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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왕상 14:21~24, 대하 11: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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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본문 : 왕상 14:21~24, 대하 11:13~17

1. 또 하나의 몰래 카메라???

작년인가요? 서울 어느 동네에는 지역 주민의 안전과 치안을 위하여 동네 요소요소에 CCTV 카메라를 설치했더니 사고가 현저히 줄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또, 하도 쓰레기를 무단으로 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골머리를 앓던 어느 지역 주민들은 그곳에 CCTV 카메라를 설치했더니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CCTV 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보편화되었는데요. 대형 마트나, 백화점의 매장, 동네 슈퍼나, 편의점에 이르기까지 CCTV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고객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CCTV 카메라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즉 긍정적으로 범죄를 줄이고 자신의 재산과 주민들을 보호하는 차원도 있지만, 반대로 주민들이나 매장을 찾은 고객들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런 경우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지금은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습니다만, 목욕탕, 화장실, 수영장이나 탈의실 등에 설치된 CCTV 카메라가 ‘은밀한 엿보기 카메라’가 되고, 또 그것을 녹화하여 인터넷에 떠돌게 하거나 불법으로 판매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경찰이 불법 테이프를 판매하는 상인들의 비밀 창고를 급습해보니, 언제 어떻게 찍었는지 알 수 없는 개인의 사생활들이 그대로 녹화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 Fuller 신학교 교수인 김세윤 목사는 강의 중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미국의 경우 어지간한 가정에 이르기까지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가정의 은밀한 대화를 언제든지 엿들을 수 있으며, 앞으로 미국 CIA는 사람의 머리에 갖다 대기만 해도 그의 생각을 다 읽어낼 수 있는 기계장치를 개발해 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제 더 이상 나만의 공간은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속담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지켜볼 수 있고, 나의 모든 말을 들을 수 있으며, 나의 一擧手一投足을 감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이나 혹은 공공장소에 대해서까지 불신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 있을 때 나는 누구며,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혼자 있든 사람들 속에 있든’, 혹은 ‘공개된 장소에 있건 비밀스러운 장소에 있건’,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 여러분이 있는 자리는 거기가 어디든 그곳은 하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이 될 수 있고,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은 피할 수 없는 것이죠. 살아계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사람의 눈을 피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렸다’, 혹은 ‘남들이 알 수 없는 비밀이다’ 하는 것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성도가 항상 잊지 말고 의식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보신다’,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1) 사람들이 보기에(대하 11:13~17).

르호보암 왕은 솔로몬 왕의 아들로서 통일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자,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된 후, 남 왕국 유다의 첫 번째 왕이었습니다. 마흔 한 살에 왕이 되어 17년간을 통치했습니다(왕상 14:21). 그가 비록 나라를 분열시킨 장본인이었지만, 그 후 그는 별 다른 실정을 하지 않고 비교적 정치를 잘했습니다.

그는 국경지방에 15개의 성읍을 건축했는데요(대하 11:5-12). 이 성읍들은 방어벽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성읍들의 위치입니다. 이 성읍들은 대부분 남쪽 애굽과의 접경지역, 그리고 블레셋과 접한 지역에 있었습니다. 즉 르호보암 왕은 북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적인 관계로 보지 않았고, 언젠가는 다시 하나가 되거나, 아니면 누구든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는 화합 정책을 취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군대를 정비하여, 비록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 만의 나라이지만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아들 아비야를 일찍이 후계자로 지목함으로서 왕가에서 고질적으로 일어나던 왕위쟁탈전을 사전에 방지하고, 또 아들들을 각 성읍으로 분산하여 성읍을 다스리게 함으로서 그들의 권력욕을 지혜롭고도 건설적으로 이용했습니다.

그 다음 르호보암 왕에게 있어서 인상적인 일은 북 왕국의 열 개 지파 지역에 흩어져 있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유다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옛날 다윗과 솔로몬이 재정비한 제사 제도에 따라 전국 각지로 흩어졌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분열된 이후, 성전이 있고 다윗의 후손이 통치하는 나라인 남 유다로 속속들이 귀환했습니다. 그 이유는 북 왕국의 왕 여로보암이 전국 각지에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서는, 그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을 따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중에서도 “마음을 오로지 하여 ‧‧‧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국경을 넘은 것입니다.

이렇게 르호보암 왕은 비록 초기에는 실수를 했지만, 집안 잘 다스리고, 나라 안정시키고, 여호와 신앙이 유지되게 만들고, 국가 기반을 튼튼하게 만든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로호보암 왕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또 다른 본문인 열왕기상 14장은 또 다른 중요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이 보시기에(왕상 14:21~24).

❶ 열왕기상 14장 21절의 앞부분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인 여로보암은 그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으며, 또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게 만드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가 우상을 만들고 산과 나무 아래에 그것을 섬기기 위한 산당을 차려 백성들로 하나님 대신에 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21절부터 기록자는 우리의 시선을 남왕국 유다와 당시 왕이었던 르호보암에게로 향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의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여 징벌을 받게 된 북 왕국과 비교해 볼 때, 남 왕국 유다는 어떠했느냐?’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열왕기서 본문 22절부터를 보면,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 이는 저희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음이라.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르호보암 왕의 생애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바로 앞에서 지적한 여로보암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은 앞에서 살펴 본 역대기서의 긍정적인 평가와는 전혀 다릅니다. 열왕기서의 저자는 망설임 없이 그의 생애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죠.

비록 겉으로는 르호보암 왕이 특별한 실정이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처럼 안 보일지라도,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도록 만들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기업인 유다 곳곳에 산당이 세위지고 거기서 우상을 섬겼을 뿐 아니라, 이방으로부터 음란한 풍습까지 들어와 남자끼리 더러운 일을 행하는 정도까지 이르게 만들었습니다(24). 결국 르호보암 왕은 유다를 북왕국 이스라엘과 똑 같게 만들었습니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 누가 낫고 못하고가 없이 하나님 보시기에 똑 같았던 것이죠. 역사가와 일반 사람들은 남쪽과 북쪽을 비교하면서,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르호보암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결과, 그와 유다 나라는 애굽 왕 시삭의 공격으로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르호보암이 왕이 된지 5년째 되었을 때, 애굽 왕 시삭이 유다 나라를 공격해 들어와서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다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여러분, 성전과 왕궁의 보물은 누가 어떻게 모은 것입니까? 르호보암의 할아버지 다윗이 모은 것은 성전 건축에 대부분 사용되고, 그 남은 것이 성전에 보관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르호보암의 부친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 모은 것을 성전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가 모았느냐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것을 이방인들이 강탈해 가도록 만든 원인 제공자라는 것이 문제지요.

당나라의 두 번째 왕인 태종은 어느 날 측근을 모아놓고 “創業과 守成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운 것이냐?”를 물었습니다. 나라를 세우는 일과 나라를 지키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어렵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위징이라는 신하는 “일단 천하를 얻고 나면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나라를 망치므로 수성이 더 어렵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守成이 創業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르호보암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수성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특별히 거룩한 성전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 의해서 유린당하고, 성전의 기물들과 보물들이 강탈당한 일은 정말 치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악한 자들의 결국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➋ 오늘 본문인 열왕기상 14장 22절에 있는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이 말은 오늘 본문에 와서야 처음으로 등장하는 말입니다. 르호보암 이전 사울 왕, 다윗 왕, 솔로몬 왕의 경우에는 이런 기준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로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이 말은 열왕기상하에 43회, 역대상하에 19회 나옵니다. 이 말이 왕들을 평가하는 기준과 잣대가 된 것입니다. 아사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왕상15:11), 바아사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왕상15:34), 오므리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왕상16:25), 아합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왕상16:30), 여호사밧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왕상22:43) ‧‧‧.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이 말은 보기에 따라서는, 그리고 입장에 따라서는 다르게 평가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르호보암에 대해 그가 영토를 확장했다는 것, 나라를 안정시켰다는 것, 왕자들을 잘 관리하여 왕자들끼리의 분열과 지역과 지파 간의 분열을 막았다는 것 등 제법 정치를 잘 한 모범적인 왕이라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들이나 일반인들의 평가였지요. 그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한 자였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시대는 평가단, 감정단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떤 사건이나 일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평가에 우리가 얼마나 좌지우지됩니까? “누가 나에게 대하여 어떻다 카더라”하면, 안 쓴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신경이 많이 쓰이고 또 의식이 됩니까? 별 것 아니라도 조금 좋은 평가를 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갑자기 나와 친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좋던 사람도 안 좋은 평가를 하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적이 되는 시대 아닙니까? 사람의 평가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우리 시대는 세상적으로 성공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자가 되면,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좋은 평가가 되어버리는 시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업을 조금 크게 하거나, 돈이 많으면 그것 때문에 성공한 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것 때문에 성공한 자가 되고, 지금이 좋으면 지난 잘못은 어느 정도 눈 감아지는 시대입니다. 세상의 평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세상의 평가와 사람들의 평가에 춤을 추면 안 됩니다. 거기에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여론에 민감합니다. 이번 대통령 후보 경선에도 이 국민들의 여론, 국민적인 지지도가 상당수 포함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보나’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나’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나’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자기 스스로 잘난 줄 알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사람이면 그 사람은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오로지 하여,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시기 바랍니다. 홀로 있을 때나, 사람들 속에 있을 때, 그 어떤 순간, 어떤 장소라도, 그리고 무슨 일을 할지라도, 여러분이 있는 자리는 하나님 앞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다 보시고 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고 합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나 세상이 인정한다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으면 모든 사람과 온 세상으로부터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

다니엘 시대, 바벨론 왕 벨사살은 스스로를 높이 평가했고, 모든 신하와 온 국민들도 그를 높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잔치를 베푼 자리에 난데없이 이상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다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 말은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그리고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메데와 파사 연합군이 쳐들어와서 바벨론을 멸망시켰으며 그의 자랑도 그의 생명도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다니엘 5장). 무슨 말입니까? 스스로의 평가, 다른 사람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문제는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볼 때에, 충분하냐, 아니면 모자라냐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예루살렘의 어느 한 장소로 인도해 가셨는데, 거기에는 담이 있었고, 그 담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 나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너는 이 담을 헐라”고 하셔서, 선지자가 그 담을 헐었더니, 거기에 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가서 ‧‧‧ 보라”고 하셔서 문을 열고 보니까 그 안에는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우상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장로들 가운데 70명이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있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인자야 이스라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신다’고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말로는 하나님을 섬기노라 하지마는 그 마음속에는 더러운 것들이 많고,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절대로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신다, 지켜보신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큰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경건하게 사는 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보시고 있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카메라나, 도청장치, 혹은 우리의 머리를 스캐닝할 수 있는 기계가 생겨난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생생하고 분명하게 오늘도 우리가 홀로 있는 시간 우리의 모든 것을 보실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든지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나의 모든 것이 촬영당하고, 또 도청된다고 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 동일한 삶,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거나 혹은 홀로 있을 때가 한결 같은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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