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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은혜로 된 사람입니다 (고전 1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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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은혜로 된 사람입니다 (고전 15:9-10)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정신과 의사 스코트 펙은 임상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양상들 가운데 설명하기 어려운 놀라운 일들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분명 환자들에게 이 정도의 아픔과 상처가 있다면  증상이 악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이 의외로 건강한 모습들을 보면서 자연 법칙과 정신 과학의 틀을 가지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살하는 이유는 알고 있는데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밝히기가 어렵다는 말과 같습니다. 순전히 우연이라거나 이변, 운명의 교차, 뇌세포의 기능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고 우리가 완전히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힘, 우리는 그 힘을 은총이라 부릅니다.

  에이치 리가 일했던 트럭 터미널의 한쪽에 석탄회사가 있었습니다. 근처에는 철도가 있었고 매일 몇 대의 화물열차가 지나다녔습니다. 리는 그리스도인이었던 회사 사장이 종종 철길을 따라 군데군데 울타리 너머로 석탄 덩어리를 던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사장에게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한 할머니가 길 건너에 살고 계시는데 나는 그녀의 연금이 석탄을 사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네. 기차가 지나간 뒤 그 할머니는 철도를 따라 걸으면서 열차가 지나갈 때 기관차 뒤에 있는 석탄차에서 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석탄을 주우시지. 그 할머니는 증기 기관차가 디젤 기관차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계신다네. 난 할머니를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서 울타리 너머로 석탄을 던지는 거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은혜를 피부에 와 닿게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은혜는 베풀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은헤를 받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은혜로 비싼 댓가를 지불하여 큰 도움을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해서 자원하여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의 제물로 삼아 희생하는 것이 받는 쪽에서는 큰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값없는 은혜를 어떻게 다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다 감사할 수 있습니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찬송가 410장)

  영국에 목사님이면서 찬송가 작가인 존 뉴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는 그 405장 그것을 작사한 분입니다. 그 분의 글에 아주 유명한 말 한마디가 있답니다. 우리가 만일에 천국에 가게되면 틀림없이 깜짝 놀랄 일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에 와 있으리라고 했는데 와 보니까 없어요. 착해서 꼭 가리라 하고 생각한 분이 천국에 없더랍니다. 또 한가지는 저런 사람은 천국과는 관계없다. 영영 구제 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생각했는데 이 사람이 천국에 와 있더래요. 또 한가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못되는데 내 자신이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천국은 전적인 은혜로 가는 곳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나됨은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은혜라고요.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내 힘으로가 아니고 오직 은혜로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제가 잘나서 성공한 줄 압니다. 자기가 많이 노력해서 행복하게 사는 줄 압니다.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룬 줄 압니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은혜를 깨닫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를 알고 하나님이 확실하게 은혜를 모든 삶 가운데 부어주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언제나 겸손함을 잃지 않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요. 늘 자신이 은혜를 많이 받은 존재임을 안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럼 성도들은 어떤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까?  바울은 어떤 은혜를 힘입었기에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격해합니까?

  1. 과거를 따지지 않는 은혜(9)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교회를 깨뜨리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믿는 이들을 공연히 미워하고 잡아 가두고 돌로 쳐서 죽이고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괴롭혔습니다. 다메색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님은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공격하고 성도들을 괴롭히는 것은 곧 예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잘못된 열심으로 지나치게 교회에 해를 입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요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죄를 저지를때 하나님이 심판 하실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은 바울을 내치거나 심판치 않으셨습니다. 후에 사도가 되었을때에라도 그 값을 치루게 하실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큰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바울의 잘못을 낱낱이 기억하여 미워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사건건 "너같은 죄인은 안된다." 하셔도 바울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며 그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일깨워 주신 후에 회개한 바울에게 한번도 다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 기억합니다. 부부간에도 잘못한 것을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기억에서 지워버리지 못합니다. 부모라고 해도 예전에 잘못한 것을 다시 말할 때가 많습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한번 잘못하면 예전의 잘못을 떠 올려 낙인을 찍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보면 학력위조를 찾아내서 폭로하여 망신을 당하고 일생동안 이루어 놓은 것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봅니다. 유명한 많은 사람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운 과거가 드러날까 걱정이 되어 불안에 떨고 있다고 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것은 죄악입니다. 그러나 오래 전 과거까지 낱낱이 조사하여 폭로하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우리 죄와 허물, 실수와 부끄러운 과거를 다 지워 주십니다. 과거의 잘못때문에 오늘과 내일에 복을 취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을 다시 거두어가시는 일이 절대 없습니다. 어떤 죄를 저질렀어도 회개하면 다 용서하시고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평안과 천국의 기쁨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십니다. 존귀하게 높여주시고 새로운 복된 삶을 열어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래오래 참아주셨습니다. 그걸 내가 미처 모르고 있었던 거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 속에 내가 있음을 미처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을 때 그대로 벼락을 쳤으면 다 끝났지요. 그러나 그 많은 죄악 중에서 짐짓 죄를 범하고 못된 짓하고 있지만은 하나님은 오래오래 참아 주셨어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나를 향하여 참아주신 것, 그것이 은혜인 걸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모든 죄와 허물을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옮겨주시고 깊은 바닷물속에 묻어 주셔서 다시는 드러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에서조차 다 지워주시고 과거의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떠 올리지 않으시고 오늘 믿음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예쁘게 봐주십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2. 존귀하게 쓰임받는 은혜(10)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는 사람이라며  하나님 앞에 고개를 쳐들고 자기 공로를 이야기할 만도 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수고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합니다.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 `교회의 핍박자', 바울은 이 두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처럼 자신을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 하나님은 자격있다고 하시고,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시며 그는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 삼지 않으신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자기가 존귀하게 쓰임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크게 빚진 심정을 읽을 수있습니다.  솔직히 우리도 직분을 감당하기에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핍박자도 있을 것이고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살았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런 죄, 저런 죄를 범해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를 간직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돌보시고 인도하셔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고 있습니다. 영광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엊그제 한 친구가 밥을 사주면서 오 천명 모이는 교회에 초청받아 한 시간 설교 했는데 사례를 50만원을 받앗다고 했습니다. 큰 교회 초청받아 설교하고 백 만원 사례를 받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는  한 친구가 '나는 신학교 가서 강의하면 한 시간에 5만원밖에 못 받는데.. 나는 5만원 짜리 목사인가?'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나는 돈 가지고 가서 설교하고 온다." 해군부대 가서 설교하고는 사례 받는 것이 아니고 병사들 간식 사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목회자들 밥 사주며 제자 훈련 시키고 잇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얼마 받느냐?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귀하게 쓰임받았느냐?로 평가될 것입니다.

  만약 제가 얼마나 돈을 받느냐?  얼마나 큰 교회서 목회하느냐? 등으로 다른 목회자와 저를 비교한다면 저는 불행해지고 맙니다. 친구가 유명한 부흥사가 되는 것을 보며 열등감에 사로잡히거나 시기심에 괴로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진심으로 그 친구가 이 시대에 뜨는 강사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사용하여 주십사 간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하나님의 목적대로 성령님께 사로잡혀 가치있게 쓰임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 가치있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많은 영혼의 성장을 돕게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을 양육하여 일군으로 세우는 일에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상처를 싸매고 가정을 회복시키는 일에 귀하게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견고하게 세우는 일에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중보기도를 통하여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돕는 일에 귀히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그 외에 받은 은사와 사명에 따라 어린이, 청소년과 청년 또는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을 세워가는 일에 아름답게 쓰임받기를 축원합니다.
 
  보함이라고 하는 그런 작가가 있는데 그가  자기 친구네 집에 가서 한 일주일동안 머물러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중에 무슨 소리가 들리면서 잠을 깼어요.  호기심에 자기 침실을 나와서 보니까 마침 저쪽 방이 문이 조금 열려있어요.  잠깐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있었습니다. 친구의 어머니가 침대에 걸터앉아서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침대에 천장만 보고 누워 있는 한 20살 난 청년이 있어요. 그 앞에서 눈물로 호소를 합니다. "내가 너를 낳았고 내가 네게 생명을 주었다. 내가 돌보았고 오늘까지 정성을 다했노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네게 끼친 사랑을 되돌려 받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을 느끼고 그저 한 번 웃는 얼굴을 보여다오. '나는 이렇게 사랑을 받아서 행복합니다' 하고 빙그레 한 번 웃음을 보여다오." 그리고 애타게 부르짖고 있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사는데 기뻐할 줄을 모른다면, 행복한 줄도 모른다면 얼마나 답답한 얘기입니까?  은혜를 은혜로 느끼지 못하는 것,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2장에서 말하기를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기뻐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은혜에 충만하니까 '이대로 피를 쏟고 죽어도 나는 좋다. 나는 행복하다.' 감격하여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은혜가 충만하여 '나는 은혜로 된 사람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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