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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 잔치가 열릴 때(기뻐하는 마음) (시 9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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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에 잔치가 열릴 때 (기뻐하는 마음)
본문: 시편 96:1-2 

멕스 루케이도 <예수님처럼> 중에서

1.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한 장 중의 하나는 누가복음 15장입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 세 가지 이야기 속에는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공통점은 모두 무엇인가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것이고,
둘째 공통점은 다시 찾았을 때 기뻐한다는 점입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너무나 즐거워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눅15:5-6)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벌입니다. 동전을 찾은 여인은 이웃들을 불러서 말합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눅15:9) 탕자의 아버지는 못마땅해 하는 맏아들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눅15:32)
  세 가지 이야기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모두 파티로 끝나는 점입니다. 모두 잔치로 끝납니다.


2.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님 자신의 마음을 잘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언제 가장 즐거운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가장 즐거워하실 때는 잃은 영혼을 다시 찾았을 때입니다. 구원의 순간과 견줄 수 있는 것은 그 분께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축복하고 축하하기 위해서 파티준비를 합니다. 리본과 풍선으로 장식을 하고, 음료와 케이크를 준비하고, 그 주인공이 그  파티장소에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천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한 자녀가 의의 옷을 입기로 결단하고 본향을 향한 여정에 처음 오를 때 하늘은 음료를 따르고 장식 리본을 매달고 색종이 조각을 흩뿌립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이 비유를 가르쳐주신 다음 결론과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15:7)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
(눅 15:10)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여러분! 오늘 말씀은 어떤 한 민족이나 한 도시의 영혼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의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하늘나라에는 존귀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존귀하신 어린 양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옷, 의의 옷을 입은 의인들로 가득 찬 곳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에서 나 같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잔치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내가 무엇 이길래, 내가 누구 이길래 나 하나로 인해서 그 천국이 들썩이며 잔치가 벌어졌다는 말입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너무나 황송하고 감사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은혜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교회 성도들로 인해서 천국에서 500번의 잔치를 벌인지 알고 계십니까? 아니 우리 교회의 역사를 다 합한다면 더 많겠지요? 수천 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교회 때문에 천국에서 수천 번의 잔치를 열었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천국은 정말 좋은 곳입니다. 왜냐하면 회개하고 돌아오는 한 영혼으로 인해서 날마다 날마다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감사가 있고, 날마다 웃음이 있고, 날마다 기쁨이 있고, 날마다 박수와 환호와 고백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일어납니다.
 

3. 이런 하나님의 기쁨에 비해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회심하는 한 영혼에 대해 그런 열정과 기쁨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한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만사 제쳐두고 마음껏 기뻐합니까?

  새신자가 오늘 처음 우리교회에 나와 등록을 했다고 목사님이 광고할 때 여러분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합니까? 우리의 가슴은 기쁨으로 터질듯 합니까? 절박한 심정으로 밴드를 부르고 케이크를 자르고 파티를 열어야할 것만 같습니까?
  아니면 또 한 사람의 손님이 찾아왔구나 생각하며 박수 한번 치는 것으로 그칩니까?
  한 영혼이 구원받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기쁨의 폭죽으로 광채를 발하는 불꽃놀이 밤하늘이 됩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한 영혼이 돌아왔을 때 예수님이 기뻐 춤추시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예수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4. 그러면 왜 예수님과 그의 사자들은 회개하는 한 죄인을 두고 그렇게 기뻐하는 것일까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다가 천국에 갑니다. 우리의 진정한 파티장소인 천국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 안에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마지막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모습처럼 우리도 변화합니다. (요한일서3:2)을 보십시오.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신비로운 부활의 몸을 덧입게 됩니다.

  우리가 천국의 파티장소에 들어섰을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걸작 품이 될 것입니다. 그 분의 예술작품이 될 것입니다. 천사들이 흠모할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그토록 빚으시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작품이 완성될 것입니다. 마침내 나는 그 분의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광채 나는 얼굴로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처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죄 없는 마음. 두려움 없는 마음. 기쁨과 감격의 마음. 지칠 줄 모르는 예배의 마음. 흠 없는 분별의 마음. 여러분은 그 예수님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이런 기쁨을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것이지만 우리의 원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았던 죄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그 죄인이 가야할 곳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그 곳은 지옥이었습니다. 지옥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입니다.” 여러분!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이 땅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임재 없는 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손길이 없는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용서도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자비의 행동도 없습니다. 사랑의 말도 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베푸는 따뜻한 음식도 없습니다. 주를 찬양하여 부르는 노래도 없습니다. 주의 영광을 위한 노래도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분의 천사들, 그 분의 은혜, 영원에 대한 약속, 그 분의 종들을 취하여 가신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한 마디로 지옥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옥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곳입니다. 비참한 탄식과 후회가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구원받을 기회가 있었지만 뒤늦게야 깨닫는 곳입니다. 기회를 한 번만 더 얻을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러나 지옥은 이제 모든 기회가 끝난 곳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곳입니다. 기회가 없는 곳이기에, 소망이 없는 곳이기에 무서운 곳입니다.

  사형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도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부활과 내세를 믿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인 사형수가 왜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의아스러울 것입니다. 하늘나라 간다고 믿고 평온해 하다가도 사형집행 날이 되면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 발버둥을 치는 사형수들의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김혜원 여사가 있는데 그 분은 오랫동안 교도소에서 사형수들과 교류하며 그들을 교화했던 사람입니다. 그 분이 쓴 책 “하루가 소중했던 사람들”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형수들이 단순히 죽고 싶지 않다는, 생존에 대한 집착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과거를 참회하고 새롭게 눈뜬 세상이,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세상임을 알았기에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은 열망 때문이다. 난생 처음 사람다운 삶을 한 번 살아보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그들은 그렇게 살기위해 발버둥 친다.

  이제야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서 그 삶을 한 번 살기 원하지만 그 값진 인생을 살아야할 자신의 목숨이 없기에 그들은 그토록 후회하며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죄와 벌”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처형당하기 직전에 생각한다. 설혹 겨우 설 수 있는 자리밖에 없는 좁은 바위, 영원히 가시지 않을 암흑과 고독, 그리고 폭풍의 대해에 둘러싸인 그러한 바위에 선 채로 수천 년 아니, 영원한 세월 속에 파묻혀 산다 해도 그렇게 사는 것이 지금 바로 죽는 것보다 낫다. 오직 사는 것, 살아나가고 살아 내는 것- 그것이 어떤 인생인들 상관없다.

 
5. 사람은 삶을 갈구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모든 사람은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삶은 더더욱 갈구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만나는 그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무관심하다고 단언하지 마십시오. 그는 누구보다 사는 것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볼 때, 사람들을 볼 때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무의미한 것들로 판단하지 맙시다. ‘부자인가? 예쁜가? 직업은 무엇인가? 피부색은 무엇인가? 대학은 나왔는가?’ 등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는 무의미한 것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은 그 사람의 영혼에 있습니다. 그의 영원한 생명에 있습니다. 그가 구원을 얻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영원한 시각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읍시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 사람은 심장의 박동소리가 멈추면 예수님처럼 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곧 잃어버린 영혼들의 얼굴을 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그 사람은 심장의 박동소리가 그치면 영원한 지옥에 들어설 사람들입니다.

  당신으로 인해 오늘도 한 사람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축복합니다. 당신과 구원받은 그 한 영혼으로 인해 오늘도 천국에서 잔치가 베풀어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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