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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는(2) (히 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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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는(2) (히 11:8~19)

지난주에 이어

지난주에 같은 본문 같은 제목을 가지고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믿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주에는 이들 부부의 믿음이 두 가지로 귀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기억나십니까? 첫째로,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으로 비록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천국을 사모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귀하다고 했고, 둘째로 보이지 않는 후손을 믿는 믿음으로 비록 처음에는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고 의심하고 비웃고 다른 인간적인 방법까지 써보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들인 이삭을 얻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믿음의 특징 세 번째와 네 번째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믿음의 조상이요 믿음의 원조라고 할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믿음을 살피고 본받는 귀한 시간 되기 바랍니다.

부부가 함께 믿음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믿음의 특징 세 번째는 부부가 함께 믿은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다 함께 본문 11절을 읽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지난주에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보이지 않는 후손을 하나님이 주실 줄로 믿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은 부부가 함께 믿을 때 참다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11절을 보세요. "믿음으로 누구는?"이라고 했습니까?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라고 했지요. 히브리서 11장은 앞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원 자료가 되는 창세기도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만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믿음의 조상' 하면 아브라함만 생각나지 사라는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11절에 들어서서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라고 말한다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왜 굳이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사라의 믿음이라고 말한 것일까요? 그것은 적어도 자식을 낳는 부분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어머니의 믿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생물학적으로 설명해 봅시다. 여러분, 아이는 누가 만드는 낳는 것입니까? 질문이 어려운가요? 아이는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만듭니다.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결합해서 아이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버지와 어머니 어느 한쪽이 없으면 아이는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렇게 생겨난 아이가 열 달 동안 누구 뱃속에 들어가 있습니까? 어렵나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아기는 양분을 받고 체온을 나누며 편안히 자라납니다. 그러다가 열 달이 차면 아이는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몸은 아이를 만들고 키우고 태어나게 하는 가장 소중한 모태입니다. 어머니가 없으면 아이는 생길 수도, 자랄 수도, 태어날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열 달이라는 임신 기간 동안 아이는 어머니의 체온과 양분과 그리고 정서와 신앙까지도 나누며 자랍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이 기간 동안 몸은 어떤 상태냐, 어떤 것을 먹느냐, 심지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음악을 듣느냐 까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물론 이 열 달 동안 아버지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누구보다 어머니가 중요합니다. 아버지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지만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이 모태에 있는 기간 동안 어머니의 육신적, 정신적, 영적인 절대 영향을 받고 자란 아이가 그러면 태어난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태어난 후에도 역시 아이의 양육은 어머니가 맡습니다. 그래서 물론 아버지도 아이의 인격과 신앙에 영향을 미치지만 늘 품에 안고 젖을 먹이고 양육하는 어머니가 아이에게 어떤 인격적, 신앙적 영향을 미치는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아버지뿐 아니라 누구보다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 우연히 TV를 켜니 <조폭마누라 2>라는 영화를 합니다. 작품성은 별로 없는 B급 오락영화인데 저는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일이 한 번도 없어서 줄거리를 잘 모릅니다만 아마 주먹께나 쓰는 여자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TV를 켰을 때 마침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날 이 조폭 여자가 시장에 갔는데 어느 가게에서 아주머니와 가게 주인아저씨가 시비가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게 주인아저씨가 참 거침 사람이에요. 아주머니를 향해 "여자가 재수 없게 덤빈다."며 행패를 부립니다. 우리 주변에 아직도 이런 남자들 꽤 있지요? 그랬더니 지나가던 그 주먹 센 여자가 이 남자를 때려눕히며 이렇게 묻습니다. "네 엄마 여자야, 남자야?" "여자요." "너 여자한테서 태어났어? 남자한테서 태어났어?" "여자요." 물론 웃으라고 하는 장면이지만 저는 이 장면을 상당히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여자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엄마는 여자입니다. 그만큼 생물학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여자인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 사실을 잘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앞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하다가 아들을 낳는 부분에 가서는 굳이 어머니인 사라를 언급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믿음의 자손 이삭을 낳는 부분에 있어서는 남편인 아브라함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아내인 사라의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어머니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어머니가 올바른 인격과 신앙으로 자녀를 태교하고 또 태어난 후에도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언급했습니다만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똑같은 말이지만 남편의 믿음뿐 아니라 아내의 믿음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들 부부가 남편인 아브라함뿐 아니라 부인 사라도 함께 잘 믿었기에 그 믿음이 더 갚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부 사이라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부부는 무촌(0촌)이기 때문에 헤어지면 아무 관계도 없는 남남이 되지만, 힘을 합하면 1+1=2가 아니라 100도 될 수 있고 1000도 될 수 있는 법입니다. 특히 이 사실은 영적인 부분에서 중요한데 그래서 한 가정에서 아내만 믿어도 안 되고, 남편만 믿어도 안 되고, 남편과 아내가 다 믿어야 온전한 믿음이 되는 법입니다. 또 아내만 잘 믿어도 안 되고, 남편만 잘 믿어도 안 되고, 남편과 아내가 다 잘 믿어야 그 믿음이 백 배, 천 배의 능력과 영향력을 끼치고 하나님 앞에 큰 복을 받는 믿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아내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제가 심방할 때 아내들을 위해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믿음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기도하는 아내가 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한 여자가 가정에서 아내라는 역할과 어머니라는 역할을 함께 감당하게 되는데 어떤 아내요 어떤 어머니가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물론 살림 잘 하고 요리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아내가 되어 남편과 더불어 이 가정의 믿음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되어야 하고, 믿음의 어머니가 되어 자녀들을 기도로 양육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바로 이런 아내요 어머니가 있는 가정을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아내요 어머니이신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사라처럼 기도하는 아내, 믿음의 어머니 되어 내 가정을 복 받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남편 여러분은 내 아내가 믿음의 아내가 되도록, 믿음의 어머니가 되도록 아내를 인정하고 격려하고 배려하고 축복하셔야 합니다. 아내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집안의 모든 주도권을 혼자 쥐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아내가 바로 서지 못하면 남편은 절대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유능하고 뛰어난 남자지만 아내 때문에 실패하는 사람 참 많습니다. 아내가 자녀들에게 어머니로서 바로 서지 못하면 자녀 교육은 절대 안 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아내를 배려하고 세워주시면 반드시 남편인 내가 복 받고 자녀가 복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만으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이 되어야 비로소 내 가정의 믿음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믿음

마지막 네 번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믿음"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내 남편이나 아내 혹은 애인이 나를 진짜 사랑하나, 아니냐를 알려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가장 아끼는 것을 달라고 말해 보세요. 만약 그 사람이 돈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면 돈을 달라고 하세요. 보석반지나 차를 아낀다면 그것을 줘보라고 해보세요. 만약 주저하지 않고 준다면 나를 정말 사랑하는 것이고, 쭈뼛쭈뼛하면서 "이것 말고 다른 것을 주면 안 될까?"라며 피해간다면 당신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집에 가서 뭐 달라고 할 분 정말 많겠군요. 그러면 왜 그런가? 내가 제일 아끼는 것보다 당신이 소중하면 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안 준다는 말은 당신보다 그것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게 더 소중하냐, 내가 더 소중하냐의 경쟁입니다. 어떤 남편은 하도 난초를 좋아해서 아주 값비싼 난을 서슴지 않고 구입하고, 틈만 나면 닦고 쓰다듬고 한답니다. 부인이 자신을 위해서는 시간을 십분도 잘 안 내주고 단 돈 만원 주는 것도 벌벌 떠는 남편인데 날이면 날마다 난만 쓰다듬는 것을 보고 참다못해 이렇게 물었다는군요. "당신은 도대체 내가 더 중요해요? 난이 더 중요해요?" 그랬더니 남편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그야 당신도 중요하고 난도 중요하지." 거짓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둘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도 소중하고 이것도 소중하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나냐, 아니면 이것이냐 둘 중 하나를 분명히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부터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합니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백세에 낳은 외아들입니다. 그토록 우여곡절을 겪으며 겨우 얻은 금 쪽보다 귀한 자식입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프고, 내 자식 대신 나보고 죽으라고 하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소중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그 아들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산에 올라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놓으라는 것도 이해가 안 가지만 제일 소중한 아들을 아비 손으로 직접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니 이렇게 잔인한 법이 어디 있습니까? 충분히 항의할 만합니다. 아무리 하나님 명령이라고 불순종할 만합니다. 아마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안 바치더라도 사람들은 아비의 심정으로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한 마디 안 하고 아들을 바쳤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아브라함의 행동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물론 19절에는 아브라함이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저는 이 말로도 아브라함의 순종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믿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 누구보다, 세상 그 무엇보다 내 하나님을 가장 소중히 여겼기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더 이상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이삭은 두 번째였습니다. 이삭보다 하나님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기꺼이 이삭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셔서 이삭도 살려주실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감격하셔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요 원조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지요?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가 쇠도끼를 물에 빠뜨렸을 때 산신령이 나타나 "이 도끼가 네 도끼냐?"하고 금도끼와 은도끼를 내미는데 나무꾼은 바보 같이 자기 도끼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민 쇠도끼를 제 것이라고 해서 결국 금도끼와 은도끼까지 선물로 받게 되는데 그러면 이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정직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일까요? 우직하고 바보같이 정직하면 복을 받는다는 교훈을 가르치려는 것일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무꾼은 금도끼고 은도끼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낡은 쇠도끼가 가장 소중하다고 여긴 것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은 다 "이 바보야, 금하고 은이 더 비싸지 그깟 낡은 쇠도끼가 뭐 중요하냐? 금도끼 은도끼 가져다 팔면 그깟 쇠도끼 수천 개는 산다."고 핀잔을 주어도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도끼 은도끼 몇 백 개를 갖다 주어도 이 쇠도끼하고 안 바꾸겠다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오늘 우리보고도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금이나 은이 더 좋지 그런 구닥다리 신앙이 뭐가 좋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밥 먹여 주냐?"고, "예수쟁이들은 괜히 믿음 따지다가 손해만 보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라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준이 다른 것을 어떻게 합니까? 가치관이 전혀 다른 것을 어떻게 합니까? 나는 하나님이 좋은데요? 나는 세상에 금도끼 은도끼 다 주어도,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다 주어도 하나님 없으면 못 사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너, 세상 부귀영화를 다 줄 테니 나한테 한 번만 엎드려 경배하라."고 해도 싫다는데(마 4:8 이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이 가만 안 계신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조차 포기했는데, 그 좋은 것도 다 기꺼이 내게 줄 수 있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하면서 그 소중한 것뿐 아니라 다른 좋은 것들을 다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산신령은 아니지만 천지의 창조주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감격해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것입니다(마 6:33). 아브라함은 바로 이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17절에 나온 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가장 소중히 여겼기에 그 명령에 순종해 그 외아들까지 드렸는데, 2천 년 전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우리에게 외아들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존재는 바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외아들을 우리 위해 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우리를 가장 소중히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고 너무도 소중히 여기셔서 가장 소중한 외아들까지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311장에서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사하여 살 길을 주었다. 그런데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너 무엇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사 외아들까지 주신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분을 믿는다면서 나의 어떤 것들을 그 분을 위해 기꺼이 드리시겠습니까?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에게 이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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