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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는(1) (히 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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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전당 시리즈 5>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1)

믿음의 원조

동네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우리 지역만 하더라도 포항은 과메기와 물회가 유명하고, 울릉도는 호박엿, 영덕은 대게가 유명한데 그곳에 방문하면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을 꼭 먹어봐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지요. 그러다보니 자연 그 음식을 팔아 돈을 벌려는 사람들도 몰려들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서로 자기가 파는 음식이 최고라고 경쟁을 하게 되어 있고 경쟁이 너무 심해지면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오래전에 '이동'이라는 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포항시 남구 이동이 아니라 경기도 포천에 있는 이동입니다. 이동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동 막걸리와 이동갈비가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동에 간 김에 목사가 막걸리는 못 먹어도 유명한 이동 갈비는 먹어보자 싶어 이동갈비집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갈비를 식당을 고르는데 참 고민 많이 했습니다. 수많은 갈비집이 한곳에 오밀조밀 모여 있기도 하거니와 간판에 '원조 원조갈비' '이동 원조갈비' '원조 중에 원조 이동갈비' '진짜 원조' 등등 저마다 자기가 원조라고 써 붙여 놓아서 도무지 어느 집이 진짜 원조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지역 특산음식을 파는 곳이면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지요. 그야말로 원조 전쟁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수많은 원조 간판을 보면서 이런 의문을 가져보았습니다. "도대체 왜 저렇게 서로 원조라고 우기는 것일까?" 그것은 원조라는 이름을 붙이면 사람들이 찾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굳이 원조 간판을 찾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 원조가 지닌 이름값이 아닐까 싶습니다. 원조라면 오랜 역사를 가진 정통의 맛을 지녔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지요. 어딘가 '원조'라면 그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는 깊은 맛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갈비 원조는 서로 자기라고 저렇게 우기는데 과연 믿음의 원조는 누구일까?" 성경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만 해도 많은 믿음의 대표선수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과연 원조는 누구일까? 갈비의 원조처럼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깊은 믿음과 정통성을 가진 믿음의 대표라고 모두가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믿음의 원조요 대표입니다. 어렸을 때 부르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는 노래처럼 오늘날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만 우리뿐 아니라 세계를 대표하는 3대종교인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 모두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분당샘물교회 성도들을 억류하고 있는 탈레반과 이슬람교 신자들 모두가 자기네 조상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곧 우리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여 과연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도 아브아함과 사라에 관해 8절부터 19절까지 가장 긴 본문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다른 조상들은 짧으면 딱 한 절(아벨이나 노아처럼) 길어봐야 겨우 몇 절만 할애하는데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엄청나게 긴 본문을 할애한다는 것은 히브리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과연 믿음의 조상답다"고 인정한다는 뜻이 됩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의 네 번째 인물로 모두가 인정하는 원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의 믿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기에, 또 그 아내 사라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이토록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음의 조상,' '믿음의 원조'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가,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네 가지 이유를 살펴보려 합니다.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첫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여기서 '본향'(本鄕)이란 말은 헬라어로 '파트리스'인데 이 말은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파테르에서 왔습니다. 영어에서 아버지를 '파더'(father)라고 부르는 것과 아주 발음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땅'이라는 뜻이지요. 따라서 이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조국' 혹은 '본적'쯤 될 것 같습니다. 즉 지금 사는 곳 말고 아버지가 태어난 땅 본래 고향이 어디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때 "어디 사람이세요?" 하면 참 애매한 질문이 됩니다. 지금 사는 곳이 어디냐는 뜻인지, 아니면 당신이 나서 자란 곳이 어디냐는 뜻인지, 아니면 본적이 어디냐는 것인지가 애매한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본향은 본적지입니다.

본문 8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은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 바로 본향이라는 말입니다.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이 본향, 즉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현대사회는 산업화가 되어 고향을 떠나 이사하는 사람이 워낙 많고, 저를 비롯해 여기 앉아 있는 분 중에서도 자기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만 아브라함 당시 사회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절대 고향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곧 내 삶의 모든 기반을 떠난다는 뜻이요 집안과 친척의 보호를 벗어난다는 뜻이기 때문에 죄를 짓거나 전쟁이나 기근 같은 특별한 사정 외에는 절대 고향을 안 떠났고 이런 사정 때문에 부득이하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성경은 '나그네'라고 부르면서 고아와 과부와 더불어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보았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모를 리 없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갑자기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갈 곳이 어딘지도 안 가르쳐주고 그저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만 하십니다. 우리 같으면 가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 황당한 명령에 순종해서 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순종의 정신을 믿음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렇게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무조건 순종해서 간 것도 믿음이지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알지 못하는 땅'이 어딘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창세기에서는 그 알지 못하는 땅이 가나안 땅이지요.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 땅이 가나안 땅이 아니라 본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 말입니다. 그 본향은 바로 영원한 성, 즉 하늘나라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아브라함은 어딘지도 모르고 무조건 순종해서 간 것이 아니라 그 가야 할 땅이 본향, 즉 내가 돌아가야 할 하늘나라, 영원한 하나님의 집인 줄 알았기에 순종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본향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13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 살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일 뿐 우리가 돌아가야 할 참 본향은 저 하늘나라임을 아브라함은 알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고향이 어디냐? 다 고향이 같습니다. 우리의 진짜 고향, 우리의 본향은 다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지방색이 강해서 고향이 어디냐를 참 많이 따집니다. 정치인들도 이 지방색을 많이 이용하고, 또 실제로 중요할 때마다 우리도 고향을 찾고 출신을 찾습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고향 따지고 지방 따진다는 데 있는데 오래 전 어떤 목사님이 총회장에 출마했을 때 사람들이 그랬답니다. "목사님은 고향이 어디입니까?" 물론 경상도냐 전라도냐 따지려는 의도로 물은 것이지요.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더군요. "제 고향은 하늘나라, 천국 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고향이 같습니다. 어느 도, 어느 시에서 태어났느냐는 그냥 이 눈에 보이는 땅에서 태어난 것일 뿐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의 본향집은 경상도도, 전라도도 아닌 하늘나라이기에 우리 모든 성도는 동향 사람이고 다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형제요 친척입니다. 그런데도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고향 따지고 친척 따지는 것은 정말 신앙과 거리가 먼 태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비록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지만 언젠가 돌아가야 할 본향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는 말씀처럼 오늘 우리의 국적은 비록 이 대한민국이지만 참된 시민권 진짜 국적은 저 하늘나라에 있는 천국시민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비록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늘 하늘나라를 바라보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사모하고 거기 계신 나의 참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은 아주 잠시일 뿐, 짧게 사나, 90살 100살 길게 사나 다 하나님 앞에서는 눈 깜짝할 새, 순식간에 지나가는 촌음(寸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잠시 잠깐 머물다 가는 것뿐이지 이 땅은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돌아가 영원히 살게 될 내 집은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나라입니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참 하늘나라 시민이요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 어딘지도 모르면서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하면서 순종하여 간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오늘 이 믿음을 우리 성도들에게 강조합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이요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저 하늘나라, 영원한 천국과 그곳에서 누리게 될 영생,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고 영생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땅에서 비록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산다 하더라도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스데반집사처럼 지금 당장은 돌에 맞아 죽어도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볼 수 있기에 기쁘게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참 이상하게도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웃을 수 있고, 어떤 고난에도, 심지어 지금 당장 죽음이 닥쳐온다 해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믿음이 뭔지 모르는 분들은 죽었다 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들을 주신다는 믿음

둘째로, 아브라함은 믿음은 보이지 않는 후손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11~12절을 읽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물론 히브리서는 이 믿음을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기보다 아내인 사라의 믿음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나 아내의 믿음이 곧 남편이 믿음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이 부부의 믿음의 특징이 무엇인지만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본문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라가 나이가 많아 단산(斷産)하였다는군요. 창세기 18:11에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늙었고"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보면 "늙어서 생명의 날들이 지나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즉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생식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사라는 생리가 끊어졌으니 이 부부 사이에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적어도 과학적, 생물학적으로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비록 생물학적으로 상식적으로 과학적으로는 임신이 불가능하지만 믿음으로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냐? "내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미쁘시다'는 말은 faithful, 믿을만하다,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저 사람은 믿을 만하다, 저 사람은 약속하면 반드시 지킨다."고 믿는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무리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해도 안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능력이 안 되면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약속을 지키려고 발버둥 쳐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지요. 신용이 너무 좋은 사람이 나에게 돈을 꿔갔습니다. 저 사람은 꿔간 돈은 반드시 갚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만 그 사람이 망해서 1원 한 푼 없는 신세가 되었다면 아무리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도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르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한계와 상황을 뛰어넘는 분입니다. 따라서 과학적으로는 안 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과학을 뛰어넘고 생물학을 뛰어넘고 모든 것을 넘어서는 분이기에, 아니, 그 과학은 누가 만드셨고 아이 낳는 과정은 누가 설계하고 계획하셨고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모든 과정은 누구의 손 안에 있습니까? 하나님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만 믿으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이고, 생리가 끊어져도 임신이 되는 것이고, 모든 불가능도 가능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을 아브라함과 사라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12절 말씀처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비록 늙어서, 생리가 끊어져서 생물학적으로는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는, 더 이상 생명을 생산할 소망이 없는 죽은 몸이나 마찬가지인 사라를 통해서도 하늘의 별과 같이, 해변의 모래알 같이 무수한 후손을 낳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사람들은 "나는 그거 안 믿어."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의 근거가 무엇인가? 자기가 본 것, 자기가 경험한 것 이외에는 안 믿는다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눈에 안 보이는 공기나 바람은 어떻게 믿고, 저 우주에 보이지 않는 별들은 또 어떻게 믿습니까? 진정한 믿음은 내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눈이 보는 것, 내가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좁은 것인지 깨닫고 내 눈을 뛰어넘는, 내 경험을 뛰어넘는, 아니 과학을 뛰어넘고 전 우주를 뛰어넘는 위대한 초현실의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것을 뛰어넘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그 믿음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믿음이 좁아서 요만큼밖에 안 되면 응답도 그만큼밖에 안 옵니다. 그러나 믿음이 커서 이만큼 믿으면 응답도 그와 똑같이 오게 마련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경험을 뛰어넘고, 내 한계를 뛰어넘고, 인간의 모든 과학과 지식과 자연의 모든 원리를 뛰어넘는 분임을 믿는다." 하는 그 순간에 응답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큰 믿음 앞에는 그 어떤 한계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본문을 보며 이런 의문도 제기합니다. "아니, 아브라함도 사라도 실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안 믿었잖아?" 맞습니다. 실제로 이들 부부는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부부가 다 비웃기도 합니다(아브라함은 17:17에서, 사라는 18:18:12에서). 나아가 아예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라의 여종 하갈을 취해 아들을 낳아보기까지 합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부부입니다. 그런데 왜 히브리서는 이렇게까지 인간적인 부부를 그토록 믿음 좋다고 하는 것일까요? 저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믿음이 더 값지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해서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면, 우리는 좌절하고 아예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 당신네 부부는 아예 우리와는 상대도 안 되는 믿음 가진 사람이니까." 하고 주눅이 들어 아예 본받을 생각도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어디 그렇습니까? 눈에 안 보이고 기다림이 길어지면 의심도 하고, 비웃기도 하고, 딴 짓도 하는 것이 사람의 특징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끝이 중요합니다. 과정 중에는 의심도 하고, 비웃기도 하고, 딴 짓도 하지만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도중에는 잘 믿다가도 끝에 가서 믿음 잃고 실패하는 사람도 많은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비록 중간에는 우리처럼 의심하고 비웃도 딴 짓 하다가도 마지막에는 분명히 믿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이 오늘 우리 같은 부족하고 못난 인간들에게도 소망이 되고 본받을만한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의심 많고 변변치 않은 나도 이들처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처럼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조차도 아브라함 사라처럼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 모든 것을 뛰어넘고 극복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성경은 그렇게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도 계속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대하십시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우리에게 참 믿음이 무엇인지, 진짜 '원조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것입니다. 이 '원조믿음'을 조금이라도 본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도 모든 현실과 한계를 뛰어넘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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