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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익한 사람들 (몬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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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 1;8-14                          설교제목 ; 유익한 사람들


도입

하루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포도원을 가진 부자에게 아들 형제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더니 “네, 하겠습니다.”라고 시원스럽게 대답은 했지만 전혀 일하지 않았습니다.  말로는 순종하지만 행동으로는 불순종하는 못된 아들입니다.

이번에는 둘째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똑같이 말했습니다.  둘째가 처음에는 “싫어요.“ 라고 말했지만 조금 뒤에 대답을 잘못한 자기 자신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아들 중에 누가 아비의 뜻을 행하였느냐?” 라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종교 지도자들은 “당연히 둘째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큰 아들이 누군지 아느냐? 종교지도자인 바로 너희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혼자 잘 믿는 것처럼 말은 잘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전혀 못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들이 세리와 죄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지만 내가 복음을 들고 와서 전하고 가르쳤더니 자기들의 잘못된 것을 전부 깨닫고 회개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 딸 노릇을 얼마나 잘하고 있느냐?  그러므로 이들이 너희들보다 천국에 먼저 가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둘째 아들이 참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도 처음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나중에 자빠지는 사람이 있고, 처음에는 시큰둥했지만 갈수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후자를 원하시고, 우리들 역시 그런 사람을 더 인정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참으로 유익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빌레몬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더, 오네시모라는 빌레몬의 종도 역시 처음보다는 나중이 나아진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이 “유익한, 유용한”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이름으로 하자면 오유익, 오유용인 셈입니다.  널리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끼치는 홍익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는 유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익한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꿀벌 같은 존재도 있는가 하면,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개미 같은 존재도 있고, 남을 잡아먹는 거미 같은 존재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하나님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익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1. 복음입니다.

흔히 우리는 사람의 천성은 바꿀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일면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혈액형을 바꿀 수 없듯이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성품을 하루 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바울은 10절에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 라고 말합니다.  무엇으로 낳았습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복음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 어느 여집사님의 남편이 교회를 처음 나오는 날 목사님은 지루한 창세기 5장을 강해하고 있었습니다.  “죽었더라”라는 말만 반복되는 본문이었습니다.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예배를 마치자 남편은 선뜻 교회에 다니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유를 묻는 아내에게 “우라지게도 오래 살았더구먼.  근데 하나같이 죽었더구먼.  죽음을 준비할 나이가 된 것 같아서~” 라고 말하더랍니다. ~~~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의 힘입니다.  어느 누가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유익한 존재였습니까?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바울이요?  아니면 이방 세계에 속해서 부를 누리며 떵떵거리던 빌레몬이요?  아니면 주인의 재산을 훔쳐서 로마로 도망갔던 오네시모요?  아무도 원래부터 유익한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변합니다.  바울이 목숨을 걸고 전도합니다.  빌레몬이 그의 가족들과 함께 집을 교회로 내놓습니다.  바울의 재정적인 후원자가 됩니다.  노예 신분의 오네시모가 교회를 돌보는 신실한 일꾼이 됩니다.  모두가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힘입니다.

내가 변하려면 복음을 접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복음을 소개하면 됩니다.  자녀를 멋지게 키우려면 복음을 알면 됩니다.  복음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그 복음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2. 사랑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8-10절을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바울은 당연히 명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노예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책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네시모로부터 거듭나기 이전의 빌레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빌레몬 역시 당시의 부자들이 그랬듯이 오네시모를 학대하고, 괴롭혔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가 도망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의 개인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간구합니다.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는 오네시모를 자기의 제자로 키우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빌레몬의 동의를 받고 싶어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바울은 스스로 낮아지는 것입니까?  왜 바울은 당당히 빌레몬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일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교만도 자랑도 아니하며,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바울은 자기의 말처럼 몸소 사랑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나이로 빌레몬에게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사랑으로 빌레몬에게 자신의 소망을 피력합니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배움의 정도가, 가진 것의 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에서의 지위가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나이가 문제입니까?  학벌이나 외모가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남편이 나이가 많다고 아내를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직장에서 직급이 높다고 직원에게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나이가 많다고 나이 적은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할 수 있습니까? 

바른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으로 말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바울은 사랑으로 빌레몬에게 간구합니다.  빌레몬은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사랑으로 바울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무익한 사람에서 유익한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3. 사명입니다.

죽을 때 눈을 감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히 그런 사람들을 볼 때 한이 많아서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의학적으로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럴 듯 하게 들리는 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 사명을 이루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러나 그 만큼 사명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려는 것은 단지 이 세상이 너무 살기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가기에는 눈에 밟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비록 죽음 이후의 천국을 확신한다해도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 아이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그만큼 사람에게 사명이란 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런 사명이 있기에 사람의 삶은 바뀔 수 있습니다.  무익한 사람이 유익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여러 사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가족을 향한 사명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은 13-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은 왜 오네시모를 위하여 간구합니까?  무엇 때문에 구차하게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부탁합니까?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까?  자신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섬기는 자로 달라고 부탁하고 있지만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위하여 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향한 사명으로 오네시모를 위해서 간구합니다.  그리고 빌레몬은 복음을 위하여 바울에게 필요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바울에게로 보냅니다.  오네시모는 이전의 육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복음을 향한 새로운 소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가정에서 주어진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아내로써, 남편으로써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엄마로써, 아빠로써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한 걸음 너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목적도 푯대도 없이, 그리고 사명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니 조금만 힘들어도 넘어지고, 작은 유혹이 와도 쓰러집니다.  점점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지요.

~~~ 존 멕스웰이라는 크리스찬 저술가가 있습니다.  며칠 전 그의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10번 이상의 출격을 자랑하는 가미가제 대원은 진정한 가미가제 대원일 수 없다.” ~~~

그만큼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죽음을 불사하는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족에 대한 것이든, 하나님에 대한 것이든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정녕 오네시모입니까?  여러분은 정녕 유익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은 주위의 많은 사람에게 유익하나 사람으로 매김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유익한 사람입니까?

설령 우리가 아직은 무익한 종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의 있고, 사랑이 있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무익한 삶에서 유익한 삶으로 옮겨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네시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복한교회  김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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