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앙인의 돈 생각하기(2) : 욕망의 문제 해결하기 (마 6:19-24)

  • 잡초 잡초
  • 396
  • 0

첨부 1


신앙인의 돈 생각하기 2 - 욕망의 문제 해결하기 (마태복음 6:19-24)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첫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돈 자체는 선하거나 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돈에는 영적인 차원의 문제가 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은 본문가운데 “너희가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돈이냐, 하나님이냐 사이에서 누가 우리 삶의 주인인지를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물질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결정하게 하기 때문에 영적인 차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돈이 영적인 차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보겠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차원에서는 돈이 인간들에게 어떤 욕망을 가져다주는지, 즉 욕망에 대한 부분도 다루게 될 것입니다.

다음의 11가지 질문은 우리 자신의 돈에 대한 숨겨진 생각을 알아보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해당되는 내용에 솔직하게 마음속으로 ( ○ )표 해보시기 바랍니다.

1. 복잡한 돈 문제 때문에 신앙생활에 지장을 받고 있다. (  )
2. 일과 사업을 하나님과 가정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  )
3. 지금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채 계속하여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갖고 싶다. (  )
4. 일하는 것이 싫고 귀찮게 느껴진다. (  )
5.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더 쉬운 방법으로 돈을 벌고 싶은 유혹을 느끼고 있다. (  )
6. 투자한 재물에 대한 걱정 근심으로 마음이 늘 무겁고 불안하다. (  )
7. 일시적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무절제하게 낭비하는 생활을 한다. (  )
8.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도와주지 않는다. (  )
9. 넉넉한 재물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지거나 혹은 우월감을 느낀다. (  )
10.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있거나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다. (  )
11. 하나님 일에 대한 희생이 부족하다. (  )

(위의 질문은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 다음으로 돈이 좋아요]에 나오는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 ○ )가 많으면 많을수록 여러분의 신앙 상태가 심각한 것입니다. 돈!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떠나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동시에 직접적인 연관이 되는, 피부에 와 닿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희 집에 아들과 딸이 고등학생인데, 요즘 용돈을 주면 자기 돈을 사용하지 않고 무엇을 살 때마다 엄마, 아빠에게 돈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네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쓰면 되지 왜 돈을 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요즘 돈을 모은다는 것입니다. “왜 돈을 모으냐? 네가 돈을 모을 필요가 뭐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25세 전에 모두 결혼을 했는데,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면 결혼을 할 건데, 아내가 힘들어 할 테니까 부모님과는 같이 살지 않고, 따로 살 집을 얻으려면 지금부터 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돈을 모으면 얼마나 모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어린 아이의 미래에 있어서도 돈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이 가장으로서 가정을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 돈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겠습니까?


교정된 시각 : 돈에 대한 바른 정의 내리기
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먼저 신앙인이 가져야할 돈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1. 돈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잘 사는 것의 기준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잘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돈이 없는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 할 수는 있지만 ‘못사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 많지만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돈이 적지만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 보면 돈이 없었던 때에 절대적으로 불행하다거나 비참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이전보다 나아졌다고 해서 행복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13절에서 돈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원리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압니다(빌 4:12). 그리고 돈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며, 믿음이 있는 자는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빌 4:11).

여러분이 돈 문제에 관해서 부자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이 움직여지고 가난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이 흐트러진다고 하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어도 가난할 수 있고, 부자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돈 문제에 있어서 이런 단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폼’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자족’은 크리스천으로서 ‘폼’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청년들에게 설교를 할 때 “너희들이 이왕에 예수 믿으려면 폼 나는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자주 드리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저희 아버님이 목회자가 되려는 저에게 돈 문제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목회자는 아무리 가난하고 모래 바닥에 코를 처박고 죽어도 평신도에게 돈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목회자의 자존심이라고 말입니다.

저희 어머님과 아버님은 실제로 철원에서 목회를 하실 때 끼니가 없고 밥이 없어도 군불을 떼셨다고 합니다. 왜? 목사가 되어서 점심을 굶는다고 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를 내면서 ‘우리 밥 해 먹는다.’

우리 위의 세대들은 돈이 없음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존심을 가지고 폼 나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그때에는 돈이 없었지만 믿음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문제가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 세대에는 돈이 없음에 대한 문제보다 돈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돈 때문에 어떻게 그 돈을 가지고 크리스천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해 나가느냐가 이것이 우리에게 더 큰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돈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마가복음 8장 36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우리의 목숨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원강대학교의 교수님으로 계시던 분인데 담낭암에 걸리셨습니다. 언니는 30년 동안 원불교에 있던 분입니다. 그 날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데 저를 붙잡고 기도해 달라고 울면서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내용도 모르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오늘 오셨는데 그분들이 담낭암으로 인해서 많이 힘들어 하고 있으며, 항암 치료를 받고 있고, 기도하면서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간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교수로 많은 것들을 쌓아 왔을지는 모르지만 목숨 앞에서 생명 앞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 돈이 우리의 삶에 만족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 기억으로 1981년 만나교회의 전신이었던 삼형교회가 개척되던 시절에 처음으로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여러분이 처음 아파트에 들어갔을 때 기억나십니까? 아파트에 들어갔더니 화장실이 집 안에 있었습니다. 그때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운 일 아니었습니까? 그전에는 겨울이 되면 화장실을 가려면 밖으로 나가 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문화인과 미개인의 차이를 아십니까? 문화인은 집 안에 화장실을 두고, 미개인은 화장실 안에 집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아파트를 보면 부엌이 집 안에 있고,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그럼 지금도 그 아파트에 만족하십니까? 지금은 ‘~~~빌’이라고 붙은 아파트들이 얼마나 많이 생겨났는지 내 아파트 가지고는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자가용을 처음 타 보셨습니까? 지금은 거의 다 가지고 계시겠지만, 제 기억으로 우리 가정이 처음 자가용을 탔던 때가 1977년이었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왕십리 감리교회 담임목사로 계실 때 장로님 한 분이 목사님부터 차를 사 드리고 자신이 타야 한다고 하시면서 사 주신 차가 ‘브리사’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운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브리사를 타면서 기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족이 추석에 성묘를 하러 논산으로 브리사를 타고 가는데 기사 한 사람에 여섯 식구가 브리사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일 편하게 내려갔던 사람이 기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차를 타고 내려간다는 것 자체가 폼 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자가용 있는 사람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럼 요즘 ‘브리사’ 가지고 만족이 되십니까? 여러분, 만족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얼마 되지 않은 일인데 카폰이라고 하는 것이 부의 상징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핸드폰이 얼마나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습니까?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 좋은 것 같기는 하지만 우리의 만족을 채워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우리의 욕망에 갈증을 심화시켜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3. 돈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축복’이 아니라 ‘은사’이다.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입니까? 아니면 받는 사람 마음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는 사람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물질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사임을 인정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많은 물질을 주실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보다 적은 물질을 주실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물질 없음이 결코 비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달란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은사라고 하는 측면에서 보면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똑같이 주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마음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달란트를 받았을 때,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 인데 달란트는 우리에게 묻어두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활용하라고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를 축복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을 자꾸 쌓으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것이 쌓이면 쌓일수록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질을 은사로 생각할 때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자꾸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돈이 유통되기 시작합니다. 건강한 경제 구조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제가 자랄 때 아버님이 집회를 갔다 오시거나 월급을 받으시면 저희 4남매를 불러 놓고 용돈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때 제 기억에 한 달 용돈이 오천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한 달을 사는데, 저는 주셨던 용돈을 다 썼습니다. 지금도 돈을 모으는 것 보다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대개 여자들이 그렇듯이 저희 누나는 받은 용돈을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아 두었습니다. 저는 한 달을 가지 못해서 돈이 떨어져 아버지께 돈을 달라고 하면, 아껴 쓰라고 말씀하시면서 용돈을 더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있던 누나가 기분이 나빴던지 아버지께 자기에게도 용돈을 더 달라고 하면 모아 놓은 돈을 쓰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은사적인 측면에서 돈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언제 활용이 됩니까? 자꾸 쓰면서 활용이 됩니다.

돈의 도덕적인 차원 : 욕망에 대한 경계 필요

마태복음 6장 21절에서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라는 것은 삶의 도덕적인 부분들을 지배해 가기 시작합니다.

도박꾼이 누군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도박하는 데 돈을 제일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강원도 근처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강원랜드라는 곳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돈도 다 잃고, 교인들에게 빚을 얻고, 교회 예산에까지 손을 대어 몇 억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견디다 못해 교회를 나두고 도망을 갔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분을 목사님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목사님이 아닙니다. 도박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떻게 돈을 쓰느냐?’ 이것이 여러분의 정체성을 증명합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집사, 권사, 장로와 같은 직분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크리스천일 수 있고, 크리스천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다음의 세 가지 회심이 필요하다고 말을 했습니다. “첫째는 가슴의 회심이요, 둘째는 정신의 회심이요, 셋째는 돈지갑의 회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 은혜 받고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서 돈 지갑의 용도가 변하지 않았다면 아직 여러분은 변화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침례교 목사님이 있습니다. 침례교회에서는 침례를 베풀 때 하얀 가운을 입고, 탕 속에서 손으로 코를 잡고 물속에 담궜다가 꺼냅니다. 이제 물로 새롭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침례를 받을 때 교인들에게 침례가운을 입히지 않고 생활하면서 입는 옷을 입고 오게 한답니다. 예를 들면 법관이면 법복을,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면 양복을, 간호사면 간호사복을 자신의 직업에 적합한 옷을 입고 와서 침례를 받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꼭 하나 더 가져오는 것이 있는데, 돈 지갑을 넣어서 가지고 와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평상복과 함께 돈 지갑이 물속에 들어갔다 나와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용하는 돈의 용도가 달라지지 아니하면 절대로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속으로 대답하셔도 좋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욕망에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까?” 너무 쉽습니다. 예, 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원합니다.

제가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욕망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마도 이 질문에는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욕망, 이것은 끊임없이 경계되지 않으면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남자들이 아내로부터 가장 듣기 싫어하는 3가지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3위는 옆집의 멋지고 자상한 남편 이야기, 2위는 옆집이 돈 벼락 맞은 이야기, 1위는 옆집 남편이 돈 벼락 맞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부부싸움의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결국 돈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돈은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이면서 우리의 실제적인 싸움을 일으키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욕망! 치료되어야 할 질병 : ‘거룩한 욕망’이라는 함정

우리는 욕망을 변질된 본성, 혹은 병든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욕망은 치료되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잘못된 욕망이 어떻게 치료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거룩한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말을 ‘거룩함’이라는 말로 잘 포장합니다. 소위 돈을 버는 욕망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하기 위함’이라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깊이 들여다보면 그 ‘거룩한 욕망’속에 어떠한 이유이든 내가 돈을 벌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욕망이 정말 거룩한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욕망의 문제 해결하기 : ‘필요한 것’ VS ‘원하는 것’

거룩한 욕망, 잘못된 욕망을 치료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돈의 필요가 같지는 않습니다. 필요라는 부분은 가정의 구성원, 환경 등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규정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 필요의 조건을 우리의 욕망으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필요를 볼 때, 우리는 크리스천, 즉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욕망 가운데서 필요한 것을 방치하면 이 욕망이 습관이 됩니다. 욕망이 습관이 되면 욕망이 필요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의 스타일 가운데 욕망이 필요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집 평수가 몇 평이면 만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과 더불어서 내가 살고 싶은 평수는 몇 평입니까? 이 두 질문의 대한 대답이 동일하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어떤 차 종류가 여러분에게 필요합니까? 여러분이 타고 싶은 차의 종류는 무엇입니까? 이 두 질문의 답이 동일합니까? 답이 동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근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정말 저의 인생에 있어서 필요한 것을 따라 살아가게 하여 주시고, 내가 원하는 욕망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따라 살아가며 나에게 주어진 것들, 은사들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가운데 재산 짊어지고 갈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클라크 게이블’이 그 영화 이후에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열심히 여러 곳을 뛰어 다니며 일했습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 그렇게 뛰어다니지 않아도 살만 한데 왜 그렇게 돈을 법니까?”그때 임신한 아내의 배를 가리키며 “이 아이가 곧 세상에 태어날 텐데 이 아이를 위해서 내가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클라크 게이블은 그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 그의 재산을 보았을 때 그 당시 돈으로 백만 불이 넘는 돈이었습니다. 과연 그가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 산 것이냐?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는 돈에 대한 욕망을 아이의 이름으로 돈의 함정에 빠져서 살아간 사람이냐? 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 한 분이 부흥회도 다니고, 꽤 큰 교회 목회를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부흥회를 가기로 한 교회에서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목사님, 어떤 차를 타고 오실 거예요?”“왜요?”라고 물었더니 “목사님, 목사님은 교회도 크고, 부흥회를 다니시는 분인데 혹시라도 우리보다 작은 차를 타고 오시면 우리가 목회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알아서 타고 오십시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목사님이 어떤 차를 타느냐에 대해 신경을 쓰십니까? 어떠십니까? 그럼, 제가 좋은 차를 타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게 좋습니까? 그럼, 제가 좋은 차를 타고 싶어 할까요? 아닐까요? 저, 좋은 차를 타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좋은 차를 타면 그것 때문에 은혜 받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기준을 세웠습니다. 기준은 누가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분당 45세의 중년 남성들이 타는 정도의 수준의 차를 타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분당 만나교회에 있으면서 청빈한 생활은 못합니다. 자신 없습니다.’그래서 저는 여기서 목회 하면서 보통 수준에 맞춰서 이 사람에게도 맞출 수 있고, 저 사람에게도 맞출 수 있는 그런 기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타고 있는 차, 가지고 있는 집,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혜택들 이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 뿐 아니라, 여러분이 집사, 권사, 장로로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여러분이 쓰고 있는 돈의 용도, 사용하고 있는 돈의 양들 이것이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잘못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고민

우리에게 필요한 근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돈이 좋은 것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돈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어떤 필요를 따라 살아갈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어떻게 하면 묻어두지 않고 잘 활용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번 돈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아마도 자주 말하게 될 텐데, 우리 만나교인들은 죽을 때, 교회에 모든 유산을 다 내놓았으면 좋겠다. 라는 것입니다. 아멘이 잘 안 나오죠?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자식들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 이상은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꿈은 우리 교회가 돈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교인들이 이 교회를 믿고 신뢰하며 내가 죽을 때 남겨진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며 교회가 이 재산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더 할 수 있고, 지경을 넓혀갈 수 있는 일을 감당하는 그런 꿈을 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까지 우리 교회에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을 내고 가신 분은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1호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빨리 안 나와도 좋으니까 언제든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은퇴하시고 교회에서 받은 집을 다시 교회에 내 놓으셨을 때 가족들이 모두 기뻐했습니다. 교회에 내 놓는 것으로 하고 전세로 살고 있는데, 아마도 저희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교회에 다시 내 놓을 것입니다. 그 집을 가져서 무엇 하겠습니까? 자녀들에게 줘서 무엇 하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저도 여기서 목회 하다가 안 쫓아내면 끝까지 여기에 남아 있다가 제가 죽으면 교회에 다 내 놓으려고 합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필요한 것만큼 살아가다가 더 중요한 것에 돈의 은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않겠습니까?

「돈」에 대한 반듯한 생각

돈의 영적인 차원, 도덕적인 차원에서 돈의 욕망에 여러분이 도덕적으로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크리스천이면 고민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번에 맥추감사주일을 맞으면서 따로 설교를 준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저희들에게 반년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분명하다면 그 축복은 쌓아야 될 것이 아니라, 나눠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물질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번 맥추감사주일 헌금은 말씀에 따라 사용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와 여러분의 삶이 돈의 문제 때문에 일희일비( 一喜一悲)하는 것이 아니라, 폼 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더 많은 돈의 은사를 맡겨 주시고, 우리는 더 많이 쓸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