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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만난 사람들 (눅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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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만난 사람들 (누가복음 5장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의 의미

  오늘 말씀은 특정한 본문에 의지하지 않고 내일부터 시작하는 변화산 기도회의 의미를 함께 나누는 시간으로 가지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5장 4절의 말씀은 실의에 찬 베드로와 형제들을 찾아오셔서 명령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번 변화산은 예수를 만난 사람들을 통해 각기 다른 환경과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삶이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 우리도 그 만남과 변화를 기대해 보려고 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석학이라 불리는 피터 드래커는 미래를 예측하며, 이제는 ‘제조업의 시대는 가고 서비스업의 시대인 21세기가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서비스란 무엇일까요? 좋은 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목회자가 가져야 하는 의식, 교회가 해야 되는 일이 바로 '서비스'라고 생각을 합니다. 목회자 자신이 무엇을 생산해 내려고 하면 지치고 고갈됩니다. 목회자의 역할이란, 교인들을 삶의 근원이 되시며 생명 되시는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고민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이것은 어떤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을 평가하며 어떤 사람들은 ‘군부 독재 시절이 더 낳았다. 그때에는 경제가 살았다. 오히려 무식한 대통령이 정치를 더 잘한다.’ 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노무현 대통력은 참 아는 것이 많으며, 달변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능력이 있고, 지금까지 어떤 대통령보다 많은 분야에 걸쳐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해박함이 모든 것들을 잘 해나가도록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미국 대통령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2007년 3월 2일 조선일보 칼럼에 보면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에 하나로 링컨과 레이건이 거론 된다고 합니다. 이류 할리우드 배우 출신으로 정치와 경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없었던 그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Great Communicator"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고 마음을 전달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소개합니다. 반면에 노 대통령은 스스로 “국민과 소통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라고 말을 합니다.

  어느 날 로널드 레이건과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이 만났을 때, 대처는 로널드 레이건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각 분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다보면 오히려 내가 더 돋보이고, 레이건 말고도 탁월한 사람은 얼마든지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로널드 레이건에게 분명 탁월한 점이 있었다. 그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경우 그 문제를 누구와 상의해야 할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 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삶의 다양성 속에서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문제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부터 7일 동안 특별새벽기도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와 만난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7일 동안 일곱 사람을 찾아 묵상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쩌면 삶의 위기, 문제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고 해결을 받고, 강력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도 그런 사람들과 같은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블로그' 시대라고 합니다. 인터넷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라는 고민을 가지고 'know-how'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많은 정보와 해법들이 인터넷을 통하여 공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문제는 'know-where'입니다. ‘어디에서 그것을 찾을 것이냐?’ 라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현대인들에게 복음의 능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내가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삶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문제의 해결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지으신, 그리고 이 시간도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시는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한, 그 주님에게서 우리의 문제의 해결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를 만나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떤 것도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우선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주님을 빼 놓고는 신성시 할 수 없습니다.

  몇 주 전 교구 전도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셀 모임에서 어떤 권사님이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나 3층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이 설교를 하다고 막 강조할 때면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 같아. 머리가 막 빛나는 것 같더니 머리에서 김이 나는 거야. 나 성령님의 역사를 본 거 맞지?"

  그러자 옆에 있던 권사님 한 분이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래 맞아 맞아 나도 봤어, 참 신기하더라구."

  그때 또 옆에 있던 권사님이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응, 사실은 나도 봤는데, 목사님이 열나서 머리에 땀을 흘리니까 그게 증발하는 거야."

  그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여러분! 목사는 목사입니다. 단지 여러분을 예배 가운데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매개체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누군가에 의존하거나, 추상적이거나, 허상을 좇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를 보면서 우리의 삶의 변화를 기대해야 합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

  변화산 기도회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두 가지를 권면합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책, 이현주 목사님의 [예수를 만난 사람들]을 읽어 보십시오. 이 책은 성경을 볼 때, 새로운 관점에서 묵상하도록 인도해 줍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여러분이 성경의 주인공의 모습 속에 여러분의 모습을 담아 묵상하는 훈련을 한다면 신앙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시작하는 설교는 제가 기도원에서 성경을 묵상하다가 만난 주인공들을 가지고 하나씩 풀어가게 될 터인데, 모든 주인공을 누가복음 속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간 중에 여러분이 저와 함께 누가복음 전체를 묵상하고 말씀을 듣는다면 훨씬 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제안은 제가 하지만 순종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한주간이 무척 바쁘다고, 다른 많은 일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주어진 '특별'이라는 것은 늘 우리에게 오는 기회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위대한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순종하는 것을 훨씬 더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다윗 왕'입니다. 성경을 유심히 보세요. 다윗은 한 번도 어떤 위대한 기적을 행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순종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중심을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다윗의 삶에는 늘 감동이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번 기회에 여러분의 순종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성경을 묵상하고, 말씀을 준비하면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공통점 내지는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내일부터 하루씩 구체적으로 다루어 가겠지만 오늘은 일반적인 내용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 문제의 해결함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야 자신의 삶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절박감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에 대한 소문은 오늘 여러분에게도 동일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변에서 주님을 만나고 이런 일이 있었다는 간증을 듣고, 주님께서 다가와 나를 이렇게 만져주셨다는 간증을 들으면 혹시 여러분에게도 영적 호기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아니 막연하게나마 나도 그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나의 삶에 소망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다가오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중에는 주님을 찾아 가서 만난 사람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에 다가 가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19장은 유명한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그 역시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3절에 보니까,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 궁금증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을 찾아갈 용기나 열정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다행인 것은 예수님께서 그가 살고 있던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는 우연적인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이미 예정된 만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연히'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연히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단지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우리가 순종하며 다가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고 떠나가느냐의 차이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에게 찾아온 그 우연적인 사건에 대하여 무감각하지 아니하고 그 주님을 만나기 위해 '뽕나무'위로 올라갑니다. 뽕나무 위로 올라간 그를 주님께서 바라보시게 됩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넘어야할 장애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뽕나무보다, 그에 대한 주변의 시선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 살아온 인생의 족적이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나기로 작정하는 순간 그런 것들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9장 7절에 보니까,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사람들의 수군거림,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절) 그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 외로움으로 가득 찼던 인생이 기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물질의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으려고 했던 돈을 절반이나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혹시라도 남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다면 4배가 갚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난 사람의 변화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이번 변화산 기간을 통해 이 새벽에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까? 그런데 무엇이 장애가 되십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들려오는 이 소식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우연적인 일이 여러분의 삶에서 필연적인 사건, 운명적인 사건이 되도록 하십시오. 외롭고 처절했던 한 인간이 기쁨으로 즐거워하며 주님을 영접했던 일들이 여러분에게도 일어 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만나면 여러분의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을 만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여러분이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2.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예수님.

  마가복음 9장 14절~29절에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한 사람을 접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 공교롭게도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답답했는지 예수님이 안 계시는 동안 제자들에게 아들을 고쳐달라고 부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귀신들린 아들, 그래서 아무 때나 불과 물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아들의 모습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겠습니까? 마가복음 9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그 아들이 언제부터 그랬느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의 대답을 보십시오. "어릴 때부터니이다."

  부모의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어려서부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들, 쓰러지면 거품을 무는 아들의 모습을 보았던 아버지의 심정을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절실했으면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겠습니까? 얼마나 절박했으면 예수님이 안 계시는 동안 제자들에게 부탁을 했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자신의 아들을 고치기는커녕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고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 아들의 모습(17절)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9장 22절을 보세요.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를 향해 질책하시며 23절에서 되묻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아마 이런 물음이겠지요? "아니 너에게 다른 길이 있느냐? '할 수 있거든' 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또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구나. 아직 막다른 골목이 아니더냐?"

  그러자 이 아버지가 다시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24절입니다.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굉장히 긴박한 순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아닙니다. 저의 믿음 없음을 용서해 주세요. 예수님이 아니고는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할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내가 믿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예수님은 여러분을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기를 원치 않으실까요? 혹시 아직도 양다리를 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년 성회를 참석하고 말씀을 듣고도, 변화산 기도회를 하면서도 혹시 못 미더워서 정초에 점을 보고, 아들과 딸의 진로를 정하는데 이왕이면 점쟁이도 찾아가 보고, 이왕 아이들 결혼시키는데 사주팔자보고, 날 잡아 결혼식을 시키는 그런 신앙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하며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의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꾸짖어 내어 쫓으시고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궁금해 합니다. 28절입니다. "...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여기에 유명한 예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29절입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러한 만남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3. 부드럽게 다가오시는 예수님

  제가 이렇게 예수님의 별명을 붙여 보았습니다. '친절한 예수님'

  성경 여러 군데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상처 받고, 따돌림을 당하던 사람들을, 감히 일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근접하지 못하던 사람들을 친절하게 고쳐 주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경의 아픔을 보려고 하지 않고, 왜 그 사람이 소경이 되었느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이 뉘 죄로 인함입니까?"(2절)

  사람들에게는 죄를 정죄하는 능력과 성향이 있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당하는 아픔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시며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9장 3절에서, ". .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의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내가 자유로우니까요. 그런데 주님은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오셔서 용기를 주시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 주십니다.

  "아니다, 너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구나!"

  그 주님이 여러분에게 다가와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너의 아픔은 누구 때문도 아니란다. 지금 너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나기를 원한다."

  바로 이 주님을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미룰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미룰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누구와 함께 식당에 가기로 했다든지, 영화를 보기로 했다든지 하는 일들은 미루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뿐 아니라, 못해도 그렇게 큰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인생에서 주님을 만나야 하는 순간은 결코 미루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다시는 우리에게 올 수 없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4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지붕을 뜯고 예수님께 달아 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이 말씀을 해석할 때 4명의 친구의 믿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누구의 믿음 때문인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병자였던 친구가 원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데려온 것인지, 아니면 중풍병자였던 환자가 친구들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군중의 벽을 넘어서기 위해 지붕을 뚫고 내려온 이들의 믿음을 예수님이 귀하게 보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에게 확신이 있었다면, 오늘 이 날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아니면 자신들에게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더욱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그들의 영혼도 구하여 주셨는데, 이 중풍병자에게는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 5절입니다. ". . .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단서를 발견합니다. 이 사람의 병이 단순한 신체적인 기능의 이상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만나려고 왔을 때, 단순한 육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그의 죄에 대한 회개와 뉘우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죄 사함을 받는 순간 그의 육체의 질병역시 나음을 얻은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주님을 꼭 만나야 하는 이유가 여러분의 죄의 문제 때문입니까? 그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미룰 수 없습니다. 이번 기회가 지나가면 당신의 삶에서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중풍병자가 친구들에게 부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말입니다. "친구들아, 나를 꼭 예수님께 데려다 줄 수 없겠니. 내가 지금 예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지 몰라. . ." 오늘 이 중풍병자의 마음과 고백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특징을 발견하셨습니까? 그 특징은 하나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요,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 앞에 가서 주님의 만져주심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진흙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만지심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고린도 후서 4장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쓰시기를 즐겨하십니다. 사실 교회는 지저분하고 불결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때로는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만나고 새로워지며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이번 변화산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빚으실 지를 기대합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교인 중에 SK에서 consulting을 하는 분과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가장 큰 일은 고객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고, 자신이 제안한 것을 사게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객을 설득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하고 비슷합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떻게 해서라도 설득하기 위해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consulting을 해서 project를 만들어 팔면서 가장 곤혹스러운 것이 고객의 물음이랍니다. "확실합니까? 100%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대답을 할 수가 없답니다. "확신은 하지 못하지만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정은 당신이 하는 것입니다. 확률이 높다는 것, 이제 제가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은 확신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100%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 그들의 인생이 달라졌던 것은 2000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저는 100% 확신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우리의 인생이 바뀔 수 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2천 년 이야기로 과거에 흘러가 버린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서 반복되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인생이 축복 가운데 삽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당신의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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