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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막 10.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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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막 10.23-31)

예수께서는 당신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이던 가버나움에서 마지막으로 잠시 머무신 다음 이내 거기를 떠나 유대지방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드디어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신 것입니다. 도중에 들르신 어떤 마을에서 한 사람이 길에 나오신 예수님 앞에 꿇어 앉아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스승 앞이라고 할지라도 무릎을 꿇는 것은 보통 관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호칭한 것도 사실은 쉽게 볼 수 없는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칭한 것과도 비슷합니다. 관례에 비해서 과도한 것으로 보이는 이런 예의의 표시는 이 사람이 예수님을 그만큼 탁월한 분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로부터 우리는 이 사람이 자신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을 진지하게 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이 질문하고 있는 것은 포도나 올리브 재배에 대한 문제도 아니었고 소작료의 책정이나 유산의 분배 문제도 아니었으며 대인관계의 기술에 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들도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들이지만 지금 예수님께 나온 이 사람의 관심 사항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스스로 혹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만족스런 답을 구할 수 없었던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하는 길’이라는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다음에 그는 말은 돌리지 않고 곧바로 예수께 그 답을 구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은 영생을 얻기 위해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묻고 있는 이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처음에 그야말로 ‘해야 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 계명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유대인이라면 그것을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네가 계명을 아나니…”라고 전제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계명 더 나아가 그 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온전하게 지켜서 영생에 이른다는 것은 특별한 지식이 아니었고 대중화된 일반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계명의 준수’는 이처럼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고 이른바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으며 그 근거 위에 영생 취득에 충분한 자기 의를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답은 전혀 충분한 것이 아니었고, 더 나아가 유대인들이 그것을 필요충분한 답으로 생각하였으므로 오답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답이 아님을 아시고도 그렇게 답하심으로써 이 질문자가 처해 있는 문제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질문자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서 다시 예수께 말합니다.
“선생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유대인 사회에서 공인되고 통용되는 모범답안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 답대로 행했던 이른바 경건한 유대인의 부류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율법에 대한 열심이 넘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어렴풋이나마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대답에 크게 실망하였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이미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경건한 유대인으로서의 그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말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대답에 대한 실망을 나타내는 말일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반응에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그를 주목하여 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올랐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율법주의적인 경건함 속에서 자기 만족과 자랑을 느끼는 사람이었을 테지만 동시에 여전히 영생에 대한 갈망을 해결하지 못하고 아직도 진정한 답을 찾고 있는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만족 속에 안주하지 않고 여전히 진리를 구하고 있는 이 사람을 예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아직 한 가지가 부족하다.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제 예수께서도 더 이상 돌려 말씀하시지 않고 핵심을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을 구하고 있는 이 질문자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둘째 대답은 두 가지 요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물론 후자의 요구인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를 따르기 위해 바로 이 사람에게 필요한 하나의 준비단계입니다. 모든 재산의 포기와 구제의 요구로 나타나는 이 준비단계의 내용은 사실 사람에 따라 다른 요구로 주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이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소유를 포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일순 긴장했다가 그 요구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쉴지도 모릅니다만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소유를 다 포기하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준비단계라고 하지만 이 준비단계에도 대단히 중요한 전제가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전적으로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며, 가장 값진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이라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참 약삭빨라서 이러한 말씀을 대하면 곧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온통 뒤져서 부자였고 높은 지위에 있었으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렸던 사람이 있었다고 강변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아리마대 요셉이었네, 아마 니고데모도 그런 류의 사람이었네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제자로 불리면서 스승을 팔아 넘긴 사람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회피하려고 하다 보면 결국 제자가 되지 못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이란 가장 값진 보물이 묻힌 밭과 진주를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과 진주를 사는 바로 그 믿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사람에게 바로 그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 그 길이야말로 영생에 이르는 길이며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방해가 된다면 자신의 가장 값진 것마저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에 있어서 흔들릴 수 없는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입장의 정립을 요구하는 것이며, 예수와 자신 혹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분명한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전에도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이것을 요구 받았으며, 더 나아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다운 영생의 나라, 그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이루어지는 마당에 더욱 분명하게 확고하게 요구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이 질문자에게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요구에 대한 이 사람의 반응을 볼 때 그에게 있어서 영생에 이르는 길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역시 그의 재산이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절대로 포기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슬퍼했고 근심하였으나 결국 예수를 따라 나서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는 다른 많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율법주의적 자만심에만 빠져있지 않았고, 율법준수를 통한 자기 업적의 부족함을 알고서 더 나은 것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금껏 해온 일을 보다 완전하게 하기 위해 하나 더 추가해야 할 기발한 답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질문을 보면 그는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율법적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모르고 빠뜨린 것이 한 두 개 있다면 그것을 채택할 생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답이 주어질 때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용기와 결단은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가장 애지중지하는 재산에 걸려 넘어져서 예수를 따르는 길을 놓쳤고 그래서 영생으로 가는 길을 놓쳤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그저 훌륭한 선생으로만 남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이 일 다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 하셨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의외의 가르치심에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왜 부자라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가? 당시의 일반적인 일반적 인식과 사회적 상황으로는 이해될 수 없었습니다. 우선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물질적인 부는 그대로 하나님의 복 주심의 증거로 받아들여졌고 거꾸로 가난은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먹고 살기도 어려운 처지에 있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율법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지 못함으로 인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궁핍함에 쫓기는 절박한 생활로 인해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이른바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 가난한 자는 복되다” 하셨고, 오늘은 “부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는 놀라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그 어려움을 더 강조하여 재차 말씀하십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
과장법에 익숙한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예수께서 정도에 있어서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시는구나. 그러니 부자들은 더 많이 조심하고 필요하다면 좀 더 많은 것을 바칠 생각을 해야 하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바늘귀라는 어구를 두고 그것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바 소수의 사람들이 들어가는 좁은 문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는 예루살렘 성벽의 어떤 좁은 출입구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모두 근거가 박약한 풀이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가르침을 통해서 볼 때 이 말씀은 정도에 있어서 몹시 어렵다는 말씀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말씀으로 봐야 합니다. 모든 개인에게 기회가 균등해야 한다는 이념에 사로잡힌 우리는 은연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중 누구에게나 똑같이 개방되어 있는 나라여야 하며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누구든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여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생각과는 맞지 않는 나라임이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듣고서 매우 놀라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제자들의 낙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구보다 풍성하게 누리고 있고 또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부자들이 이와 같을진대 율법을 온전히 지켜 살지 못하는 많은 가난한 민중의 사정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사실상 하나님의 나라는 거기에 들어가기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이 아니라 절망을 안겨 줄 따름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권세의 능력으로 유대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가 곧 세워질 것을 기대하면서 그 나라에서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측근의 제자들조차도 이 순간 충격과 낙담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강한 열망과 기대를 무산시켜버리는 충격적인 말씀에 몹시 놀라서 낙심한 제자들은 반문하였습니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은가?”
이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 보다 문자적으로 옮기면 “사람 편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입국이란 것이 어떤 사람에게도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제자들의 체념을 더욱 확실한 것으로 만드시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사람 편에서의 완전한 불가능성과 절망을 선언하시는 이 말씀은 동시에 전혀 다른 소망과 가능성을 열어주시는 말씀이 됩니다. 그 소망과 가능성은 바로 사람의 반대편 즉 하나님 편에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그 부자는 자신의 성실한 계명의 준수에서 그리고 혹 놓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을 보충하여서 영생 취득의 자격을 인정받아보려고 했습니다. 또 갈릴리로부터 따라나선 제자들은 제자들대로 장차 놀라운 권세와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정부를 수립하실 예수의 측근이 미리 되어서 그 나라의 영향력 있는 자리를 선점해보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멀지 않은 10장 35절 이하에 이러한 제자들의 속셈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들의 자기 주도적인 경건의 업적과 약삭빠른 계산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전혀 적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바늘귀보다 더 좁은 하나님의 나라의 입구에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영생, 구원,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 전적인 주도권이 있는 영역입니다. 사람이 권리와 자격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자격 없는 사람들을 그 나라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드시며 하나님 만이 그 나라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 편에서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습니다. 사람에게 가능하고 또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과 예수를 통하여 주시는 그분의 부르심과 요구에 순종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자 베드로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끼어들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들은 과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바닷가에 생업에 필수적인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으며, 요한과 야고보도 아버지와 배를 남겨두고 부르심에 즉시 응하였습니다. 이들 외에도 제자들은 각자 자신이 속한 삶의 처지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부심을 느낄 만 하고 자랑할 만도 합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우쭐해져서 예수님의 칭찬 한마디쯤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의 장한 모습에 대하여 칭찬이라고는 일언반구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겉으로 버렸다고 하나 사실은 하나도 버린 것이 없으며, 그들이 예수께서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여전히 그 나라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자들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우쭐함과 자기 자랑에는 아랑곳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일에 대한 보상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9절 이하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께서 열거하시는 안전하고 친숙한 삶의 환경과 가족 관계와 소유 재산 등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오직 자기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 유지보존하고 배타적으로 사용하려고 하지 절대로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르심과 요구가 있을 때 예수를 위해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이 중요한 것들마저 포기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내세에 영생을 허락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영생의 조건 하나님의 나라의 입국 자격의 문제는 참으로 그분의 부르심과 요구에 순종하는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면서 더러는 그것을 가장 자기 편안한 방식으로 해석하여 머리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인식하고 시인하는 차원에만 가두어두려고 합니다. 그것으로 신자가 되었다고 여깁니다. 인간의 욕심에 따라 자신이 좋아하고 아끼는 그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겸하여 그 위에 신앙생활로 장식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이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선포했던 사도 바울조차도 그런 안일하고 이기적인 차원의 삶에서 참된 믿음의 만족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진정한 주님으로 믿게 된 그들에게 이전에 좋아하고 이전에 중요하게 여겼던 다른 모든 것들은 다 배설물과 같은 것이 되었고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내세의 약속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이미 이생에 있어서 그것을 백배로 보상받게 됩니다. 이 말씀은 과연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 성령의 강림하심과 함께 결국 예수의 말씀대로 예수를 위해 그리고 복음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까지도 포기하고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한 이들의 포기와 전적인 헌신으로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새로운 가족을 세상에 만드셨습니다. 이 공동체는 오직 하나님은 한 아버지로 하며 예수를 통하여 모두가 한 형제자매가 되는 전혀 새로운 가족 공동체입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부모의 보호와 형제간의 사랑 그리고 가정 생활의 모든 안락함과 행복을 유보하였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에 더 크고 더욱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이 공동체를 건설한 사람들 그리고 이 공동체에 참된 지체가 된 사람들은 이 구원의 큰 가정에서 다른 어떤 것에 비교할 수 없는 백배의 행복과 백배의 재산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유쾌한 보상만이 약속되어 있는 것은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박해를 겸하여 받습니다. 즉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복을 누린다 해도 그들은 언제나 박해 받는 자들도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자기 정체성을 잊지 않게 합니다. 우리끼리의 삶이 아무리 행복하여도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아무리 유익한 존재가 되어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서 미움과 모욕과 배척과 박해를 받았고 또 받고 있으며 받을 것입니다. 가장 가깝게는 최근에 자기의 안락한 생활을 잠시 뒤로 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돕고 섬기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났던 봉사단이 무장폭력집단에 의해 납치와 억류를 당하고 심지어는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을 통하여 분명하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종교적 차이와 이념을 떠나서 오직 인류애라는 단 하나의 관점만으로도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했던 이들에 대해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비난과 저주와 욕설을 퍼붓고 의도적으로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짓을 자행하는 인면수심의 사람들을 통하여 너무나 잘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위로와 보상은 세상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끼리만 주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이 영생의 선물을 통하여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의 부르심과 요구 앞에 선 사람들입니다. 예수는 우리 자신이 그럴듯하게 갖추어 놓은 것에 한 두 가지 더 첨가할 것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내 가장 값진 것마저도 버리고 따라야 할 주님이 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바로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 자신의 목숨까지도 포기하고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우리에게 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주도하는 모든 시도와 업적과 자랑을 내려 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내가 바로 내 것이라고 주장하며 지금까지 사랑하고 애지중지하던 것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구원은 아들까지 포기하고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이루셨고 또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너는 나와 복음을 위해 무엇을 내어놓겠느냐 물으십니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우리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마저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전적으로 예수만 따를 수 있습니까? (강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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