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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예배의 태도 (요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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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배의 태도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下)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수가성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다섯 번이나 결혼했지만 지금 있는 자도 자기의 진짜 남편이 아닌,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한낮에 물을 길으러 왔다가 예수님과 만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받습니다.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여인은 그 물을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의 숨은 죄를 들추어내시자 이 여인은 예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막혔던 관계의 문제가 무엇이고, 이 여인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참된 평화와 참된 영생수를 소유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자 이 여인은 느닷없이 예배할 곳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여인이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은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관건이 예배의 장소에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배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귀착되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여인이 생수 이야기를 하다가 이것과는 상관없이 죄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죄 문제에 직면하니까 예배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여인의 마음속에 간절하고 절박한 문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고 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심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에게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할 곳이 어디냐고 묻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들을 찾으시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이렇게 너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죄악과 그로 말미암는 목마름, 그로 말미암아 인생의 고통에 시달리는 너. 너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방법이 예배이며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II. 우리의 예배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공적인 예배의 중요성

신앙의 중심부에는 반드시 예배가 있고 예배 받으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경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배의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교회의 예배상태는 그 교회 신자들의 영적인 수준과 신앙생활의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 하나님을 자신에게 있어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지는 그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적인 예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의 진정한 창조주가 되시며 우리는 그의 은혜로 살아가는 피조물들임을 예배 가운데에서 입증하셨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단지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크고 작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예배의 가장 중요한 방식이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공적인 예배에 함께 참여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이미 초대교회 시대부터 이렇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공적인 예배의 모임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공적인 예배에 대한 강조를 지속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즉시 그들이 잃어버린 첫 번째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의 상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타락하자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숨어버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에 의하여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창4:4-5).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그들의 존재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지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 어떤 판단을 받고 있었는가와 결탁되어 있었습니다.

노아 홍수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이 땅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증표를 주신 것도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와 온 땅을 심판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살았고 그 예배 속에서 믿음을 따라서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았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부(富)를 쌓았고 그 땅을 중심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모세시대에 율법을 따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더욱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막과 성전에서 공적인 예배를 함께 드리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회중에서 제외되어야 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고 나서 그 사건은 즉시 선명한 복음의 선포를 가져왔습니다. 교회는 진리를 외치는 설교자를 갖게 되었고 그 진리가 외쳐지는 곳에는 예배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온갖 위협과 대적들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위대한 능력을 예배를 통해 공급받았다는 사실도 의심할 여지없는 성경의 기록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면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처럼 예배가 없는 곳에는 교회도 없고 신앙고백도 없으며 선교도 없습니다. 오늘날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공적인 예배의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은 마치 행동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은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경배하여야 하는 위치에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예배에 참석하여야 할 시간에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는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아도 될 자리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지정된 그 시간에 여러분들이 그 곳에 있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비어 있습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에 누룩처럼 번져 가는, 배교에 가까운 예배에 대한 경박하고 의무감 없는 태도들을 보십시오. 등록한 교인들의 수에 비하면 비참할 정도로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러한 세태를 거의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여유가 있게 되면 그때는 예배를 잘 드리겠노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평생 이렇게 쫓기듯이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공적인 예배에 힘을 다하여 참석하고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공급받으면서 어려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신앙생활에 힘쓰지 아니하면 하나님 앞에 심각한 불신앙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지면 예배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그 다음에 그 은혜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너희 마음을 감동시키면 그때 기도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연민의 정이 솟아나면 그때 전도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주 단순하게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예배하라, 너희는 기도하라, 너희는 전도하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그것은 의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따르는 마땅한 의무를 다하며 살겠다고 하는 고백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그리고 자신을 향하여 공적으로 선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와 축복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하여야 할 당연한 의무에 대해서도 서명한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하기로 서약한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가 떨어지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는 사실상 배교에 가까운 생각입니다.

가장 성경적인 교회의 모델을 지녔다고 믿어지는 청교도 시대를 보십시오. 그들이 늘 깊이 가슴에 새긴 단어는 바로 “의무”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자신의 마음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하나님 앞에 받은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였습니다. 먼저 그 의무를 행하며 자신의 마음도 그 의무를 따라오도록 노력하였습니다. 만약에 마음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의무를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배교적이고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형식이 무너지면 내용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내용마저도 없어져 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율법적인 의무감만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할 마음도 없고 더 나아가서 예배의 의무마저 포기한 것은 그보다 더 나쁜 배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약속 있는 은혜의 수단

사도시대로부터 공적인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영혼들에게 유익을 주는 수단이 되어 왔습니다. 잠자는 영혼을 깨우며, 죽은 자와 다름없는 영혼들을 살아나게 하고, 죄로 말미암아 어두움 가운데 있는 영혼을 진리의 빛으로 밝혀 구원함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 바로 예배였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 죄인임을 느끼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의심하며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믿음을 바로 심어 나갈 수 있도록 결단하게 하며, 세상에서 부와 성공만 있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소망으로 삼으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위대한 힘이 바로 예배 가운데에서 부어졌습니다.

이 시대의 불신앙의 풍조를 본받지 마십시오. 오늘날 조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인 예배에 대해서 아무리 너그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죽은 것 같은 자들의 너그러움일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기뻐해도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공적인 예배에 참여하기를 힘쓰십시오.

여러분들이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기를 게을리 할수록 심각한 영적인 손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은 생기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나아가서는 진리를 향한 갈망과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분이 무엇인지도 잊게 될 것입니다. 박약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 죄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기를 자처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령한 은혜의 세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예배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신령하고 충만한 은혜의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단지 예배에 참석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어야 할 교회의 부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별도로 다루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유야 어떠하든 공적인 예배의 참석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가장 영적인 신앙의 의무에 대하여 방만(放漫)한 것이며 그렇게 예배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서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 대하여 떠난 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실제적인 삶속에서 이미 신앙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몸이 예배의 장소에서 이탈되기 전에 언제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일들이 먼저 있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종교적으로 많은 예배가 행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유무로 그리스도인인지의 여부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그리스도인이 있는 것처럼 예배도 헛된 예배가 있습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헛된 예배에서 한없는 허기짐을 느끼고 거짓된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헛된 예배에서 대단한 만족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행해지는 헛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단호한 태도를 보며 참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유행하던 헛된 예배에 대하여 단호하게 경고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8,9)

III. 참된 예배의 태도

마음을 다하는 예배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경외심이 사라질 때, 사람들은 차가운 형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를 대신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영이시고 인격이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단지 차가운 형식 속에서 우리 자신의 종교적인 요구나 만족시키기 위하여 행해지는 것인지 혹은 진심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는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십니다. 만약에 우리의 예배가 단지 우리 자신의 종교적인 요구나 만족시키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고 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그 속에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일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종교적인 보상심리가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던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예배하는 생활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차가운 거절감 이상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일날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몸은 주일이 되면 어김없이 예배드리는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주간동안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생활들을 예배하는 한 순간의 형식을 통하여 보상해보려는 심리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만남에 대한 갈망과 기대가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예배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거의 느끼지 못하며 떠나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 없이 차가운 예배의 형식을 되풀이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만이며 신성모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은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2-13)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예배하고 계십니까? 예배에 대해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습관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성경적인 것입니까? 바른 지식은 하나님을 만나는 다리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예배에 대한 생각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생각이 고쳐지기 전에는 예배에 대한 태도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대한 여러분들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여러분들이 참여하는 예배에 쏟아질 복은 없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사건이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식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며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뉘우칩니다. 그렇게 드리는 예배 속에서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진리를 붙들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거룩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굳어졌던 마음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감동하는 것도 바로 이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말미암는 감격이 있고 그러한 감격하는 인간들이 있을 때 하나님이 감동받으십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감격적인 예배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한 그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물결이 아무리 성난 파도와 같고 죄악의 탁류가 홍수와 같을지라도 그는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능력의 원천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영원에 잇대어 살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의 만남을 통하여 참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원동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인간에게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떠나 죄 가운데 빠진 사람들을 어떻게 건지십니까? 소망 없이 살아가는 영혼을 부여안고 어두운 길에서 헤매며 사망과 흑암의 그늘 아래 앉아 곤고함과 쇠사슬에 매인 비참한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건지십니까? 삶과 죽음, 신앙과 불신앙의 갈림길에 서서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들의 갈 바를 보여주십니까? 그들은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들을 통해서 이런 변화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 땅에서 지푸라기와 같이 사라질 인생들로 하여금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게 하시고 또 땅의 진토와 같이 없어질 인생들로 하여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람의 유일한 소망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고 진리로 인한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고 참된 위로가 있으며 이 세상에서 영원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신앙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하여 이 모든 축복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최대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며 간절한 마음을 가진 성도들의 바람으로 시작되고 그러한 바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간절한 마음 없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간구하는 바가 없이 기대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참여하는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형식만 남은 종교생활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예배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함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며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진정한 능력을 주지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하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드리는 모습을 한 번도 보시지 못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예배를 통해 주시는 거룩한 약속들이 은혜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실패위에 무지를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축복이 사라진 회중 가운데서 형식적인 예배가 드려지고 우리 모두 바로 그런 형식적인 예배의 공범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갈망이 없는 예배생활입니다.
사람들의 습관적인 지각, 준비 없이 드리는 헌금, 예배 보다는 예배 이후의 시간을 고려한 옷차림, 그리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황급히 교회를 빠져나가는 것 같은 행동은 모두 준비 되지 못한 예배의 한 단면입니다. 타락한 교회시대에는 이러한 예배의 풍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그렇게 드려질 때마다 교회는 거룩한 각성이 필요한 시점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주일이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중심이 되실 것입니다. 예배가 주일의 중심이 되게 하십시오. 최상의 건강과 최상의 마음, 최상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주일이 되기 위해서 한 주간동안 준비하십시오.

IV. 결론과 적용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서 일주일을 삽니다. 그리고 일주일을 살기 위하여 하루를 하나님 앞에 예배합니다. 무엇보다도 예배와 설교를 통한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고 거룩한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절실하게 기도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이러한 간구와 기도 없이 예배에 나와서 단지 은혜로운 설교 듣기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설교자를 의지하는 것이 됩니다.

예배의 수준을 능가하는 삶도 없고 삶을 능가하는 예배도 없습니다. 예배는 삶 안에 갇히고 삶은 예배 안에 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모든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방법으로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거룩한 만남을 주시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은 예배의 거룩함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배자의 가장 큰 제물이 하나님을 향한 상한 마음이며 자신의 죄에 대해 참회하는 심령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예배가운데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모하십시오.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사슴 같이 예배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예배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영혼의 커다란 재앙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임재해 주시기를 갈망하고 기대하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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