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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의 힘 (왕상 16: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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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열왕기상 16장 29절~34절
제  목 : 말씀의 힘 

1. 그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들

실제로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공기입니다. 이 공기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고 또 냄새를 맡을 수도 없지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되는 곳이라도 공기로 가득 차 있으며, 따라서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것이 공기입니다. 우리는 이 공기를 내뿜기도 하고 들이마시기도 하며 살아가고, 또 존재하는 대부분의 생명체들도 이 공기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공기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기가 물질이며 무게를 갖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 사람은 갈릴레이인데요. 갈릴레이 이후,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로는 이 공기가 힘을 가지고 있는데, 공기의 힘 혹은 공기의 무게를 말하는 1기압이 가진 힘이 약 1.3kg 정도 된다는 것입니다. 1.3kg이라면 그 힘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력이라는 것입니다. 중력이란 지구가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을 말합니다. 만약 중력이 없다면 저와 여러분은 여기 앉아 있을 수도 없고, 건물이든 뭐든 이렇게 땅에 박혀 있을 수도 없게 됩니다. 아마 공중에 붕붕 떠다니고 있겠지요. 이 중력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요? 중력의 힘이나 크기를 제는 방식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아주 복잡하구요, 일반적으로 높은데서 물건을 떨어뜨리면 아주 빠르게 떨어지는 그 속도를 중력의 힘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속도에 대해서 학자들은 빛의 속도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구가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인 중력은 빛의 속도로 물체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그 힘만큼 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중력이라는 것이 쎈데도 우리가 잘 못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이와 같이 공기나 중력처럼 그것이 가진 힘이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쉽게 느끼지 못하는 것들은 제법 많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그러한 것들을 다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오늘도 공기는 우리 곁에 있습니다. 조금 오염이 되긴 해도 말이죠. 그리고 우리가 느끼지 못해도 지구가 물체를 당기는 중력도 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그 힘을 인정하고 그것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그만큼 여러분에게 손해인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의 힘입니다.

2. 말씀을 존중하자!

1) 성경 말씀의 힘

요즘 우리 교회가 새벽기도회나 개인적으로 묵상하는 본문이 열왕기서이지 않습니까? 저는 열왕기서를 묵상하면서, 이 열왕기서만큼 말씀의 힘을 강조하는 성경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즉 말씀의 기준대로 살 것을 요구하신 것이죠. 남 왕국 유다에서 새로이 왕에 즉위하는 자에게는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면 복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자에게는 ‘북 이스라엘의 첫 왕인 여로보암의 길로 행치 아니하면 복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남 왕국 유다의 왕이 된 자가 다윗의 길, 즉 하나님 중심으로 그 말씀대로 산 그 길로 가야하고, 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말씀을 무시한 여로보암의 길을 버리고 말씀을 따라 걷는 길로 가야 했습니다. 특히 북 왕국의 경우, 왕이 된 자가 말씀의 길이 아닌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그와 그의 자손과 온 집안을 멸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이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무시한 그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먼저 북 왕국의 첫 왕인 여로보암의 경우,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10개 지파라는 큰 몫을 주어 왕으로 삼으시면서 다윗처럼 행하면 그와 그 자손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서 자신이 우상을 숭배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우상숭배장려정책을 폈습니다. 정책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도록, 즉 왕과 국가가 나서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은 그의 자손들이 다 멸절될 것이며 그 자손 가운데 평안히 죽어 무덤에 제대로 장사되는 사람이 없이 짐승의 밥이 되는 비참한 신세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그 말씀을 귀 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뭐 그럴라구?” “설사 그런 일이?”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대에 가서 아들과 온 가족들이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비참하게 온 집안이 폭싹 망해버린 여로보암의 집안을  뒤이어 왕이 된 사람은 바아사였습니다. 그가 왕이 될 때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여로보암의 길로 가지 말아라.” 그러나 그 사람 역시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죄악을 일삼자 하나님께서 다시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로보암의 집처럼 쓸어버려 자손이 없게 하고 그렇게 죽은 자를 짐승들이 먹게 하겠다.” 바아사는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가 온 집안이 비참하게 끝나는 것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무시하여 흘려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로보암의 경우보다 더 비참했습니다. 여로보암은 그 집안만 멸망했지만, 바아사의 경우 온 집안만이 아니라 그와 친분 관계가 있던 사람들까지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러한 모든 사연을 잘 아는 인물인 오므리가 왕이 됩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합니다. 그런데 이전에 있었던 그 어떤 사람보다 더욱 악을 행했습니다. 16장 25절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것의 새로운 기록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 오므리의 아들로서 왕이 된 아합은 한술 더 떴습니다. 30절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라던 여로보암보다 더 악한 왕이 오므리 왕이었는데,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아합 왕에게 붙은 수식어는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했다”는 것으로서 결국 아합 왕이 자신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기록을 깼다는 말입니다. 기록은 깨어지라고, 경신하라고 있다고 하지만, 이런 기록은 안 깨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죄 짓는 신기록, 범죄의 신기록,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신기록을 세웠다는 말입니다. 누가요? 아합 왕이요!

2) 말씀을 무시하는 자에 대한 경고

이렇게 아합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사람이었다는 기록의 끝 부분인 34절에 보면, 히엘이라는 사람이 여리고 성을 쌓은 기록이 나옵니다. 즉 왕들과 그 왕들의 업적을 중심으로 기록 되어 오던 성경 본문에, 그리고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와 오므리 왕조의 왕들에 대한 기록이 계속 되다가, 왕들과 왕궁의 이야기 사이에 갑자기 여리고 성 이야기와 여리고 성을 쌓은 히엘이라는 사람에 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34절에 보면,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데 건축 초기에 장남을 잃었고, 건축 말미에 막내아들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한꺼번에 두 아들을 잃은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이나 그 가족들에게 이만큼 안타깝고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리고 성을 쌓던 히엘과 그 자녀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리고는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성읍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여리고가 중요한 곳이 된 것은 출 애굽한 이스라엘이 40년 간의 방랑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최초의 가나안 성읍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으로 진군하던 이스라엘이 마주한 여리고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이 성을 6일 동안 하루 한 번씩 돌고, 7일에는 7번을 돌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그 결과 여리고 성이 무너져 기적적으로 가나안 진입의 첫 걸음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앞으로 이 성을 건축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기초를 쌓을 때 장남을 잃고 마지막 과정에서 막내아들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여호수아 6장).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히엘이라는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 여리고 재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런 말씀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꼭 말씀대로 된다는 법도 없고, 그리고 그 말씀이 있은지도 500여 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뭐 그럴까?’ 하고는 여리고 성을 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초를 놓을 때 정말 오래 전 그 말씀대로 장남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아, 이것 봐라? 정말 수백 년 전의 말씀대로 장남이 죽네!’하면서 깨닫고는 얼른 그 일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부득부득 성을 쌓다가 결국은 막내아들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헛되지 않고 그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5백년이 아니라 수천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능력의 말씀, 권능의 말씀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의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우선은 말씀을 무시하고 여리고 성을 쌓은 히엘에게 경고하는 것이었고, 범죄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아합을 향한 메시지였습니다. ‘너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데, 말씀을 무시하는 자의 결과가 어떤지 아느냐? 여리고 성을 쌓으려던 히엘 집안의 불행을 눈여겨보고 얼른 깨달아야 할 것이다. 만약 깨닫지 못하면 너 역시 말씀대로의 진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된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고 애쓰는 자는 다윗의 복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무시한 자는 여로보암, 바아사, 그리고 아합이 받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 말씀과 그 힘을 누린 사람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 이후에 등장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예, 그는 바로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그렇습니다만, 이 엘리야는 특히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버린 이스라엘과 아합 왕을 향하여 자신에게 주시는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고, 그 자신이 말씀을 따라 철저히 살아갔습니다. 요단 동편 그릿 시냇가에서 인류 최초로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밥을 먹으면서 지냈고,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 얹혀살면서 그 가정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고대 사회, 남편 없고 재산없이 어린 아들 하나 데리고 홀로 사는 여인이, 그것도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지독한 기근의 때에 살아남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면, 아들과 함께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밥 지어먹고 그리고 함께 죽자’했던 그 최후의 양식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지자를 위하여 대접했더니, 그 말씀에 순종한 그 일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죽었으나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놀라운 일도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엘리야에 대한 기록이 의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그 말씀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때에라도 풍성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여 받드는 사람의 말은 하나님께서 그를 존중히 여기셔서 그가 구하는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가 귀히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떠받드는 자가 그 자신의 말을 존중하여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즉 오늘 본문이나, 열왕기서, 그리고 성경 전체가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것은 말씀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어 말씀의 힘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엘리야처럼요!

3. 말씀의 힘을 알고 그 힘을 누리자!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시대는 오늘 본문의 엘리야 선지자 시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무시하는 모습이 가관이었습니다. 아예 아합처럼 안면몰수하고 하나님과 그 말씀을 무시하는 것보다 더 나빴습니다. 당시 무리들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기도를 하고 나오면 어김없이 묻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이 있었습니까? 그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엄중하다는 말은 ‘몹시 엄하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뜻입니다. 기도하고 나오는 선지자에게 혹시 하나님께서 계시의 말씀을 주셨을까 해서 물은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엄중한 말씀이라고 하고서는 선지자가 주신 말씀을 전해주면 그것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레미야의 시대 사람들이 나빴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합 왕이나 당시 이스라엘처럼 드러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레미야 시대처럼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척 하면서 삶에서, 가정이나 직장에서, 대인관계나, 일이나 업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불행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신중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 두렵고 떨면서 순종하고 복종하고 실천하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그 사람과 공동체와 우리 시대에 말씀이 희귀해 지고, 말씀의 권능이 사라지며, 하나님께서 성도의 말에 귀를 기울여 응답하시는 것이 드물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시작하면서, 공기나 중력처럼 그 힘이 대단한데도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것들은 몰라도 됩니다. 몰라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기본 자세요, 그렇게 살 때에 말씀의 풍성함과 그 힘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와 같이 말씀의 힘을 알고 그 힘을 풍성히 누리는 자리에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의 힘은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이 누리도록 예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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