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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함께 보라 (민 14: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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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함께 보라 (민 14:4-10)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민14:8)

무엇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것은 중요합니다.  똑같은 상황임에도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40일간 그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2정탐꾼들과 그들의 보고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여러 가지 관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 물량적인 관점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한 12명중 10명의 정탐꾼들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몸이 크고 강한 거인족속인)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민13:27-28)
모든 상황들을 크고 작음, 강하고 약함, 많고 적음의 물량적인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작고, 약하고, 적을 때는 모든 것들이 불가능하다며 부정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그러기에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은 부정적으로 가나안 땅을 악평하면서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민13:32) 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 이성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입니다. 이성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으로 볼 때, 가나안 원주민과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민 13:31) 고 했습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자신들과 가나안 원주민과 비교해 볼 때에  “우리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민13:34) 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논리가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내가 어리석고 부족한데 내게서 나오는 합리적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신뢰를 주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논리는 대개의 경우 비판적이고 선동적이며 부정적입니다.

셋째, 대중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니까 옳다는 것입니다. 12명 중 10명이 주장하니까 옳다는 것입니다. 다수라는 것에 비중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10명의 이야기를 듣고 밤새도록 소리 지르며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반란을 일으켜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다수의 많은 사람의 주장이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수와 대중이 틀린 경우가 많습니다. 불행하게도 인류역사상 대중의 관점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가 더 많습니다. 대중의 성향을 전부 믿을 것이 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한계는 물량적 관점, 이성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관점, 그리고 대중의 관점으로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두 명의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의 관점입니다. 나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질 것을 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을 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심시키며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자 능히 이기리라”(민1330) 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울며 원망하는 백성들 앞에서 옷을 찢으며 단호하게 우리가 차지할 땅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민14:7)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함께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물량적인, 이성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관점이 보지 못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보게 하십니다. 대중이 경험할 수 없는 더욱 깊고 심오한 개인적 결단의 세계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보는 사람은 미래적이며, 소망적이며,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는,  능력인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보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에게 주신 땅으로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본 관점에서는 아무리 가나안 원주민이 강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승리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고 차지하는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은 고등학교 시절에는 낙제생이었습니다. 그의 학적부에는 ‘이 학생은 무슨 공부를 하여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 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성적표를 물량적이나, 이성의 논리나 대중적 판단으로 볼 때에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판단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너는 다른 아이들과 같으려고 하면 열등생이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려고 하면 우등생이다. 너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 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아인슈타인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주신 독특성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인슈타인에게만 주신 독특성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아들을 본 것입니다. 자기 아들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특성을 본 것입니다. 이 어머니의 격려에 힘입어 아인슈타인은 세계역사를 바꾸어 놓은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보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 한 하나님께서 우리와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인 것입니다. 올바로 보아야 올바로 되고, 올바로 보아야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올바로 보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은 믿음으로 보며, 소망으로 보며, 사랑으로 보게 하는 관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보는 사람은 환경을 보는 것보다 환경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주어진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을 가지기 위하여 세 가지를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14:8)

중요한 것은 가나안 백성의 크고 강함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대상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대상인가 하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는 주어진 환경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보는 시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의 시각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그 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애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보는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3:1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십시오. 거기에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민14:9)
두려움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거역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데,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기에 더욱 부정적이 되며 안 된다는 의식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시68:6)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시107:10-11)

하나님께 거역하지 말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순종하는 자가 믿음의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니.” (민14:9)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거민들을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거민과 비교하여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표현한 것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처럼 모든 정탐꾼들이 두려워  했던 가나안 거민을 하잖게 여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때, 하나님과 함께 보는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두렵지 않습니까? 왜 긍정적이며 감사하며 삽니까? 왜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렇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17:45-47)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대속의 제물로 삼기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가나안 땅의 약속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취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보는 관점을 가지심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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