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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받았느냐! (행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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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1~7 

몇 년 전 칭찬 릴레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 그 칭찬 받은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칭찬의 대상으로 추천합니다. 이렇게 이어져 나가면서 서로 칭찬하기를 계속해 나가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읽어 본 분도 계실 줄 압니다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사실 칭찬만큼 사람을 힘 있게 만들어 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칭찬은 곧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칭찬하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에 대한 격려도 됩니다. 그래서 칭찬을 듣고 자란 사람은 매사에 긍정적이 되고 힘 있게 자신의 앞길을 개척해 나가게 마련입니다.

기쁨은 함께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함께 나누면 절만으로 줄어든다는 말도 합니다. 그만큼 사랑은 함께 나누면 서로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지켜야 될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해서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가장 힘들고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사람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힘의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오히려 부담을 주고 상대방을 힘들게 할 때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어머니를 결코 주저앉을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서로를 세워나가는 동역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 자신을 든든한 믿음 안에 세워나가는 시간이 되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동역자들의 수고의 릴레이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영원한 2인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던 디디오 유스도라는 사람과 좌절과 실망 가운데 바울을 만나 바울의 위대한 동역자요 후원자의 삶을 살게 된 아굴라 부부 그리고 아굴라 부부를 통해서 믿음의 눈을 뜬 아볼로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에서 아볼로를 만나 그리스도의 도에 대해 자세히 가르쳤고 그 가르침을 받고 새롭게 믿음의 눈을 뜨게 된 아볼로는 이제 아가야 지방 그러니까 바울이 일 년 반 동안이나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고린도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물론 그 많은 도움이란 자기의 성경 지식에다 뒤늦게 눈을 뜨게 된 참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사람들 즉 고린도의 성도들을 더 자세히 가르치며 세워나가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아볼로가 고린도에 머물며 수고하는 동안 이미 고린도를 떠나왔던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에베소에는 이미 바울과 함께 이곳에 들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를 도왔듯이 많은 새로 믿게 된 사람들을 도우며 수고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거기서 몇몇 제자들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그리고 아볼로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이 되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을 만났을 때 대뜸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미 말씀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믿음의 상태를 점검하여 더 든든히 세우고자 하는 바울의 간절함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믿고 있고 말씀의 훈련을 받고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가 아니라 하나라도 더 잘 가르치고 세워나가고자 하는 아름다운 사랑이 숨 쉬고 있는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성도들의 대답이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계시다는 것조차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깜짝 놀란 바울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바울이 그들에게 자세히 풀어서 설명을 해주기 시작합니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자기 뒤에 오실 분을 믿으라고 외쳤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교인이라고도 하고 신자들이라고도 하고 혹은 성도라고도 부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세 가지 호칭 중에 성도라는 말을 제일 좋아합니다. 어떤 분들이 제게 묻습니다.
“교회는 교인이 몇 분이나 있습니까?”

그러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우리교회에는 교인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질문을 던진 사람이 깜짝 놀라서 “아니 어떻게 교인이 한 사람도 없을 수 있습니까?” 라고 되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웃으면서 “교인은 한 사람도 없지만 성도는 많이 계십니다.”라고 다시 대답을 하곤 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성도란 곧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교인이라면 단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라면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불교를 믿는 사람도 도교를 믿는 사람도 다 자기들의 사람들을 신자 또는 신도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성도라는 말은 오직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꼭 성도라는 말을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즉 성도라면 마땅히 성령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묻는 것처럼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단지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입술로 예수는 나의 구주요 주님이 되신다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는 나의 구주요 나의 주님이 되신다고 고백할 때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보아라! 내가 문 앞에 서서 이렇게 두드리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로 16절에서는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두려움에 이르게 하는, 노예로 만드는 영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영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을 의지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합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의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라는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예수를 우리 마음에 모시에 들이는 것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나의 구주요 주님이 되신다고 고백하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미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분들은 그 순간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신다고 고백하였다면 분명히 성령을 받으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기는 하나 아직도 자신 있게 예수가 나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지 못하였다면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주님이 되신다고 그 예수님을 내가 믿는다고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하지만 나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나는 너무도 죄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까? 속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 값을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내가 죄인임을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 그러나 내게는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내 마음에 나의 구주로 모시어 들이는 그 순간 더 이상 죄는 나를 묶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미 사망의 몸에서 내가 풀려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오신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를 또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이라고 앞에서 보았던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의 구주가 되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다 이미 성령의 사람이요 성도인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신다고 고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와 허물이 많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민을 합니다. “내가 성령의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암만 해도 나는 성령을 받지 못했는가봐”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들을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란 곧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을 받았지만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아니야 너는 분명히 성령을 받았어” 하는 표시로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을 가리켜 성령이 주시는 선물 즉 은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데 그 중 우리들 자신에게 유익하도록 그리고 다른 성도들을 돕는데 아주 유익하게 사용하도록 주시는 선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방언의 은사입니다. 방언이란 내가 알지 못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입술에 주셔서 내 입술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도록 주시는 능력이란 말입니다. 물론 통역의 은사를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말로 기도하지만 그 내용을 알려주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들려지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정말 제대로 하는 것일까 하고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말을 배워나가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는 옹알이한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아무 뜻도 없는 말 같은 것을 옹알옹알 대지만 점점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말이 의미를 담아나가고 그 말이 정확하게 사용되어져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방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방언을 받게 되면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신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 신나서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계속합니다. 우리말로 할 때는 기도가 그렇게 어렵더니 방언으로 기도하면서는 절로 힘이 납니다. 조금도 힘이 들지를 않습니다. 단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것이 불만이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기도하다 보면 내 안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대강 느껴집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내 마음을 감동하셔서 알려주시는 것이요 일종의 통역입니다. 그리고 처음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그냥 똑같은 말로 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언어의 형태를 띠고 문장의 형태를 띠면서 많은 언어가 복잡하게 얽혀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거의 모든 분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방언은 바로 성령이 내 안에서 나를 통해서 직접 기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시고자 하는 것을 방언으로 기도케 하신다는 것을 먼저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셨고 그러자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예언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셔서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감동을 따라 나는 이런 사람이 되리라 또는 나는 이런 일을 하리라고 하는 고백을 끊임없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받도록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함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학생 수련회에서도 함께 참석한 형제자매들 가운데 먼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아직 방언을 받지 못한 채 몸부림치는 다른 형제자매들을 붙잡고 기도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 중보 기도의 요청을 받은 모든 교회의 중보자들이 함께 기도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랬기에 이번에 참석한 우리 학생회 형제자매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방언의 은사를 받고 돌아왔을 뿐 아니라 이미 방언의 은사를 받았던 두 자매에게는 뜨거운 긍휼의 은사를 더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앞서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아직 그 은혜에 이르지 못한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이것이 바로 긍휼의 마음이요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마음이야말로 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성령께서 놀랍도록 역사하시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는 이렇듯 긍휼의 은사와 서로 연결이 되는 것이요. 이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하는 것이 또한 방언의 은사의 또 하나의 역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지역을 위해서 그리고 태신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요 우리 가운데 연약한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그리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또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 그리고 그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아름다운 사랑의 헌신이 계속되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울로부터 배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보다 깊은 믿음으로 들어갔던 아볼로가 수고하여 세운 에베소의 성도들을 이제 다시 바울이 와서 더욱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나가는 이 모습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동역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이 동역의 원리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나가는 비결이 되는 것이요 이를 통해서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와 여러분 모두가 함께 성도들을 세워나가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는 디딤돌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부족하다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서로가 수고하고 그 부족한 부분을 서로가 채워나가고 세워나가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건설의 비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 필요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완전하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어려움 가운데 만났는데 실패자로 만났는데 오히려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놀라운 승리자가 되었던 바울과 아굴라 부부처럼 이제 우리는 서로 약한 것 같으나 함께 있음으로 함께 강한 자로 바뀌게 되는 이 귀한 동역자로 협력자로 서로가 든든한 후원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이미 받은 은사를 다시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뜨겁게 서로를 위해서 중보하며 기도하는 귀한 중보자가 또한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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