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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우리를? (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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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기에>
영국인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 1886-1924)는 1920년대에 세 번씩이나 에베레스트 산 등정을 시도했던 유명한 산악인이었습니다. 1924년 6월, 세 번째 등반을 시도했을 때 에베레스트 정상 약 600미터 아래에서 실종되었습니다. 만일 말로리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뒤 내려오다가 사고를 당했다면, 1925년 5월에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던 에드먼드 힐라리보다 1년 앞서 에베레스트에 오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말로리의 시신은 실종된 지 75년만인 1999년에 가서야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말로리가 에베레스트 등정을 마치고 하산 길에 변을 당했는지, 아니면 정상 정복을 불과 몇 백 미터 앞에 두고 사고를 당했는지는 아직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로리가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당신은 왜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그 위험천만한 산에 올라갑니까?" 뉴욕에서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을 때 말로리가 대답한 말은 너무도 간단했습니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갑니다"(Because it is there).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냥 갑니다." 참, 천하의 명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험악하기 짝이 없는 고산준령(高山峻峰)을 넘다 보면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실제로 에베레스트 산을 비롯한 험준한 산에 오르려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을 지도 모르는, 그 위험한 산에 그냥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올라갑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의료와 구제 활동을 벌이던 샘물 교회 소속 젊은이 23명이 텔레반 반군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그러잖아도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모든 책임을 기독교에 전가시키고 있습니다. 위험한 지역이라고 정부가 여러 차례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곳에 갔느냐고 비난합니다. 한국 내에도 봉사할 곳이 많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왜 굳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위험 지역에 들어가 국민들을 불안케 하느냐고 공격합니다. 언뜻 보면 그럴듯한 비판인 것처럼 보이지만 대개 일방적인 매도에 가깝습니다.

여러분, 왜 그 꽃다운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사지(死地)로 갔을까요? 말로리가 그 위험한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려는 이유에 대해서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간다고 대답한 것처럼, 아프가니스탄에도 구원을 필요로 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기 때문에 간 것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지 선교지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곳은 지역이나 인종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지 다 가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선교 정신이지요. 바로 이런 정신 때문에 쇄국 정책을 써서 나라 문이 굳게 잠겨, 아직 모든 것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조선 반도에 서양 선교사님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지난날을 돌아보면 기독교 선교가 아주 안전하고 순탄한 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때로 목숨을 걸고, 또 실제로 많은 순교가 이루어진 다음에 선교의 문이 열린 지역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쉽게 안전 위주로만 선교하라는 주문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많은 수고와 불편과 고난과 핍박, 심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왜 23명의 형제 자매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갔느냐가 아니라, 그들을 구해내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하여, 선한 동기와 순수한 열정 하나로 갔을 뿐입니다. 하등의 악한 의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 모두 22명의 젊은이들이 우리 곁에 속히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인솔자인 배형규 목사님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배 목사님은 공교롭게도 자신의 42 번째 생일날인 25일에 피살되어서 온 국민을 슬프게 했습니다. 배 목사님은 봉사를 위해서 타고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이웃을 위해서 많은 선한 일들을 했다고 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항상 뭔가 도움을 주려고 했답니다. 어렵게 목회하는 친구 목사를 보고서는 주머니에 쌈짓돈을 찔러 넣어 준 적도 있었답니다. 환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 배목사님의 사진을 보면 누구라도 선량한 분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을 닮아서인지 사모님 역시 얼마 전 백혈병에 걸린 사람을 위해 골수 이식을 했고 이름이라도 알려달라는 환자에게 끝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유족들은 배목사님의 시신마저도 서울대 병원에 기증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어제 뉴스를 들으니 배목사님의 시신 운구는 모든 인질들이 전원 풀려난 뒤, 맨 마지막으로 와야한다는 것이 유족들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분당에 빈소를 설치하는 것도 취소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피랍자들을 석방시키는 일에 모든 관심과 노력이 집중돼야 할 때라는 유족들의 아름다운 정신 때문이지요.
 
이렇게 훌륭한 목사님을 살해한 텔레반의 소행은 그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제 피해는 이것으로 그치고 더 이상의 아픔이 없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22명의 형제 자매들 전원이 하루 빨리 풀려나기를 다시 한번 기원해 봅니다.

<그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 주변에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퍼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러 갔으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지 이렇게 텔레반 무장 세력에게 납치되도록 방치하실 수 있느냐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번 봉사단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에 간 배형규 목사님은 하나님의 종일뿐더러 이웃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하신 분인데 그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있느냐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환난이나 역경보다도 강하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 어떤 환난과 역경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편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지요. 31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하고 가정법(IF)을 내세웁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편이 되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바울 사도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감히 그 '누가'(WHO)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31절 후반부)
32절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이요 전부가 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를 위하여 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아끼시겠습니까?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텔레반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고, 그들의 그 어떤 죽음의 위협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왜요? 자기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고발하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33절).
먼저 33절을 보세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러쿵저러쿵 고발할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34절도 보세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러쿵저러쿵 정죄할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이번에 피랍된 단기 선교팀을 놓고 이들을 고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개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지요. 왜 무모하게 그 위험 지역에 들어가서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드냐고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방송 매체에 고발하고 있습니다. 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좀 더 해외 봉사 활동을 치밀하게 지도하고 관리하지 못했느냐고 지도자들의 책임을 고발합니다. 또한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선교 정신으로 선교 현지에 들어가서 반발심을 사서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는 고발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과도한 선교 경쟁심 때문에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고 쉽게 정죄합니다.

그러나 의롭다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데 감히 누가 그들을 고발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간 것이 의로운지 의롭지 못한지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판단하실 수 있기에 아무도 그들을 고발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중보 기도하시기에 우리 역시 허물이 많고 실수가 많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함부로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일부 몰지각한 국민들 가운데에는 향락을 위해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에 나가 추태를 부려서 국가적 위신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왜 그런 이들에 대해서는 고발하고 정죄하는 일에 인색하고 해외에 나가 선교하고 봉사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는 열을 올리며 비난합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한, 그 누구도 우리를 함부로 고발하거나 정죄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우리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35-39절). 
제가 볼 때 35-39절이 가장 중요하고 또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35절을 보세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이지요! 사도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가능성이 있는, 일체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들을 하나 둘 열거합니다.

'환난'(hardship)입니까? 대답은 'NO'입니다. 그러면 '곤고'(distress)입니까? 困苦, 피곤하고 고생스러운 것이지요. 대답은 역시 'NO'입니다. 그러면 '박해'(persecution)입니까? 대답은 역시 'NO'이지요. '기근'(famine), 즉 굶주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적신'(赤身, nakedness), 즉 벌거숭이 몸으로 헐벗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위험'(peril)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칼'(sword)입니까? 'NO'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이나 그 어떤 불행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고통이나 불행을 당할 때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편도 아니시고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무기력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했다는 느낌을 토로한 시 44편 기자의 말씀을 본문 36절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도살당할 양과 같이,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끝났구나, 꼼짝없이 죽었구나, 탄식하고 절망할 순간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처절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여전히 감싸고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37절을 보세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 어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일들이 우리 주변에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결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로 다 이기고도 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은 인간적인 것들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까지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38-39절을 보세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 보세요. 사망이나 생명은 우리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고 나는 것이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죽음도 삶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결코 끊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신령한 천사들도 땅 위에 있는 최고의 권력을 한 손에 쥔 권세자들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합니다. 공중과 땅에 권세 쥔 자들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또한 시간적으로 현재 아무리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장래에 아무리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끊지 못하는 것은 이와 같이 시간적인 영역만이 아닙니다. 공간적인 영역, 즉 높음이나 깊음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밖에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도 삶도, 하늘에 최고 권세 가진 천사들이나 땅에 최고 권력을 잡은 권세자들도, 시간적으로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공간적으로 저 하늘 높이 있는 것도 저 땅과 바다 속 깊이 있는 것들도, 사람이나 동물, 식물, 등을 비롯한 모든 우주 만물, 즉 일체의 피조물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아, 얼마나 위대한 고백인지요!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요! 여러분, 우리가 곧 죽을 것만 같고 온 우주가 다 끝장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과 그 현장도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모든 장벽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지요!

텔레반에 피랍된 22명의 형제 자매들은 현재 3중고의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과 '건강 악화'와 '끝없는 살해 위협'입니다. 이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지역은 해발 2천 미터나 되는 고산 지대로서 기온도 매일 섭씨 40-50도를 오르내린다고 합니다. 게다가 산악 지역의 동굴과 같이 밀폐된 곳에 갇혀 있을 경우,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야생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몇 사람은 건강이 안 좋은데다가 아무리 튼튼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금방 병이 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합니다. 아프간 정부군의 포위로 물품 보급로가 차단돼 음식과 약품이 부족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심한 공포와 스트레스는 역시 살해 위협입니다. 텔레반이 원하는 대로 협상이 진전되지 않을 경우, 툭하면 전원 살해하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심지어 배목사님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일부 인질들의 공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절망적이고 참담한 환경에 놓여 있는 이들은 하나님이 혹시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고 한다면 왜 그들을 속히 구출해내시지 않는가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아끼고 존경했던 배형규 목사님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울부짖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극한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오늘 우리는 위대한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23명의 형제 자매들이 인질로 붙들려 엄청난 고통과 불행을 당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방기'(放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그 현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역사(役事)하고 있기에 우리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악과 고통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악과 고통이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이길 수는 없다는 확신입니다!

<'WHO'? 'NOTHING'!>
이제 저는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두 가지 실화를 말씀드리고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뉴욕 경찰국에 근무하는 순경가운데 믿음 좋고 착한, 마크(Mark)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쌍둥이 빌딩 세계 무역회관이 무너지던 날, 때마침 근무를 서고 있었습니다. 불타는 건물에서 잔해가 비 오듯이 떨어지는 한 가운데 마크는 구경꾼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큰 물체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마크가 쳐다보니까 사람의 몸체가 공중에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하늘을 쳐다보니까 그 사람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서 사방에서 빌딩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마크는 하늘에서 무방비 상태로 떨어지는 불덩이 파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무역 회관 밑으로 뛰어갔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하늘에서 땅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외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크는 이제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땅바닥에 부딪혀 죽게 될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도록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착한 사람들이 아무 죄 없이 죽어 가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이지요! 테러도, 미움도, 폭력도, 죽음도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없음을 외쳤던 것이지요!

또 한 가지, 미국 개신교회에서는 카톨릭 교회와 마찬가지로 견진성사(堅振聖事, Confirmation)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들이 초등학교 5-6학년이 되면 한 1년 정도 신앙 교육을 시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진짜 신앙을 자발적으로 고백하도록 이끄는 프로그램이지요. 미국의 한 교회에서 견진성사 과정이 다 끝난 뒤 가족 친지들을 초청해 놓고서는 선생님이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조지(George), 너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것이 무엇이니?" 조지가 오늘 읽은 말씀 롬 8: 38-9에 있는 말씀을 다 외워서 확신에 찬 대답을 했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저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지가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을 마치자, 부모님과 가족들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다음에 메어리(Mary)에게, 피터(Peter)에게, 앤드류(Andrew)에게, 그레이스(Grace)에게 차례로 똑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다들 잘 암기해서 또박또박 대답을 잘 해줬습니다. 모두 다 'Confirmation' 클래스를 아주 훌륭하게 이수했던 것이지요!

아, 그런데 마지막으로 레이철(Rachel)이라는 아이 하나가 남게 되었데 이 아이가 문제였습니다. 이 아이는 'Down's Syndrome'이라는 병을 앓는 정신지체아였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였지요. 드디어 이 아이 차례가 되었을 때 선생님과 친구들, 학부모들 전체가 긴장하며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저 아이가 롬 8: 38-9에 있는 그 긴 말씀을 다 암기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의심했기 때문이었지요. 

  긴장감이 넘치는 가운데 드디어 선생님이 레이철에게 물었습니다. "레이철, 무엇이 너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게 될까?" 레이철이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대답했습니다.  "Nothing!" "아무것도 없어요!" 너무도 간단하게, 아무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 대답을 듣고 목사님도 선생님도 온 성도님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Nothing!" 이보다 더 간단하고 더 분명한 대답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옳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텔레반 무장 세력에 인질로 잡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22명의 형제 자매들과, 무엇보다도 고귀한 목숨을 잃은 고(故) 배형규 목사님의 죽음을 생각하며, 'NOTHING!,'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믿고 용기와 소망을 잃지 맙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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