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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바다에 던지라 (욘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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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나라는 지중해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계속가면 지중해의 끝이 나오는데 스페인의 카디스(Cadiz)라는 항구 도시가 나옵니다. 바로 이곳이 요나가 도망가려고 배를 타고 향했던 다시스입니다. 스페인은 한 때 세계무대에서 가장 화려하고 강력했던 나라로서 그 결과 지금도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영어권 나라만큼이나 많습니다. 중남미 23개국은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카디스, 즉 다시스는 누구나 한번 가보고 싶어 하는 유명한 관광지였다고 합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그곳으로 도망가려고 배를 탄 것입니다. 배만 잘 가주었으면 다시스 구경을 한 뻔 했는데 오늘 말씀에는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머리를 써서 계획한 모든 일이 고약하게 꼬이고 말았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앙생활에서 제일 갈등스러워하는 부분이 나의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의 차이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것은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원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늘 기도생활을 합니다. 기도 생활을 하지 않는 분들도 계시지만 사실 그런 분들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기도 해택을 받고 있습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려는 인간의 가장 고상한 노력이라고 해석하는데, 많은 기도를 드리고 나서 내 소원을 말합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다시스로 향하는 길에서 요나에게 발생한 이 말씀의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것을 살펴봄으로 신앙생활에 도움을 얻고자 합니다. 먼저,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사람은 숨는 행위부터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라고 했습니다. 배의 좌석도 등급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이 타는 장소와 적게 내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가 다릅니다. 옛날의 배 맨 밑층은 노예들이 노를 젓기 위해 있는 곳이었고 근대에는 노동자들이 석탄 연료를 때서 배를 움직여나갔고, 오늘에서는 짐칸으로 사용합니다. 요나가 왜 그곳으로 내려갔는가? 숨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가는 길이므로 될 수 있는 한 자기 얼굴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 인간은 창세기 에덴동산에서부터 똑같이 나타납니다. 창세기 3장 8절에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숨는 자를 어떻게 하시는가? 찾아내십니다. 아무리 깊이 숨어도 소용없습니다. 찾고야 맙니다.

미국에는 헬리콥터로 범인을 잡는 방법이 발달해 있어서 사건이 터졌다 하면 5분 안에 헬리콥터가 뜹니다. 밤 12시가 넘었는데 저희 집 주변에서 요란한 헬리콥터 소리 때문에 저도 잠이 깨었습니다. 약 3시간 정도 범인을 잡기 위해 작전을 펼치는데 그 시간에 저희 아들도 직장에서 늦게 일하다가 집 앞 약 50미터 밖에서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2시간 동안 묶여 있었습니다. 경찰이 길목을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헬리콥터에서 마이크로 계속 말을 합니다. “너는 완전 포위되었다. 네가 어디 있는지 다 내려다보고 있다. 손을 들고 항목하지 않으면 네 생명은 위험하다. 총을 발사하겠다.”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숨어봤자 위에서 빤히 내려다보고 있으니 숨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유치원 어린이들이 숨바꼭질이라는 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열심히 숨습니다. 이 때 어린 아이들은 숨는 것이 머리통만 숨으면 되는 줄 압니다. 이불 속에 머리만 숨기고 궁둥이 하늘로 뻗치고 숨었다고 합니다. 제 눈만 감으면 남도 못 보는 줄 알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이런 식으로 산다는 겁니다. 아담도 요나도 이런 식으로 숨은 겁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 그런대로 인간은 끊임없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거역이 역사 현장에 대풍을 일으키셨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여러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훌륭한 해석은 “잘못 가는 하나님 역사의 수정”입니다. 요나가 관광여객선을 타고 스페인의 다시스 휴양지로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잘못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배가 가지 못하도록 심판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이 요나를 죽이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못살게 군다듣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요나를 요나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요나서 마지막 절에 보면 니느웨성의 도시 인구가 나타납니다. 12만 명이라고 했습니다. 요나 한 사람에게 12만 명의 영혼이 달려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하다는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업 선언하신 설교인데, “12만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일이 얼마나 큰 구원 역사인데 너는 이것을 버리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  잘못 가는 하나님 구원 역사의 수정! 그래서 대풍을 내렸습니다. 아마 그 배가 순조롭게 다시스 항구에 도착했다면 요나는 그 곳에 내려 구경만 잘 하고 남의 나라에서 혼자 살아남기 위해 그럭저럭 굴러다니며 생계유지를 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풍을 일으켜 그 길을 가지 못하게 하시므로 12만의 영혼은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적 사건 앞에서 모든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이 오늘 말씀에 조명되고 있습니다.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라고 했습니다. 초월적 신을 다 불렀다고 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간사하고 교만해서 가끔 까불 때가 있습니다. 내 주변이 조금만 튼튼해져도 생각이 교만해져서 딴 소리를 합니다. 저는 모스코바에 처음 갔을 때 최초의 우주인인 러시아의 영웅 유리가가린 동상을 봤습니다. 그가 인류 최초의 우주인으로 많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강연을 할 때 정책적으로 말했습니다. 그 때는 소련이 무신론 사상을 굉장히 강조하던 때로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하는, 그래서 러시아의 무신론 사상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려고 하는데 유리가가린은 “나는 하늘을 온통 다녀보고 찾아보았으나 하나님은 없더라.”라고 말했습니다. 6개월 만에 그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러시아인들의 영혼을 깨우는 작업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러시아에 처음 가서 들은 소리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람 한번 세게 부니까 사람들이 초월적 힘을 바라고 각각 자기 신을 부릅니다. 대한민국은 지진이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공포가 없는데, 저는 지진대 지역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육신적으로 좀 고난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은 사실인데, 저는 영적으로 보면 가끔 흔들어야 합니다. 흔드는 나라는 교회 많이 나옵니다. 새벽 기도 다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끔 흔들어나야 되고 바람도 세게 불어서 좀 뒤집고 그래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평온하고 자기 주변이 튼튼하면 그러면 하나님을 안 찾습니다. 그렇게 위기가 닥칠 때 영혼이 깨어나는 힘은 아주 강하도록 그렇게 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어떤 심판적 역사는 그런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탄 배의 선장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타나는데 요나에게 급히 요청합니다.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러고 나서 그들은 이 같은 재앙적 사건을 인간에 대한 신의 진노라고 믿게 됩니다.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나서는데 제비를 뽑아서 신의 진노를 일으킨 범인을 가려내 처벌하므로 신의 진노를 피하고자 하는 방법을 모색해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수 없는 피조물임을 증명합니다. 욥바에서 다시스까지 가는 여객선이 오늘 처음 그 길을 가겠습니까? 수백 번 수천 번 그 길을 오고갔을 것이며 오늘 처음 그런 바람을 만났겠습니까? 여러 가지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때를 만날 때 하나님의 절대적 도움이 필요한 인간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배는 어떻게 견고하고 만들어졌는지 하나님도 침몰시키지 못한다고 장담하고 떠난 타이타닉호가 향해한지 이틀 만에 전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해상 사고를 내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우리는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까지 불이익이 미치게 된다는 조명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배는 여객선입니다. 휴가를 맞아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고 사업상 가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요나 때문에 망했습니다.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피난민이면서도 전쟁에 매우 강해 광야에서 수없이 만나는 종족들의 전쟁마다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서도 작은 몫에 속하는 문젯거리도 안 되는 아이성 전쟁에 참패를 당해서 많이 죽었습니다. 이유를 하나님께 물었을 때 “너희 중에 하나가 내 뜻을 거르렸느리라. 아간이 도둑질했기 때문이다.” 이 하나의 거역이 전체에게 오는 불행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요나에게 사람들이 다그쳐 네 가지를 묻습니다. 너의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이냐? 이제 요나는 꼼짝없이 범인으로 잡혔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요나는 하나님 없는 자유를 누려보려고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요나의 몸부림은 인류의 몸부림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어제도 오늘도 될 수만 있으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살아보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합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이러한 시도가 시작되어 계속되어 왔습니다. 이제 요나는 자신의 갈 길을 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결정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어떻게 요나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인간은 결국 더 이상 갈 길이 없어지는 마지막 지점에서야 항복합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라.” 이 말은 이제 나에게는 이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면 멀쩡한 정신의 건강한 사람을 바다에 던졌다는 것은 이제 모든 일이 끝났다는 의미, 즉 죽는다는 것인데 요나서의 성경은 그 시각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나서의 하나님 구원 역사의 기적 창출은 즉,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 두 가지의 인간 편에서의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기적 창출이 일어났는가? 하나는,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라’ 하는 책임 있는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은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우리들 자신이나 세상 사람들이나 누구나 똑같은 불행이 있습니다. 어떤 괴로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책임은 이웃에게 있고 나는 언제나 공로의 인정과 찬양만을 받고 싶어 하는 이기적 욕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론 이러한 변명은 잠시 동안 나에게 다소 유익하기도 하고 효과를 보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는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든 죄를 내가 진다는 것입니다. 중국 말 가운데 제일 거룩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누구를 가장 거룩하게 보는가? “자기 잘못을 자신이 품고 가는 사람을 대인이라고 말하고 남의 잘못을 자신이 품고 가는 사람을 신이라고 부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소한 내가 잘못한 일이라면 내가 안고 무덤까지 가야지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바다에 던질 수 있는 책임 있는 바로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창출되는 지점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역사의 기적 창출은 내 죄 값은 내가 지겠다는 뜻, 이것은 죽어도 좋다는 행위입니다. 평가를 해 본다면 그래도 요나는 하나님의 종이고 큰 인물입니다. 사실 그가 바다에 던져질 이유는 객관적으로 전혀 없습니다. 영적으로 있는 것이지 요나가 무엇을 잘못 했습니까? 그런데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옛날에 반일 감정으로 만들어진 유머가 있었습니다. “세계인 타고 가는 배가 있었는데 파선이 되어서 무게를 줄어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선장이 우리 중에 누군가 세 사람만이 바다에 빠져죽으면 나머지는 살 수가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희생되어야 삽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죽어주겠소? 선장이 말을 하자마자 영국 청년이 첫 번째로 ‘신사의 나라 영국이여! 영원하라.’하고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두 번째로 미국 청년이 나와서 ‘신의 축복을 미국에!’하면서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한국 사람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이여! 꽃을 피워라’하면서 옆에 서있는 일본 사람을 걷어차서 집어넣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던지기 좋아합니다.

요나서가 있는 것은 “나를 바다에 던지라.”라는 말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던졌더니 니느웨의 12만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신을 던졌을 때 인류의 구원이 거기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나를 던지는 그 지점이 하나님의 기적 창출의 역사입니다. 요나서는 구약의 복음서입니다. 유대니즘에 사로잡힌 유대교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자신들의 독점 소유로 만들어 유대인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국수주의 사상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온 인류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니느웨성 구원이 요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 구원의 하나님의 영적 사건이라고 해석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요나서의 신학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장 강조를 두고 말씀하신 인류 구원에 대한 신학적 믿음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성경 말씀의 상황을 영적인 의미가 아닌 사회학적인 상황으로 설명을 해보면, 요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입니다. 배에 타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죄가 없습니다. 또한 사람들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요나는 도둑놈도, 사기꾼도 아니고 살인자도 아닙니다. 다시스로 가는 여객선에 정확한 요금을 지불하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행객일 뿐입니다. 배에 탄 다른 사람들에게 요나는 얼마든지 항변할 수 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네들이 무슨 증거로 나를 바다에 던지단 말이요. 내가 죽을 무슨 죄가 있는지 말해보시오. 세상에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제비 뽑아서 죽이는 법도 있단 말이요!”

그러면 왜 요나는 자신을 던지라고 했는가? 이 문제는 요나 자신의 신앙 고백이요, 양심선언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모든 일을 보는 신앙적 결단입니다.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지자로 앗수르 니느웨로 가라 하셨는데 내가 반대로 가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그 길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나를 빨리 바다에 던지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사십시오. 아름다운 다시스에 가서 행복한 시간을 가지십시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줍니다.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기독교 이웃사랑의 실천을 보여줍니다. 때로 우리는 어떤 사건에 나는 희생자라고 말을 하게 됩니다. 나는 옳았는데 다른 이웃의 잘못이 나를 희생시킨 것이라고 결백을 주장합니다. 여기서 요나는 자신의 희생을 선택한 것입니다. 공동체와 나입니다. 공동체와 나는 함께 죽느냐? 나는 죽고 공동체는 살아야합니다.

예수는 죽고 인류는 살아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고 그 공동체는 모두 살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요나서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한다면 우리의 삶에서도 그런 길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발전하고 교회가 이렇게 번영했다는 것은 누군가가가 자신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나의 소행으로 이웃에게 가는 피해는 막으면서 살고 이웃에게 죄는 없지만 영적으로 나의 희생이 필요한 때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하고 나의 희생을 통해 공동체가 산다면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죽고자 했던 요나와 예수님을 생각해봅시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 3일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무덤 속에서 3일을 있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그것으로 끝났는가? 아닙니다. “죽으면 살리라.” 요나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니느웨 선교사로 12만의 영혼을 구원하는 대사역자가 되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대심판주가 되시는 우편의 권세를 차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네가 죽지는 말아라. 내가 죽고 네가 살아라. 죄는 내게 있소. 나를 바다에 던지시오.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 내가 아노라.” 우리가 이 말씀을 신앙의 기초로 삶을 창조해 나간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이렇게 믿으시는 분들은 아멘 하십시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요나 사건 속에 나타난 복음의 진리성이 무엇인가? 저의 영혼이 깨우쳐 잘 깨달아서 우리 삶 과정에서 작은 일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던지지 말고 내가 먼저 던짐을 받는 십자가 정신에서 우리의 삶을 조명해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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