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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자람의 위안 (마 26: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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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모자람 혹은 한계의 축복
제목: 모자람의 위안
본문: 마태복음 26장 69절~75절

69 베드로가 바깥 뜰(courtyard)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deny)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gateway)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deny)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curse and swear)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한 유태인이 고명한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매사가 계획한 것의 절반도 되는 일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지혜 좀 내려주십시오." 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랍비는 "뉴욕타임스 연감 1970년판 930페이지를 찾아보시오. 그곳에 당신을 위한 지혜가 적혀 있을 것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 유태인은 급하게 자료를 찾았습니다. 그곳에는 뜻밖에도 야구선수들의 타율이 나열돼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쭉 이름을 훑어 내려가다가 세계최고의 타자라고 불리는 타이콥의 이름이 눈에 띄었습니다. 통산타율- 3할 6푼 7리!
바로 그 순간 이 유태인의 머리를 번개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세계 최강의 타자도 3타석 중 1안타에 불과하다는 점, 즉 3번 시도해서 1번 성공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하는 일마나 계획이 절반 가까이 달성된다면 나는 5할대의 타자가 아닌가?" 모자람이 있어야, 부족함이 있어야 세상사는 의욕과 재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받아 먹으라! 받아 마시라!" 제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예수님이 나누어 주신 빵과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먹고 마시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즈음에, 예수님께서 냅킨으로 입을 닦으시고 좌중을 향해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부활 후 너희를 만나러 갈릴리로 갈 것이다." 바로 그때 용맹하고 우락부락한 바다사나이 베드로가 이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 주를 버릴지 몰라도 나만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말에 너는 도리어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났으며 부인 정도가 아닌 저주에 맹세까지 합니다. 바로 5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말입니다. 결코 떠나지 않는다고 다짐했던 자신만만한 바다사나이에서 초라하게 배신자가 되어버린 베드로, 그의 마음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75절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라서 바깥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올해 상반기에 청소년친구들을 데리고 장애인 보호시설에 봉사를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부터 정신지체가 있는 장애인까지 다양한 분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시설이었지요. 그곳에서 큰 도움을 준 것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모자람이 있고 부족함이 있지만 훨씬 밝게 웃으면서 생활하시는 그분들을 통해서 저와 참여한 친구들이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장애인을 부를 때, 장애자의 앞 글자 '장'자를 빼고 '애자'라고 부르면서 놀리던 친구들이 봉사활동을 통해서 말투를 바꾸고 생각을 바꾸겠다고 다짐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왜 어린 청소년들이 장애인을 보면서 모자라다고, 부족하다고 놀리는 것일까요?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자신들은 완전한데 그분들은 많이 이상해보였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면 장애인들만 모자란 것 투성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모자란 것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한계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잘 해줘도 말을 듣지 않는 웬수같은 자식놈을 보면서 관계의 한계를 경험합니다. 아침마다 일어나는 것이 힘들에 질 때, 점점 몸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사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면-건강, 가족, 사랑, 꿈, 실력, 인정, 성취, 지식, 관계, 믿음-에서 모자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계를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한계가 주어져 있다고 하는 것! 부족함이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모자람 혹은 한계 혹은 부족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경 속에는 종종 딜레마 혹은 아이러니한 내용이 있는데, 믿음과 한계에 대한 진술가운데에 또한 그런 딜레마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야말로 놀라운 능력의 믿음이지요. 그런데 고린도후서 12장 7절 이하를 보면 바울이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그것을 고쳐달라고 세 번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침을 받기는커녕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한계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바로 이러한 딜레마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한계에 대한 인식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피부질환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곱디고운 저의 피부를 망치는 못된 질병입니다. 여름만 되면 더욱 심해지기 때문에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박박 긁어댑니다. 아토피를 앓고 있는 자녀를 두신 부모님, 그리고 아토피 환자 여러분은 모두 저의 동지이자 사랑하는 형제들입니다. 우리 아토피 동지들은 욥기 2장을 묵상하기만 하면 너무 은혜가 됩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난 욥이 기왓장으로 몸을 박박 긁는 것이 이해가 되기 때문이지요. 이런 저에게 빌립보서 4장 13절은 놀라운 은혜이지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2장 7절 이하의 말씀은 반갑지가 않습니다. 세 번 기도했으면 나아야지 어떻게 아직도 그대로일수가 있지? 바울의 이러한 자기고백이 낯설고 멀게만 느껴집니다. 내 병도 고침을 받아야하는데 바울의 경험담은 우리를 참담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믿음이 짝퉁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어야지 어떻게 한계가 있단 말인가! 모자람이 있단 말입니까? 이처럼 한계를 이야기한다는 것, 모자람을 이야기한다는 것, 부족함을 이야기한다는 것, 의지로도 극복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 왠지 낯설게 느껴집니다. 긍정적으로 열심히 했는데도 되지 않는 것이 있을 때 좌절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한계를 말하고, 부족함을 이야기하고, 모자람을 생각하는 것은 불신앙입니까? 아닙니다. 한계는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사로잡혀 있는 한계들이 있습니다. 죽음의 법칙 앞에서, 육체의 힘으로 넘을 수 없는 장벽 앞에서 우리는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럼 한계를 말하는 것, 모자람이 있다는 것은 한계를 깨뜨리고 한계를 넘어서려는 모든 노력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그저 우물 안 개구리로 살라는 말입니까? 넘어설 수 없으니 애초에 그냥 자포자기하고 살라는 그런 패배주의입니까? 아닙니다. 한계를 말하는 것, 모자람을 말하는 것은 긍정적 사고방식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물 안 개구리로 그저 자포자기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한계를 말하는 것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는 것입니다. 한계는 축복입니다. 모자람은 감사의 제목입니다. 부족함은 용기의 근원입니다. 모자람은 축복입니다.

삶의 한계를 긍정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할 필요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가 한계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까?
낙관주의적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한계를 뛰어넘으라고 말하고, 인간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세상은 바로 그런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경우에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정당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쳐서 인간의 한계를, 모자람을 인정하지 않으려다가 피조물이라는 인간의 한계마저 부인하는 지경에 종종 다다르곤 합니다.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 라는 책으로 유명한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 Richard Dawkins의 책 "God Delusion" 이라는 책이 최근에 "만들어진 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놓은 '신'(神)이라는 한계와 굴레 속에 갇혀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런 하나님없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 인간의 노력으로 한계를 뛰어넘어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좌절을 맛본 것이 무엇입니까? 대표적인 것이 2번에 걸친 처절한 세계대전이 아니겠습니까? 죽음의 한계에 이른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가스실에서 어떻게 우리가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찾아볼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우스운 사실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졌을 때,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서 달려 나와 기도합니까? 인간스스로 한계를 직면한 것 아니겠습니까? 도덕성의 한계, 인간본성에 대한 한계를 깨달은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십시다. 지금 우리는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외칩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러나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를 부인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한 경험담을 고린도후서 12장에 기록해 놓았는지 모릅니다.

삶의 한계를 긍정하고 감사하는 것,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모자람이나 한계는 저주나 때려 부숴야할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한계는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한계라는 제비가 물어다 주는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한계의 축복은 한계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임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의 앞부분은 마태복음 26장 35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서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가르침은 바로 이 한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것은 제자들에게 충격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열두제자들을 부르시며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마10:1) 그리고 제자들은 실제로 예수의 권능을 힘입어서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감의 최고조를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별 볼일 없이 살았지 않습니까? 촌구석의 어부요, 세리요, 불한당과 같던 그들에게 주님의 능력이 임하니 하늘을 찌를 듯 하고 어떤 것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자신감이 가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너희들이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하시니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에게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한계를 몰랐습니다. 인간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의지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어떤 인간도 의지로 한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자신감의 한계를 몰랐기에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바로 그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특별보충수업을 진행하고 계시는 겁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리스도인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바로 한계를 인정하고 맡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인생의 모든 면-건강, 가족, 사랑, 꿈, 실력, 인정, 성취, 지식, 관계-에서 다가오는 한계 즉 모자람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인생이라는 그림판의 경계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그림은 정해진 경계가 있습니다. 어떤 화가도 캔버스의 정해진 경계를 넘어서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제대로 된 인생이라는 그림은 경계를 인정할 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에만 한계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잠언 8장 29절은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예레미야 5장 22절은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자연 속에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와 경계선이 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코 비극이나 안타까움이 아닙니다. 무조건 극복해야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한계를 인정하면 참된 행복의 조건이 됩니다. 모자람은 행복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은 채움보다는 모자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행복한 삶의 질은 어떤 것인가?)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 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사람들이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절반 정도 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듣고서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
(하고 싶은 일을 조금 못다 하고 못다 입으며 못다 사는 정도의 재산을 가진 것이 행복이다.)

그렇습니다. 모자람을 극복하고 한계를 뛰어넘을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자람을 인정하고 한계를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보다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모자람, 한계를 인정하십시오. 우리가 모두 피조물의 마땅한 한계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인생이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마지막 절 75절입니다.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이 장면은 비통과 슬픔에 가득한 한 인간을 만나는 현장입니다. 앞뒤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시험과 비교해 보십시오. 다가올 시험을 위해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언덕에서 3번 기도하심으로 왜곡된 재판과 시험을 이길 힘을 얻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에서 세 번 잠들었고,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심문에도 굴하지 않으실 때,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여종의 툭 던지는 질문에도 넘어지고 맙니다. 대제사장이 맹세할 것을 요구할 때 예수님은 거절하시지만, 베드로는 스스로 맹세하고 저주하며 예수님의 제자됨을 부인합니다. 철저하게 비교되는 모습이 교차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드로는 부인과 저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자기 모습을 직시하고 한계를 절감하면서 통곡이 시작됩니다. 이 통곡은 그냥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오장육부가 흔들리고 전 존재가 무너지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앞에서 참 회개하는 모습으로 바뀐 것입니다. 회개라는 것을 언제 하게 됩니까? 결국은 자신의 한계에 부딪힐 때 아닙니까? 한계를 경험한 사람들,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출발을 가져오는 것이지요. 그 이후로 베드로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자신감"으로 사는 인생에서 "의지함"으로 살아가는 인생으로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자신감의 한계를 절감하고 진정 필요한 것은 의지함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통곡하는 베드로는 단순히 한명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는 12명의 제자공동체의 상징이며,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베드로가 부인하는 현장에 함께 있습니다. 위대한 교회의 지도자가 변절했습니다. 단순히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회개한 베드로는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우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계를 마주하고 나면 변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되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한계의 축복입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솔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조류로 알려져 있답니다. 최고 약 70세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만 한답니다. 약 40세가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되고,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됩니다. 또 깃털이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겁게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나날이 힘들게 되는 것이지요.

이즈음이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러운 갱생 과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 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 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합니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는 것이죠.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그리고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이리하여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지요. 그리고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한계의 경험은 또 다른 시작입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한계의 벽에 부딪히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계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이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것이 시작됩니다. 몸의 한계는 그 이상의 존재임을 알려주며, 관계의 한계는 깊은 연합을 이루며, 지식의 한계는 경외와 겸손으로 이끌며, 성취의 한계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감의 한계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합니다.
한계를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한계를 통해 주어지는 새로운 시작으로 뛰어드십시오. 주님을 만나게 되면 나를 좌절하게 만들고 어렵게 만들던 바로 그 한계가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한계는 결국 자신의 한계를 맛보게 된다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28장 6절입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통곡한 베드로가 어떻게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룟 유다와 달리 자신의 실수를 잘 극복하는 성품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지도자가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예기치 않은 그리고 전혀 상상치 못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부활! 그 놀라운 은혜를 맛본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한계들을 완전히 한계 하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를 얽어매는 한계중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음은 모든 한계의 최절정입니다. 사랑, 건강, 관계, 지식, 성취 등 모든 것의 한계의 최고봉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나사로라는 한 청년을 잘 압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고아의 집안에서 홀로 집안을 이끌어왔던 인생은 끝이 난 것이죠. 더 이상 두 여동생을 돌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친구들을 만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예배도 드릴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계를 뛰어넘는 한계가 이루어졌지요. 바로 살아난 것! 부활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설 수 없지만, 이 한계를 한계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만이 오직 죽음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 실제로 약속한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됩니다. 충격이지요. 그리고 지난 3년이 스쳐지나가고 자신의 오해와 왜곡된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베드로는 출신과 재능 그리고 기질의 한계를 뛰어넘겠다고 발버둥치는 인생이 아니라 맡기는 인생, 의지하는 인생을 살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 힘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의 힘을 아십니까? 그 부활은 2000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핍박받는, 그토록 세상에서 조롱받는, 색깔이 변질되어 타락했다고 하는, 내적으로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기독교가 교회가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있는 대답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최고의 한계가 막을 수 없는 산 종교요, 살아있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게 억류된 21명의 한국의 기독청년들을 보십시오. 어느새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 같고 소외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금 인생의 최고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마실 물이 없습니다. 먹을 음식이 마땅치 않습니다. 마음은 이미 자포자기의 상태입니다. 시시각각 죽음의 공포가 다가오는 처참한 한계상황 속에 놓여있습니다. 심지어 이미 살해를 당한 두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위로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서 어쩌면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교회는 철저한 모자람과 부족함 그리고 한계를 경험하고 있는 줄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계들 말이지요.

바로 이러한 외통수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단 하나 믿는 것이 있다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처참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우리의 형제들을 보면서, 억류되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21명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한계 앞에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오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완전히 한계하시는 부활신앙을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모든 한계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거나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모자람과 부족함이 있기에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모든 한계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한계를 한계지우시는 부활의 신앙을 붙드십시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수많은 모자람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한계를 인정하십시오. 존중하십시오. 받아들으십시오. 그리고 한계가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부족함과 모자람 한계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행복한 것은 모든 한계를 한계 지우시는 부활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부활의 감격 속에서 오늘도 큰 감격 속에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신부인 떼야르드 샤르댕의 "나이를 느끼면서"라는 시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이를 느끼면서

몸에 하나둘 나이 먹은 흔적이 생길 때 - 그리고 이 흔적들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을 때, 나를 조금씩 움츠러들게 하고 쇠약하게 하는 질병이 몸 안팎에서 생겨날 때, 나도 병들고 늙어간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으며 두려움 속에 빠져들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만들어왔던, 알지 못하는 위대한 힘들의 손길 안에서 자신을 잃어 가고 있으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마침내 느낄 때!

이 모든 암울한 한계의 순간에, 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알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제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와 저를 하나님께로 데려가기 위해 저를 조금씩 분해시키는 과정임을!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도 저만큼이나 아파하고 계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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