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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종하는 믿음이 기적을 낳는다! (창 2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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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하는 믿음이 기적을 낳는다!
창세기 22:1-13

목사로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깨닫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절박한 문제는 외부의 환경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환경으로부터 오는 외부적 고난은 사실 내부적인 문제를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외부적인 고난과 고통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고통 때문에 훨씬 행복하지 못하게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자신의 내면을 한 번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생각해 보십시오.  환경으로부터 오는 어떤 외부적인 고난이 나를 힘들게 합니까, 아니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기 내면의 반응이 나를 힘들게 합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기 내면의 반응입니다.

보십시오.  똑같은 사건인데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평범하게 반응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아픔과 상처로 반응합니다.  똑같은 환경인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그렇게 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 반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바란 광야로 나가보십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어느 날 바란 광야에 진을 치게 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열두 명의 정탐꾼을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합니다.  그들이 40일 동안 그곳을 두루 다니며 정탐한 후에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서 진지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땅에서 가지고 온 과일을 내 보이면서 모두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그 땅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열 명의 정탐꾼은 그곳에서 거대한 아낙 자손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보니까 가슴이 꽉 막혔습니다.  그들에 견주어 보니까 자신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가나안 족속들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망했다는 겁니다.  차라리 돌아가자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갈렙과 여호수아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분명히 갈렙과 여호수아도 똑같이 거대한 아낙 자손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은 거대한 아낙 자손보다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전쟁은 우리와 저 아낙 자손의 싸움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과 저들 신과의 싸움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두 사람은 당당하게 외칩니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문제가 무엇입니까?  문제는 외부적인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면의 반응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자기 내면을 정복하십시오.  자기 자신을 정복하지 못한다면 세상에 아무리 큰 개혁이 일어나도 그 인생은 불행합니다.  자기 내면을 정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데려다 놓아도 불평하고 원망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내면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믿음의 사람은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으로 자신을 정복하고 올바른 신앙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자신을 정복하십시오.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어떤 외부적인 환경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흔들지 마십시오.  외부적인 고난이나 곤고함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흔들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 때문에 자신의 사명과 헌신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자신의 믿음을 붙잡고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붙잡고 사명을 불태워야 합니다.

분명히 애굽을 나와서 약속의 가나안을 향해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믿음을 붙잡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 두 사람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전부가 불평하고 원망할지라도 나만은 두 손 들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소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다 끝났다'라고 할 정도로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나만은 믿음을 붙들고 창조적인 신앙으로 일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동양은 샤머니즘과 유교와 불교의 문화권이어서 적극성이 부족합니다.  동양 문화는 부끄러움과 체면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은 부끄러움과 체면보다 상위 개념입니다.  나는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갈 수 있는 길이 신앙의 길입니다.  우리 동양인이 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토속 종교가 주는 부끄러움과 체면의 개념이 죄의 개념보다 약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란 자기 속에 혼란과 혼돈의 무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일어난 무질서의 개념이 부끄러움과 체면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안의 나를 무너뜨리는 혼돈과 무질서를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십시오.  그리고 자기 마음을 지키십시오.  무릇 신앙은 자기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내 속의 혼란과 혼돈이 물러가고 은혜와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자기의 성품, 자기 성격, 자기 본능적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본성이나 성품이나 감정이나 기질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자기 성질에 따라 살지 마십시오.  기질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오직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받아 주님의 평강이 나를 다스리게 하십시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혼돈과 혼란을 믿음으로 관리하고 믿음으로 지켜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문제를 감정과 기질에 맡기지 말고 믿음으로 붙들고 늘어지는 성숙된 신앙의 습관을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믿음으로 대응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위대한 성공의 길은 고난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다 성공의 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고 믿음으로 일어서는 그에게 고난은 성공의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 무엇인가?  바른 신앙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믿음으로 인내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어느 양계 업자가 깊은 산중에 들어갔다가 독수리 알을 얻어 왔습니다.  암탉 밑에 계란과 함께 독수리 알을 넣어두었더니 병아리가 부화될 때에 독수리도 부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 새끼는 자기가 병아리인줄 알고 똑같이 먹이를 쪼아먹으며 암탉을 따라다니더랍니다.  독수리가 엄청 커서 엄마 닭보다 훨씬 더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날 줄을 모릅니다.

양계 업자가 독수리로 하여금 날개 해 보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양계 업자는 독수리를 데리고 높은 벼랑에 섰습니다.  절벽을 향하여 독수리를 힘껏 집어 던졌습니다.  그때 이 독수리는 날개를 퍼덕퍼덕 해 보더니 날개를 쫙 펴서 하늘을 향해서 솟아오르게 되었습니다.  고개를 들고 소리를 지르며 높은 창공으로 솟아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하늘을 날기 원하십니다.  더 높이 날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땅만 보고 벌벌 기어다닐 때에 우리를 높은 벼랑으로, 높은 언덕으로, 절벽으로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벼랑을 향하여 우리를 집어던집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던지심은 우리로 하여금 죽으라고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땅 위에서 기는 삶을 살지 말고 저 높은 창공, 믿음의 세계를 향하여 날아오르라는 것입니다.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이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향한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 넘어지신 분은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땅만 보고 기어다니시는 분은 저 푸른 믿음의 창공을 향하여 솟아오르는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번제로 드린 이 모리아산 언덕에서 엄청난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하나님은 새롭게 아브라함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이레 -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이레'  이 말은 원래 '하나님이 보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성경은 보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성경에서는 공급하시는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개역개정판에서는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신다.  눈을 떼지 않고 우리를 지켜보신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갈망하는지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팔짱을 끼고 가만히 구경만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를 준비하시고 채워주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이 시간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이 모리아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그곳으로 가 보십시다.  100세라고 하는 고령의 나이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도저히 아들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때에 아들을 얻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아들을 얻고서 하루 하루 날짜가 가는 줄을 몰랐을 겁니다.  하나님 보다도 이삭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마음의 애정이 온통 이삭에게 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과연 아브라함이 당신을 더 사랑하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삭을 더 사랑하는지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명령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기억하십시오.  여기에서 번제란 그냥 하나님께 드리는 시늉만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물을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불로 태워 내게 바치라는 겁니다.

이 엄청난 명령을 듣고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떠났습니다.  사흘 길을 가니 모리아산 아래에 도착합니다.  두 사환에게는 나귀와 함께 산 아래에 기다리라고 한 후에 아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갑니다.

아들 이삭에게는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지우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 위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는 길에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잠시 잠깐 후면 이 아들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한 발자국씩 옮겨질 때마다 그의 가슴은 태산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길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아들 이삭이 아버지에게 말을 겁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삭이 아버지와 함께 산을 올라가면서 생각해 보니까 번제에 필요한 불이나 나무는 준비해 가면서 왜 정작 중요한 제물은 준비해 가지 않으시는 것일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한 것은 조금 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친히 어린 양을 준비하시리라는 것을 알거나 믿고서 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단지 아들 이삭이 물어오니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 고백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체험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고백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때의 상황을 기록하기를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의 여정을 떠났을 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25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그는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가는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온 지 얼추 못 잡아도 50여년의 세월이 흘렀을 겁니다.

그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도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온지 반백년 동안 그의 삶에서 뼈저리게 경험하고 깨달은 것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손해를 보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기적을 이루어주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에 그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땅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친척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가족을 준비해 주시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니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 그분임을 그의 삶 속에서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뜻을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말씀에 순종하면 나와 내 가정에 결코 손해를 보게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고 제일 편하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삶인 줄 알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제일 평안한 삶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지시하는 그 땅으로 가라.  그곳이 어디입니까?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시는 그곳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이 가장 편안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일 쉽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죄 짓지 않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제일 쉬운 방법입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 그 삶이 가장 쉬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안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어떻게 평안히 살 수 있습니까?"라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만 붙들고 사는 것이다."
그 손으로 많은 것을 붙들고 살려고 할 때에 거기는 갈등과 번민과 고민이 있지만, 하나님만 붙들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심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 힘으로 많은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면 우리의 초점이 흐려져서 많은 갈등과 염려와 근심이 있지만,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맞추고 살아가면 네 삶이 평안해 질 것이다.  이것도 붙들고 이것도 믿어보려고 하지만 하나님만 믿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평안한 삶이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삶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가장 확실히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님만 믿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평안을 잃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가장 확실하고도 분명한 길은 오직 하나님만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분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칼을 들어 이삭을 잡으려 하는 순간입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 그것도 100세의 고령의 나이에 얻은 독자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장차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 약속을 따라 주신 후사입니다.  그 아들을 죽여 불로 태워서 드리려는 순간입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으며, 어떠한 생각을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100세의 고령에 자식을 주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후사가 되게 해준다고 약속하실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또 빼앗아 가시는 것은 무슨 심보입니까?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대들었을 법합니다.  저 같았으면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한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삭을 바치면서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후에 히브리서 11장 17절 이하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해서 생겼겠는가 하는 것은 로마서 4장 17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이 해명해 놓은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이 되었고, 아내 사라도 90세가 되어 그녀의 몸이 죽은 것 같이 되었지만 믿었습니다.  실제 약속대로 이루어진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심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으며, 이삭을 받칠 때에도 그러한 믿음으로 받쳤을 것입니다.

자식을 번제로 받쳐야 하는 아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원통해 하는 심정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개인의 사적인 부자(父子)의 정에 매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고령의 나이에 얻은 독자이었지만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받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칼로 이삭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말합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한마디로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이삭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컸기에 이삭을 아끼지 아니하고 받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독자까지도 아낌없이 받쳐 순종했던 아브라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에 받칠 어린 양을 미리 준비하셨고 제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이 위대한 기적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기적을 낳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이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독자 이삭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순종할 때에 기적을 낳았습니다.  독자 이삭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삭 대신에 받칠 수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는 하늘의 기적을 낳는 믿음의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아끼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네 아끼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아끼는 것을 내려놓을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늘의 기적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것이나 챙기면서 희생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는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이라도 아끼지 아니하고 드려서 순종하고자 하는 자의 믿음을 통해서 기적을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시고 제공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늘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은 나보다 하나님이 더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시고 기적을 베푸실 때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준비하시고 제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경영해 가시는 역사를 거스리며 살아가는 자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시고 제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울 왕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해줄 테니 거기서 얻는 모든 전리품은 다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승리를 준비하시고 제공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사울 왕은 약속하신 대로 전쟁에서의 승리를 제공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아무리 좋은 전리품이라 할지라도 다 멸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리품 중에서 좋은 가축들을 죽이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고, 자기의 유익만을 챙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튼튼하고 탐스러운 가축들을 남겨두고 비틀거리고 병든 것들만 죽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준비하시고 제공하신 준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울 왕에게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셔서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를 어기고 "탈취하기에만 급급했느냐!"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거짓으로 변명하는 그에게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고 책망하시고, 그의 왕권을 박탈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더 좋은 것으로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 승전을 제공받고서도 자기의 유익만을 챙겼다가, 오히려 제공해 주신 은혜 마저 빼앗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기적은 그냥 가만히 있는데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를 희생하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려고 하는 순종하는 믿음이 있을 때에 기적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심과 축복하심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만든 창조주이십니다.  나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나의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분 앞에 붙들리십시오.  그분의 말씀 앞에 순종하십시오.

믿음의 기적을 보기를 원하신다면 내 안에, 내가 붙잡고 있는 이삭을 내려놓으십시오.  내려놓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과 함께 이 전을 나서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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