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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긍휼 (롬 9: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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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긍휼(롬9:14-18)

오늘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 것 아닌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면 사실 하나님께 문제 있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도의 답변이 단호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시고 감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창1:26절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의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 무엇인가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하나님의 작품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땅에 충만하여 다스리고 정복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지난주에 있어졌던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잇어 오직 은혜이다 하나님의 주권섭리이다 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3절에 무어라 합니까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합니다. 인간은 감히 왜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불의하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한 사람은 미워하고 한 사람은 택하시고 한 사람은 버릴 수 있냐는 것입니다.

제법 인간은 정의를 말하며 하나님께서 감사함으로 문제를 찾아 보려 합니다. 하나님이 불의 하신 것 아닌가입니다. 구원은 조건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이것을 말하는데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합니까 인간안에서 인과관계의 논리가 나도 모르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즉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런 사상이 구원의 문제에서도 똑같이 적용하려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에 6-13절에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택하시고 이스마엘은 버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함께 리브안에서 잉테되어 있는 중에 야곱은 택하시고 에서는 버리신 이야기도 나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구원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결정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의 백성 삼으신 것은 행위이전에 결정난 은혜의 사건입니다. 이것를 불가항력적인 은혜 또는 예정론 혹은 선택교리라 합니다.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만세전에 구원자를 선택하셨다는 교리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인간의 이성을 당혹하게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말도 안된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은 선택이 예정되었듯 버림도 예정되었고 천국가는 것이 결정되었다면 지옥에 가는 것도 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선택과 유기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이중예정이라 합니다. 문제는 잘 지어진 인간들이 이 말씀을 그대로 수긍하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두 방향입니다. 그냥 믿어야 된다는 것과 무슨 말이냐 어느정도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장로교와 감리교사이의 교리적 이질감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결정났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것 아니신가? 여기에 사도는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불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은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까요?

잘난 인간인 내가 이해해야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되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다 이해하고 삽니까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자동차를 다 이해하고 살지 않듯이 믿음입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살리시고 한 사람은 죽이시고가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사랑의 대상입니다. 다 죽어 있습니다. 일렬로 세워놓고 너는 살고 너는 죽고 너는 천국 너는 지옥이 아닙니다. 그냥 죽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미 진노의 대상이며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구원의 은혜를 입히신 것입니다. 그 구원을 받고 보니 감격인 것입니다. 왜냐고 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보면 다 믿어지고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무어라 합니까? 14-16절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원해서도 아닙니다. 달음질한다함도 아닙니다. 인간의 수고도 아니요 재주가 좋아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이니 이것을 믿으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입술에 고백이 있어집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어져야 할 3대 고백은 주님에 대하여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에 대해서는 나는 죄인입니다. 구원 받은자로서는 사명의 고백과 헌신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선택교리와 예정론은 인간의 이성으로 풀 수 없는 난제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믿어지고 감사가 나오며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리아십니다. 야곱을 미리 아셨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바로를 먼저 아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모르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하나님의 선택을 믿으면 모든 신앙은 주님이 이루신 결과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행위를 강조하며 이룰려 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구원역사는 하나님의 사건이고 하나님안에서만 믿음으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도 모세도 세움을 입은 자로 15절에서 말씀합니다. 구원의 역사에 동참자로 모세를 방해자로 바로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출생이나 바로의 출생도 하나님이 미리 관여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구원사역 앞에 나는 어떤 자로 설 것인가

레위남자와 레위여자에게서 모세를 출생하게 하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세에게 은혜를 입히셨습니다. 긍휼을 입은 자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구원의 가치를 압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해서도 하나님을 부정하며 불신앙으로 빠져들자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이 백성들을 광야에 전염병으로 죽게 만들겠다하자 모세는 이 백성을 멸하시면 이방인들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여호와의 신이 자기 백성을 버렸다하지 않겠습니까 하며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기념책에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 하며 영혼을 걸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양보하십니다.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9:15절의 말씀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이 여기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 많은 일들 속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어떠했습니까 여호와가 누구냐 하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강팍해질데로 해진 바로에게 하나님은 열가지 재앙을 통해 바로를 굴복시킵니다. 18절은 말씀합니다. 바로를 강팍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악해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바로를 강팍하게 하셨다는 말은 못되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 강팍한 상태로 하나님이 유기하셨다는 의미가 더 가깝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성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버려두면 악하고 강팍해집니다. 내안에 가인이 있고 내안에 야곱이 있고 내 안에 바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혜를 주셔서 그 마음에 더 이상 강팍해지지 않도록 관여하십니다.

우리는 시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로 살아왔는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 합니다.
세상에가장 큰 긍휼과 은혜를 입은 사람은 모세도 아니요 바로도 아니요 바로 나입니다.

그 은혜는 내 마음 내 생각하나까지 간섭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결국을 볼때까지입니다. - 아멘 -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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