은 하나님의 가슴속에서 한 가정을 이루고 삽니다.

그 가정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살아계신 아들로서 우리한테 역사해 주십니다. 나를 반석 삼아 가정을 이루시오. 나를 반석 삼아 평화를 이루시오. 나를 반석 삼아 그대들은 자유를 한껏 누리시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아 내가 십자가를 통해서 그대들에게 죽고 부활을 주었더니 십자가에서 반석 삼으면 아무 염려가 없느니라. 하나님 말씀입니다. 네 의로 선포하는 게 아니라 내 의를 네 입술을 통해서 선포하게 하노라.

우리 모든 사람이 약하고 힘이 없습니다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예레미야처럼 고백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권위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선포해라. 평화를 이루어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라.

자신 있게 이루어라. 십자가가 반석이니라. 십자가의 아픔 그 속에서 부활이 움터납니다. 우리가 오늘 이 사실을 십자가 위에서 다시 찾아봅시다.

그리고 평화를 이룹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