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실속있는 신앙 (마 23:1-12)

  • 잡초 잡초
  • 765
  • 0

첨부 1



이제까지 예수님은 주로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23장부터는 예수님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23장은 예수님이 무리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내용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위선적인 지도자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도 부족해서 자기들 나름대로 더엄격한 규칙들을 만들어서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울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였습니다. 그것은 말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모든 계명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위선적인 종교인들의 특징을 지적하셨습니다.

첫째는 경문과 옷술을 크게 하는 것입니다. 5 절입니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그들은 경문을 차고 다녔습니다. 경문은 조그만 상자입니다. 그 안에 율법을 작은 글씨로 적어서 넣어 두었습니다. 이것도 율법을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이 경문은 손목에 차기도 하고, 이마에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트필린이라고 합니다. 대문과 문설주에 써붙인 말씀은 메주자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트필린 상자를 넓게 만들었습니다. 자기가 율법을 사랑하고 말씀이 가까이 하고 산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옷술은 겉옷 귀퉁이에 푸른 실로 술을 매단 것입니다. 이 옷술도 율법을 사랑한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옷술도 크게 만들었습니다. 모두 자기가 그만큼 율법을 사랑하고 있다고 과시한 것입니다.

제가 청년 때 시골에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때 아주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당에 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성경과 찬송가를 왼쪽 가슴에 끼고 경건하게 걸어옵니다. 그 모습은 부흥회 인도하는 목사님과 구별이 안 될 정도입니다.
또 예배당 앞에 당회원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장로님들 이름이 적힌 명패가 테이블에 놓였습니다. 마치 초대되어 온 예배 참관인들처럼 보였습니다. 교인들이 장로들을 못 알아볼까봐 그렇게 자리를 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새신자가 장로님인 줄 모르고 인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장로님들이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예배 시간에 졸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강단 위에 기도 순서를 맡은 장로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기도 순서가 끝났지만 예배가 끝날 때까지 내려가지 않습니다. 문제는 강단 위에서도 졸고 앉아있습니다. 고단한 일이 많았던 것 같은데 이해하려고 해도 영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면 팔짱을 끼고 의자에서 약간 물러앉으면서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을 지그시 감아줍니다. 그러고는 설교 말씀에 동의하는 듯 가끔 고개를 끄덕여 줍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깊이 그리고 아주 달게 주무셨습니다. 다행인 것은 설교가 끝나면 딱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또 예배가 끝나면 이분들이 문 앞에 나와서 교인들과 악수를 나눴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예 처음부터 강단에 의자를 놓지 않았습니다. 강단은 상징적으로 예배를 받는 자리입니다. 여기에 의자를 놓고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은 예배학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가운데도 자랑거리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학교 학위 수여식에 가보면 단상에 교수님들이 가운을 입고 앉아있습니다. 전공에 따라 디자인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박사 학위자는 양 팔에 각각 세 개의 띠가 둘려 있는 것입니다. 어렵게 공부해서 영예의 학위를 받은 계급장입니다. 그런데 학위 수여식 때라야 한 번 광을 낼 수 있습니다. 만약 교수님들이 강의실에 학위 가운을 입고 들어온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예배위원들이 입는 가운은 인간의 허물을 가리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자장 복장도 같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예배를 위해 입는 가운을 안 입고 학위를 받을 때 마련한 가운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양쪽 팔소매에 세 줄 계급장이 달려 있습니다. 설교를 하거나 예배를 인도하는데 학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결혼예배나 장례예배를 집례할 때 가운을 입습니다. 이 가운은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시무하던 교회가 선물한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학위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지난 달에 학위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논문을 다쓰지 못했는데 이번에 통과되어 드디어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입고 말 것이라 박사 가운을 아예 맞추지 않았습니다. 또 미국에 있는 학교라 여비가 많이 들어 학위 수여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졸업 기념사진도 없습니다. 차라리 그 비용을 아껴서 이스라엘 성지를 탐사하고 오려고 합니다. 학위 받는다고 자랑하고 광내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실속이 있지 않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나게 으쓱대고 싶은 유혹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자기만 으쓱대는 것이지 주변 사람들은 다압니다. 제 잘난 것 봐달라고 으쓱대면 뒤에서 흉봅니다. 속이 튼튼해야지 겉치레로 껍데기만 광내봐야 실속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허례허식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때 검은색 외제 승용차가 많이 팔린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갑자기 부자가 된 중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졸부들이 겉으로 광을 내려고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잔치에서 상석에 앉았습니다. 또 회당에서도 상석은 언제나 자기들 차지였습니다.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잔치에서 상석에 앉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 회당은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예배하는 곳입니다. 종교적인 모임에서도 자기들이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자리에 민감합니다. 동물은 자기 영역을 확보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얼마나 넓은 영역을 차지했느냐가 확보한 권세를 표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는 자연스럽게 상석이 있고 말석이 생깁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민감한지 모릅니다.

비행기를 타려면 먼저 좌석 배정을 받습니다. 비행기 좌석은 일등석이 있고 비즈니스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싼 이코노미석이 있습니다. 어디에 앉아 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과 경제력을 나타내 줍니다. 기내 서비스도 다릅니다. 누구는 다리를 편하게 뻗고 가고, 누구는 내리기 전까지 좁은 의자에서 꼬부리고 있어야 합니다. 같은 이코노미석에도 똑같은 좌석이 아닙니다. 그 안에도 무려 10가지 등급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리다툼을 합니다.
전철을 타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일곱 명씩 앉도록 된 의자에서 맨 끝에 있는 자리를 좋아합니다. 거긴 팔걸이도 있고, 벽에 머리를 기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예배당 의자도 신경 쓰입니다. 앞 사람 머리에 가리지 않는 은혜 받는 자리가 있습니다. 지각해서 뒤에 앉는 자리는 좋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도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밀어낼 수는 없고, 예배를 드리지만 내내 불안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앉은 자리는 나름대로 계산해서 가장 좋은 최선의 자리를 골라 앉았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텃세 부리지 말고 좋은 자리 양보하면서 예배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어디서나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자기보다 더 높은 이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악취가 납니다.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기는 하지만 존경하지 않습니다. 자리는 다른 사람이 앉혀줘야 명분이 서는 것입니다. 돈으로 힘으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이 많은 시장에서 인사를 받으려면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저마다 물건을 고르고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심을 자기에게 돌려서 인사를 받아내려면 여러 가지 사인을 줘야 합니다. 헛기침도 해야 합니다. 시장 소음보다 큰 소리로 자기가 등장한 것을 알려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일컬어 거드름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받아야 하는데 상대가 인사하지 않으면 마음이 상합니다. 인사는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호의적인 표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상대가 인사를 생략하는 것은 적의를 품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괘씸하게 여기고 응징을 합니다. 여기까지 가면 일이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가 인사를 하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눈이 어두워서 미처 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생각에 골똘하다가 미처 인사를 놓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시비를 걸지 마십시오. 제일 좋은 방법은 내가 먼저 인사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아래 사람일수록 인사를 가르치려면 내가 먼저 숙여야 합니다. 그것을 못하겠으면 그냥 용서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구약 에스더서를 보면 하만이 인사 자존심 때문에 망한 사람입니다. 문지기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뻣뻣하게 고개를 세우고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괘씸하게 여기고 모르드개의 유다 민족을 모두 죽이려고 흉계를 꾸몄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꾀에 넘어가 자기가 먼저 죽고 자기 민족이 몰살당했습니다.

셋째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랍비라는 호칭을 좋아했습니다. 랍비는 선생이란 뜻입니다. 유대인에게 랍비는 가장 존경받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종파의 이름이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랍비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 그런 일을 했으면 랍비가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를 지적하신 것은 이들이 랍비라고 불리는데 유세를 했기 때문입니다. 남을 가르친다고 다존경을 받지는 못합니다. 존경을 받으려면 덕이 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교만하게 가르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입만 가지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우고 정작 자기는 한 손가락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실천이 없는 가르침은 공허합니다. 본을 보이지 못하면 어떤 가르침도 소용이 없습니다.

요즘 초등학교 어린이 중에 8%가 ADHD라는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이 ADHD는 주의력결핍 과 과잉행동장애를 말합니다. 이 아이들은 주의력이 산만해서 수업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언성을 높이고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풉니다. 자연히 기억력, 언어 능력, 공간 감각, 운동신경, 고등 사고, 사회적 사고에 장애를 겪습니다.
이런 아동들을 치료해보면 반드시 문제 부모가 원인입니다. 부모가 자기도 하지 못할 일들을 아이에게 다그치면서 강제로 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압박이 쌓여서 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이 아는 것을 가지고 잘난 척을 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가르치지 않고 남 가르치기를 좋아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 고백을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27 말씀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하나님 말씀은 언제나 이런 자세로 받아야 합니다. 내가 말씀에 은혜를 받고 삶 속에서 기쁘게 행하고 있어야 남에게도 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려면 내 삶이 믿음으로 정돈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있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랍비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씀 가운데 세 가지 호칭을 들으려고 하지 말거나 부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랍비, 아비, 지도자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참 랍비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에게 아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지도자도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우리는 서로 형제일 따름입니다.

본문 8절부터 10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제 친구 중에 가톨릭 신자가 있습니다. 이 친구가 미사를 드리고 나면 꼭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답니다. 그것은 신부님이 성당 입구에 나와 미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신도들과 악수를 하는 장면입니다. 이런 인사는 우리 개신교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 신부님 가운데 좀 뻣뻣한 분이 있나 봅니다. 가톨릭에서는 사제나 주교나 교황을 father로 부릅니다. 이것은 신도들이 사제를 존경하는 뜻에서 부르는 경칭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성당에서는 신부님이 신도들의 아비가 되기 때문에 신도들과 인사를 나눌 때 먼저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분이 또 골초라서 미사가 끝나자마자 담배를 무는데담배를 쥔 손은 뒷짐을 지고, 오른 손을 뻗어 거만하게 악수를 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제들이 다그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가톨릭에서 이 아비 호칭을 쓰지 말라는 말씀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연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랍비나 아비나 지도자는 다 높아질 수 있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려는 말씀은 높은 자리에서 거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 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마지막 12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것이 이치입니다. 겸손은 진정 높아지는 비결입니다.
겉치레로 높이지려고 하지 맙시다. 상석을 차지하고 텃세부리지 맙시다. 선생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먼저 자신을 가르치는 참 크리스천이 됩시다. (황금성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