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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이 흥왕하여! (행 19: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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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흥왕하여!
사도행전 19:08~20 

때때로 정말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처럼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더욱 쉽게 지칩니다. 하지만 날씨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 때 그나마 몸도 마음도 다 지쳐 늘어질 때는 정말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디로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힘들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안 보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욕을 퍼부어대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니 돈이 뭔지 명예가 뭔지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이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볼 때는 그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세상이 어째 이렇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고요. 가면 갈수록 정도 사라지고 삭막해져만 가는 세상이지만 그렇기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더욱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그런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누가 우리를 향해서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도 괜히 트집부리며 비아냥댄다고 해도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향해서 밝을 웃음을 지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는 역사들을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세 달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믿지 않고 오히려 군중들 앞에서 욕을 퍼부어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떠나 신자들을 데리고 두란노 학원으로 가서 날마다 사람들과 토론을 하며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두란노 서원의 맞은편이 바로 창녀촌이라는 사실입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란노 서원과 창녀촌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기에는 너무나도 안 좋은 환경입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잘 알려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학문을 연구하기 위한 두란노 학원과 창녀촌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이곳에서 바울은 이 년 동안 계속해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아시아 지방의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울의 수고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의 손을 빌려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셨는데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이 몸에 지니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병든 사람 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그 말씀을 믿는 가운데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게 되었을 때 영혼 구원뿐 아니라 육신의 모든 질병으로부터도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해 주시는 분임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할 때뿐 아니라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바울이 지녔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 병든 사람 위에 얹었더니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 안에서 모든 역사가 일어난다고 로마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도 보았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날마다 성전에 모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또 각 집으로 돌아가며 함께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께서 많은 이적과 역사들을 보여주셨던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바울이 말씀을 가르치는 현장에서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변함없이 계속이 됩니다. 이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가 이제 단순히 예배하며 말씀을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새롭게 말씀으로 양육 받는 시간을 갖고자 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여기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으로가 아니고서는 믿음이 우리 안에 자리 잡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말씀을 배우고 익히게 될 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하게 되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믿음 안에서 놀라운 역사가 오늘도 동일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우리를 욕하고 훼방하고 힘들게 만들거든 그 때가 더욱 기도할 때요 그 때가 더욱 말씀으로 깊이 들어갈 때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라고 그래서 그 깊은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허락하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이적과 역사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 두란노 서원 앞의 창녀촌이 변해서 은혜의 현장으로 바뀌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삶이 지옥 생활에서 천국생활로 바뀌게 되고 우리를 얽매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자유함을 얻게 되는 귀한 삶이 날마다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생각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는 사람들과 사이비들이 있지만 그로 인해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세 달 동안 말씀을 전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믿지 않고 오히려 군중들 앞에서 도를 욕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말씀을 믿지 못하기에 욕울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믿는다고 하는데 나는 도무지 믿어지지를 않는단 말에요. 그러니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바보처럼 여겨지고 그런 어리석은 도를 욕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찌 생각해 보면 그 사람들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진리를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에 욕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의 결국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중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후회가 되겠습니까? 아니 그가 후회할 때는 이미 때가 늦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모든 기회가 다 사라지고 난 다음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노아의 때에 노아를 비웃고 욕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홍수라고 하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고 지금까지 홍수라고 하는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홍수 이야기를 하는 노아가 미친놈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노아를 욕하지 않고 비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짜로 홍수가 시작되고 난 다음에 “아하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구나. 노아의 말이 맞았구나” 하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다 끝난 다음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예수에 관해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욕하고 비난하고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얼마나 불쌍하냔 말입니다. 자기들은 지금 자기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옳은 줄만 알고 있으니 이처럼 불쌍한 사람들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유대인 중에서도 주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쫓아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파하는 그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너라”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유대인 대제사장 스게와라는 사람의 일곱 아들들이 바로 그런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악한 귀신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예수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너희는 누구냐?” 그러더니 귀신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드는데 귀신들린 사람은 스게와의 아들들보다 힘이 세어서 그들을 때리고 옷을 찢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벌거벗긴 채 그 집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하냐고 하면 “바울이 전파하는 그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너라”고 귀신들린 사람에게 말할 정도라면 예수의 능력이 귀신을 쫓아내는 힘이 있음을 이미 그들 자신이 인정하고 있다는 뜻인데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그 예수를 믿지도 않고 있으니 이처럼 불쌍한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대제사장의 아들들이니 그들도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는데 그 아들 예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귀신도 쫓아내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했다면 그렇다면 누가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서는 아니 되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나간다면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들이 인정했어야 합니다. 아니 그 예수를 믿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믿지도 않으면서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했으니 이처럼 불쌍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 스게와의 아들들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교회 안에도 있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분명히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믿기보다는 그저 함께 어울리는 것만 좋고 그 예수를 이용해서 장사하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는 그런 사람도 있더란 말입니다. 교회에 다닌 지는 오래 됐는데 여전히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지 못한 채 그냥 교인으로만 남아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여기 스게와의 아들들과 같은 사람이요 그런 사람은 쭉정이와 같아서 막상 주님이 오실 때 버려지게 될 수밖에 없으니 어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귀신들도 그런 사람은 우습게봅니다. 여기 스게와의 아들들에게 귀신들린 사람이 덤벼들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를 비난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욕보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속상해할 까닭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히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스게와의 아들들이 귀신들린 사람에게 쫓겨서 망신당하고 도망친 사실이 에베소에 있는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지지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이 행한 일들을 고백하며 바른 믿음 안에 서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을 욕보이는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를 욕하고 비난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바로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놀라운 일들이 생겨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억울하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큰 망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애매하게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마냥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되는 일이 오히려 펼쳐지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당하는 모든 환난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을 증거해 주는 것이요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환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당치 못한 시험 당함을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신다고 했고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 했으니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고 힘들고 어려울 때 오히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했던 다윗처럼 감사하는 믿음을 통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스게와의 아들들이 “바울이 전파하는 그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너라”하고 귀신들린 사람에게 명령했다고 거꾸로 톡톡히 망신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믿음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들 중에는 마술을 부리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마술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눈속임의 마술이 아니라 이 당시 마술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무당처럼 귀신의 힘을 빌어서 하는 것이었기에 오늘날로 말하면 점쟁이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철저히 마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자기들의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때 그들은 그냥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밥벌이가 되는 마술책을 가져다가 사람들 앞에서 다 태워버림으로 자기들이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마술을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믿고 살아가겠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를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이렇게 모아서 태워버린 마술책 값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책값이 자그마치 은화 오만 개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은화 한 개는 한 데나리온에 해당이 됩니다. 그러니까 은화 오만 개 가량의 값어치라고 하면 이는 오만 데나리온이라는 뜻입니다. 그걸 오늘날로 계산해 보면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에 해당되니까 오늘날 노동일을 하는 사람의 하루 일당을 그냥 오만 원으로 생각을 한다고 해도 이는 25억 원에 해당되는 값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태워버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게 반값에만 넘긴다고 해도 10억 원이 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다 태워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렇듯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것까지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돈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기 마술하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먹고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마술책을 다 태워버렸다고 하는 것은 다시는 마술로 돈을 벌지 않겠다는 확실한 표현인 것이요 더 나가서 그 돈을 버는 도구였던 책을 그것도 아주 비싼 책을 조금도 아까지 않고 다 태워버렸으니 이는 보통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그를 위해 우리의 직업을 다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라고 한다면 이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그것도 몇 십억 원을 다 버리고 빈손으로 새 삶을 시작하라고 한다면 과연 그렇게 하겠다고 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런데 이 마술하던 사람들을 조금도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터전이 되던 마술을 다 버렸습니다. 그 책도 불살라 버렸습니다. 다시는 그 길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을 위해서 믿음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아주 막대한 대가를 치룬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가기 위해서 믿음을 위해서 과연 우리에게 이런 희생을 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은혜 받기 위해서 한 시간 투자하는 것조차 힘들어 하지를 않습니까? 아니 은혜를 위해서 하루 이틀 회사를 결근하라고 한다면 과연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랬다간 나는 회사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그건 안 될 말이라고 하지를 않겠습니까? 아니 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집이라도 팔아서 드리라고 한다면 아이구 이런 교회 있다간 남아나는 것이 없겠다고 하면서 슬금슬금 떠날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들 가운데는 그럴 분이 한 분도 안 계실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경우가 조금 다르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기 까닭에 회사라든가 사회에서 당하는 불이익이 참으로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들은 별짓 다해도 괜찮고 우리는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교회에 다니는 것들이 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막말을 해 댑니다.

하지만 그럴 때 힘들어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이런 고난을 참으면 마침내 정금같이 나오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감사하며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노라면 그리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을 끝까지 사랑으로 대하게 되면 이윽고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앞에서도 욕을 해대도 뒤로 다니면서는 그 사람은 진짜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바로 그런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것들로 채워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슬프고 힘들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서 감사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도록 하나님이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늘 하나님 앞에 감사 찬양했던 다윗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서도 가장 귀한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믿음 안에서 우리가 당하는 그 어떤 고난에도 감사하며 주를 위해서는 나의 가장 소중한 것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우리가 되심으로 이런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담대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바로 우리 안에서 말씀이 흥왕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말씀이 능력으로 자리 잡을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말씀을 계속해서 배워서 말씀 안에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말씀이 바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바로 사랑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날마다 말씀으로 깨우쳐나가게 되면 그 말씀의 능력이 나로 하여금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내 안에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씀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말씀을 묵상하고 배우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진정한 말씀의 사람 능력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말씀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말씀을 배울 때 그 능력이 하나라면 말씀을 가르치게 되면 그 능력을 열이 되고 백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르치게 될 때 그 말씀이 더욱 내 안에 새겨지게 되고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럴 때 그 말씀의 능력으로 내가 지금까지 붙잡고 내려놓지를 못했던 욕심도 내려놓을 수 있고 미련도 내려놓을 수 있고 모든 잘못된 행실로부터도 바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이요 그로 말미암아 바로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채워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모두가 이런 말씀을 배우는 사람을 넘어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 그래서 우리에게서 시작해서 말씀이 더욱 넓게 퍼져나가도록 함께 힘쓰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풍성하게 채우시는 귀한 역사가 나타나기를 그리고 바로 그런 우리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 앞으로 나아오게 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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