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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히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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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본문 : 히브리서12:1-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 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3)

  아프가니스탄에서 의료봉사로 선교하기 위해 떠난, 샘물교회 청년중심의 봉사원들과 현지 선교사를 포함한 23명이, 탈레반 무장 이슬람 정치단체에 인질로 납치되는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탈레반은 1994년 10월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주(州)에서 결성된 무장 이슬람 정치단체입니다. 그들은 이슬람공화국건설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과도정부 수립 및 이슬람공화국 선포, 급진적 이슬람정책 수행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한국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한국인 인질들 모두를 살해 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그 밖에도 많은 것을 한국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 인솔자인 배형규 목사님은 죽음이 정확이 확인되지 못했지만 머리 가슴 복부에 6-8발의 총상을 가진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남은 22명의 생명도 어떻게 될 지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피랍 10일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납치범들은 사막과 산악지대로 인질을 끌고 다닌다고 합니다.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극도의 공포 속에 떨고 있을 그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CBS방송은 남자 인질 한 명이 아파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밤에는 춥고 낮에는 40도가 넘는 폭염의 찜통 같은 더위, 마실 물조차 제대로 없는 그곳에서, 그들은 하루하루를 고통의 나날로 보내고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26일 육성이 공개된 피랍자 가운데 한명인 임현주 씨는 “22명이 모두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이들의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그들에게는 고통과 함께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가 더욱 큰 두려움 일 것입니다. 가족들은 물론 온 국민의 가슴도 찢어질 듯 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번 사건에 크게 당혹해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혹 선교의 방법이 미숙함과 잘못이 있을지라도 그래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꼭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할 만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회의감에 빠지는 우리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더욱 큰 당혹감은 복음 선교와 그리스도 사랑을 전하는데 대한 오해와 함께 만들어지는 저항입니다. 인터넷에 오른 글 하나를 소개해 봅니다.
  “................... , 샘물교회의 찌질이들이 유서까지 써가며 정부에서 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취소 경고조치했는데 역으로 소송까지 걸겠다며 갔는데 왜 그런 찌질이들을 살리려고 생각하는 것조차 문제인거죠....... 샘물교회 자체에서는 기도만 하고 있는 데, 떠날 때 ‘우리의 목숨이 사라지면 하나님이 데려간 것이다’ 라고 하고선 이제 와서 살려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으니 문제인거죠...

탈레반과의 전화한통 연결하는데 10만달러가 든다고 합니다. 23명 살리려고 아무 연관도 없는 국민들의 세금이 날라 가고 있는 것이죠.

이런 말을 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그러죠.. ‘너나 니 가족들이 이 상황이면 그렇게 말하겠냐고...’, 하지만 저는 이런 경우를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우리 가족들을 비록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은 이딴 되도 않는 엄한행동은 하지 않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제 생각과 반대되는 사람이 오히려 적죠...
정부에서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하니, 소송 건다 어쩐다 하며 유서까지 써가며, 경고표지판에서 손가락 두개 세우며 브이자 그리며 우롱하는 사진이나 찍어대는 사람이..... ,
.......................................................

인질분들 차라리 거기서 죽으면 불쌍하단 말이라도 들을테죠... , 살아 돌아오더라도 돌 맞아 죽는데, 뭐 하러 그리 살려 달라 하는 건지...  ,죽으러 간다며 유서까지 썼으면 깔끔하게 알아서들 뒈지는게 현명한거 아닌가요?  봉사활동이라고 보기 좋은 말로 방송에서 떠들어 대는데.... , 웃기는 일이죠...  몇몇 증거사진으로는 선교활동 선교단이라는 단어를 마구 비춰주는데 말이죠....  순수한 봉사라면 인질 되고 불쌍하기라도 할 텐데, 교회 알리러 간 선교... ,  거의 놀러간 수준이지만....  그러고 잡히고선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은지... ,

  내가 만약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탈레반측에서 인질들 교환조건으로 자기네들 지도자급 포로들을 풀어달라는데.... , 그 포로들 머리에 총 겨누고 역으로 인질들 안 풀면 바로 사살하겠다고 강하게 나갈 텐데.... ,  뭐 인질 안 풀면 바로바로 머리통에 바람구멍 뚫어주는 모습 보여주고..... , 흐지부지한 우리나라 정부.... , 일개 교단 샘물 찌질교회에게 소송 걸린다는 협박성 내용에 그 딴 나라로 휴가 떠나게 만든 것부터가 가장 문제인거죠.... ”

  우리는 이 글의 정당성을 전적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사랑을 나누고자 희생하고자 했던 젊은이들을 모욕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기독교인에게 불쾌감을 가지게 하는 글임에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이 글이 우리 시대의 교회현실과 교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느낌을 보게 하기에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질문해 봅니다. 세상으로부터 교회가 얼마나 많은 불신을 당하고 있는가? 선교나 봉사활동이 이렇게 왜곡되어 보이고, 세인들로부터 오해되어 있는가? 반면에 많은 부분에서 우리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됨이 있지는 않는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 생명을 주는 값진 진리의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나라 실현으로 인류의 축복을 갈망하시는 예수님의 뜨거운 마음이 잘못 전해지고 있다는 아픔을 느끼게도 됩니다.   
  주님이 모욕당하고 무시당하는 것 같아 무거워지는 마음, 그리고 믿음이 흔들리는 것 같은 답답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히브리서의 말씀가운데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십니다. 새 번역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님의 무엇을, 그리고 왜 바라보라고 하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셔서 십자가를 참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치욕과 고통을 참으시면서 그 치욕과 고통 다음에 다가오고 있는 기쁨의 세계를 내다보면서 참으신 바로 그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인류구원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역사이고, 뿐 만 아니라 하나님(아버지) 곁으로 되돌아가시는 영광으로의 길임을 알기에 십자가를 참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 저자는 이 말씀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조롱하며 모욕하며 수치스럽게 하는 모든 자들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바로 이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삶과 역사를 조롱하고 우리에게 아픔을 안겨주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처럼 참고 인내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조롱과 아픔과 고통 후에 다가오는 기쁨의 역사가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역사를 믿는 믿음이 있기에 인내로서 참으면서 승리를 바라보는 운동경주자처럼 신앙의 경주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던져진 생을 산다’고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어려움과 고난 속에 던져진 생을 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찾아오는 고통스러운 고난의 과제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한 부분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난의 고통을 어떻게 맞이하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고난은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을 척도 하게 합니다. 고난은 피해 가는 것이기보다는 직면하여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유 있는 고난보다는 그 이유를 인지할 수 없는 고난이 더 많이 있습니다. 내가 범죄하고 잘못하여 실수함으로 찾아오는 고난은 그 원인에 의한 결과로 만들어진 이유 있는 고난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고난은 그 원인을 바로 고침으로 극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도 있습니다. 나는 교통법규를 잘 지키며 운전했는데 다른 사람이 운전을 잘못해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쁜 사람이 잘 사는데 그래도 바르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을 봅니다.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사람도 건강하게 살아가는데 이런 것을 금하고 건강을 관리하며 깨끗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중병을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타당성에 대하여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난의 고통을 겪을 때에 “왜일까?” 라고 질문하기보다는 “대체 그럴 수가 있을까?” 고 회의하게 되고 원망하게 됩니다. 고난의 의미와 가치를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고난을 고통으로만 여기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에서 고난이 주는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때에, 그 고난은 우리 인생을 아름답고 복되게 하는 자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프카니스탄에 의료선교를 위해 단으로 봉사단으로 참여한 젊은이들은 그곳 사람들에게 신앙적 갈등을 만들어 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한 것뿐입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을 인질로의 납치한 것은 종교적 적대감이나 현지문화에 대한 이해차이에서 오는 갈등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문제인 것입니다.

  왜, 그 젊은이들이 고통의 고난을 격어야 합니까? 왜 목사님이 생명을 잃어야 합니까? 그리고 왜 교회가 아픔을 격어야 하고 비난을 당해야 합니까? 이 고난의 고통 다음에는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위해 고난을 겪는 고통과 순교의 역사는 복음과 생명의 역사를 열게 하는 문과 같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 고통을 감내하고 인내하는 신앙의 경주자가 되기 위해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다보아야 합니다.

  인도의 ‘K.V. 바케이’ 목사가 친구와 함께 험한 길을 따라 구릉지대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참 걸어간 후에 그들은 계곡의 급류 양편 나무에 연결된 좁은 밧줄 다리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 지리에 밝은 친구가 먼저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에 바케이 목사님은 다리의 중간지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바케이 목사님은 소용돌이치며 노호하는 급류를 내려다보고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 다리가 마치 급류의 반대 방향으로 흔들리며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에 친구가 바케이 목사님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내려다 보지마! 나를 똑바로 쳐다보라고! 그 충고는 효력이 있었습니다. 바케이 목사님은 세차게 흐르는 계곡아래의 물로부터 친구에게로 눈을 돌렸을 때에 담대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참으신 믿음의 창시자이며 완성 자가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무거움과 얽매임과 두려움 없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서, 인류를 향하여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에 굳게 서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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