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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가 되었다고 느낄 때 (요 15: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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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되었다고 느낄 때 (요 15:18-27)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비로소 한국인이 되었다고 느낄 때가 언젠가?’라는 질문에 대한 한 가지 재미있는 대답이 있습니다. ‘공연히 일본이 미워질 때’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과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느끼고, 한국인으로서의 동질성과 소속감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기 전에 ‘비로소 성도가 되었다고 느낄 때가 언젠가?’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말씀을 통해 그 답을 추적하면서, 동시에 핍박을 당할 때 가져야 할 세 가지 자세를 살펴보겠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세상”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존재는 아닙니다. 빌립보서 3:20을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성도를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살고 있으나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사단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거룩한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소속이 다르면 사는 방법이 다르고 가치관과 의식이 다릅니다. 근본적인 이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미운 오리새끼’라는 동화를 보면, 그는 다른 오리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뭔가 이질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다른 오리들은 그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미워하고 왕따 시켰습니다. 미운 오리새끼는 구박당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특별히 잘못을 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 했습니까? 근본적으로 오리가 아니라 백조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도들이란 이 땅에서 ‘미운 오리새끼’로 살아가는 존재, 그러나 근본은 ‘백조’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겉모습은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아버지가 다른 존재이고 다른 백성(종족)입니다. 다른 오리들이 미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가정마다 법도가 다르고 나라마다 풍습이 다르듯이, 우리는 성경의 법도를 따르며 하나님 나라의 풍습을 좇아 살아갑니다.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이질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들이 술과 정욕을 즐길 때, 우리는 그것들을 멀리합니다. 육신의 쾌락과 만족을 좇기보다 신령한 것들을 사모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득을 취하는 세상적인 방식을 멀리합니다. 돈이 최고라는 풍습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혈육과 함께 영적인 가족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 백성들의 눈에 예쁘게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커닝하고 있는데, 혼자 커닝하지 않고 정직하게 시험을 쳐보십시오. 존경받습니까? 오히려 미움을 받습니다. 커닝하지 않은 사람 때문에 자기들의 죄가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뇌물이면 모든 것을 적당하게 눈감아주는 풍토 속에서 뇌물 받기를 거절해 보십시오. 좋아합니까? 아주 싫어합니다. ‘혼자 깨끗한 척 하는 사람’으로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주일에 불신 가족들을 뒤로하고 예배에 참석해 보십시오. 가족들이 그의 경건함에 감탄합니까? 오히려 ‘자기만 생각 하는 이기적인 놈’이라 말합니다. 크리스천이 모임에 섞여 있으면, 불신자들은 여러모로 불편을 겪습니다. 욕도 함부로 못하고 대화의 주제도 마음 놓고 선정하지 못합니다. 술 마실 때도 혼자 취하지 않고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신경 쓰입니다. 그래서 ‘기분 잡친다, 분위기 조진다. 안주만 축 낸다’며 불평합니다. 그렇다고 주는 술을 받아먹어보십시오. 뒤돌아서서 ‘사이비 신자’라고 흉봅니다. 또 크리스천인 것을 알면, 무슨 봉이라도 잡은 것처럼 만만하게 보고 이용해먹으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할 때 미운털이 박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12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이런 미움을 받게 될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라면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겠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미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받을 때, 첫째로, 핍박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핍박 하는 자들을 이해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그들처럼 핍박하며 살았습니다.

둘째로, 핍박을 받을 때는 예수님도 핍박 받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고난에 고독이 합쳐지면 고통이 가중된다고 합니다. 반면 고난을 당하지만, 고독감을 해결하면 고통의 50%는 경감된다고 합니다. 함께 매 맞으면, 혼자 맞을 때보다 고통이 반감된다는 의미입니다. 죄를 지을 때 공범을 만들려고 하는 것도 고독감의 해결을 통한 고통의 반감을 노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핍박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핍박 중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됩니다.

핍박을 당하면, 자기 불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 믿고 잘 사는데, 나만 왜 이렇게 고생하는지 고민하면서 외로움에 빠집니다. ‘내가 못나서, 내가 부족해서 그렇지’하며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완벽해도 핍박을 면할 수 없습니다. 미움이 가득한 자는 사랑하는 자를 시기하고, 게으른 자는 부지런한 자를 질투하며, 거짓된 자는 진실한 자를 미워하는 것이 죄인들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서도 핍박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무척 많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특히 히브리서 11장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살았으나 고난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나열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구름같이 허다한 그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할 때, 특히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미움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비록 예수님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예배하고, 그의 뜻을 좇아 바르게 살려는’ 힘겨운 줄다리기를 놓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붙들게 됩니다.

셋째로,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성경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실감할 때가 있습니다. 그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이며, 좁은 길로 걷는 삶이기 때문에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힘겹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인정해 주지도 않는데, 지속적으로 그 길을 걷는 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날은 불신자들보다, 엉터리로 살아가는 무늬만 신자인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가 더 힘듭니다. 그들처럼 적당히 믿고 적당히 타협하면 인정받으면서 잘 살 수 있기에 유혹이 됩니다. 타협하지 않고 곧게 살려고 하다가 핍박을 당하면 그 유혹은 더 강해집니다. 점점 숫자가 줄어드는 올곧은 소수로서 살기보다 대수에 편승해서 살아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생각해야 할 것은, 진리의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한 사람들 역시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죄악 될지라도 진리의 말씀을 기뻐하며,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상숭배자들로 넘쳐났던 아합왕 시대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가 400명을 대항하여 홀로 싸웠습니다(왕상 18장).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멋지게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그를 제거하려는 이세벨 왕후의 위협을 받습니다. 엘리야는 계속해서 이 싸움을 홀로 싸워야 한다는 것 때문에 지쳤습니다. 그는 호렙산으로 도망해서 로뎀 나무 아래 앉아 절망하며 죽기를 구했습니다(왕상19:4). 그는 여호와를 위해 싸우는 자가 자기 혼자뿐이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 시대마다, 정말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소수의 ‘남은 자’들을 남겨 주십니다. 예배까지 심하게 부패했던 이사야 시대에도 남은 자를 두셨습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올곧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찾아보기 시작하면 많이 있습니다. 시대가 부패할수록 정말 바르게 사는 사람과 모임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의 공동체를 찾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처럼, 우리의 말을 듣고 따를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딘가에 남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에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신 사람들을 보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21-27절을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제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심판 날에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 지 모두 계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님과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증거 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성도가 되었음을 강하게 느끼는 때는,  자기의 허물과 약점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는 순간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제대로 믿으려고 하면 언제나 핍박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핍박은 다양한 형태를 띱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모욕과 멸시나 알아주지 않는 형태로 생기기도 합니다. 또 핍박은 가정에서도 오고, 친구에게서도 오고, 모든 세상권세로 부터도 옵니다.

성경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10)라고 말합니다. 성도가 자기 잘못으로 매를 맞는 것은 가급적 없어야 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핍박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가 미운 오리새끼가 아니라 백조임을 확인해주는 영광스러운 신원확인 절차입니다. 우리는 오리들 사이에 살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여 꽥꽥거리며 살지 않아야겠습니다. 백조처럼 하나님 자녀다운 품위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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