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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울부짖는 믿음 (눅 18:35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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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부짖는 믿음 (눅18:35 - 43)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르짖는 백성들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다. 창세기 4장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가정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첫째 아들인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인류 역사상 첫번째 살인자가 된다. 아벨이 죽은 후, 아담과 하와는 셋째 아들인 셋을 낳는다. 그후로 두 가문이 생기게 되고 모든 인류는 이 두 가문으로 비롯되게 되었다. 가인은 하나님을 반항하고 자신의 이름을 세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셋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창세기 4장25-26절을 보자.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가인이 했던대로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반항하며 자신들의 이름을 세우려는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셋의 후손들은 셋이 했던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민족이 되었다. 인류 초창袖?역사는 이와같이 두 부류로 나누어져서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즉, 하나님을 부르짖는 민족들과 자신들의 이름을 세우는 민족들로 나뉘게 되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민족을 원하셨고 백성들에게 그런 마음을 주셨다. 예레미야 29장11절을 보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이 말씀이 기록되었던 당시의 유대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그들은 나라도 잃고 자신들의 정체성도 상실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때에 그들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고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어느 때라도 당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너희들을 새롭게 하려는 계획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형통함과 위로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런데 그 다음 절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 29장12-13절을 보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이 말씀은 약속과 연결된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부르짖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안위와 평강과 평화를 위해서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부르짖음으로 그 약속이 너희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는 백성이 되라는 것이다.

로마서 10장13-18절을 보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왜 선교와 전도가 필요한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이다. 또 이 말씀은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 사용되는 언약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교회가 사람들을 세워서 보내야 전도하는 사람이 되고 전파하게 된다.
(2)그리고 그들로 인해서 저들이 복음을 듣게 된다.
(3)그리고 저들이 복음을 들어야 믿게 되고 믿는 자들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가서 믿는 자가 되어야 부르짖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를 더한다면,
(4)믿음이 생겨야 주의 이름을 부르짖는 자가 생길 것이다.

우리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는 자들이 될 때까지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같이 성경은 그 처음과 끝을 통해서 부르짖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지난 3 주간, 일본과 한국을 다녀왔다. 그리고 기간 내내 이 말씀을 묵상하였다. 지금 이 때야말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부르짖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참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아프카니스탄 피납 사건으로 인해서 온 나라가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는 듯 했다. 특히 한국 교회는 큰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 마치 헤어나올 수 없을 듯이 힘들어 보였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Anti 세력들이 참으로 많았다. 종교의 문제를 떠나서,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Anti적인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만큼 기독교를 향한 불평과 불만이 팽배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교회는 한 나라의 빛이며 소금의 역할을 해야하는데 어떻게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이러한 위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번 기회에 우리는 정말로 부르짖음을 회복해야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나라를 축복하지 못했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세계적인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세계적인 교회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know-how만을 가지고 선교해 온 것은 아닌지?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 그래야 한다는 느낌이 강렬하다. 아직도 21 명의 형제와 자매들이 억류되어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정부도, 다른 나라들도, 심지어는 UN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정말로 인생적으로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울부짖어야 한다. 아프카니스탄을 향해서, 탈레반을 향해서, 그리고 많은 이슬람 국가들을 향해서 우리는 더욱 더 울부짖어야 한다.

1957년 경, 미국의 다섯 청년이 남미로 선교를 떠났다가 그곳에서 처참하게 순교한 사건이 있었다. 그 때에 미국민들은 이것이 엄청난 낭비라고 외쳤다.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젊은 청년들이 다섯 명씩이나 죽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그들이 흘린 피는 거룩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곳의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를 이루었다. 그들 중에서 목사가 나왔고 그들이 서로 안수하며 신앙의 꽃을 피우는 장면이 보도되었다. 그리고 당시 1957년부터 수 년동안 미국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선교사들이 배출되었다. 이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교회가 아프카니스탄에 세워질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기도할 때이다. 지금은 울부짖을 때이다.

바디메오는 부르짖는 믿음을 가진 자였다. 그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고 독특한 면도 없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지만 복음서에 세 번이나 소개된 믿음의 인물이었다. 그는 맹인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주위가 시끄러워서 주위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디메오는 그 때부터 부르짖기 시작하였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잠잠하게하려 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의 부르짖음에는 큰 신앙고백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신앙의 고백이 있었던 것이다. ‘이 분은 분명한 메시야이시다’라는 믿음이 생기자,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울부짖기 시작하자, 주님께서 가시던 발길을 돌리셨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다. 이것은 아무도 중단시킬 수 없고 말릴 수 없는 거룩한 행군이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수 없다라고 주장했을 때에도 주님은 그의 뒤에 있던 사단을 꾸짖으시며 물리치셨다. 아무도 주님의 십자가 행을 거절하거나 방해할 수 없었다. 주님의 마음은 번민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참으로 비천한 한 영혼으로 인해서 주님은 그 발을 돌리셨다. 주님은 이와같이 부르짖는 당신의 백성을 무시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리고 주님은 긍휼한 마음으로 바디메오를 부르셨고 그는 아마도 겉옷을 팽개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매우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주님은 이미 그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아셨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부르짖음을 듣기 원하셨다. 그때에 바디메오는 주님, 네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의 믿음은 바로 부르짖는 믿음이었다. 그에게는 물론 장애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장애물 앞에서 그는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갖고 부르짖었다. 이것이 바디메오의 믿음이었다. 예레미야 33장3절을 보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번 한국 방문 마지막 날에 ‘양화진’을 들렀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쓰시다가 이 나라에서 숨져간 수많은 외국 선교사님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우리 아이들은 발전한 한국의 모습을 보고 많이 감탄하였지만, 그러나 마지막으로 ‘이 곳이 한국이다’라고 알려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양화진’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이 땅을 위해서… 미국과 영국과 캐나다등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편하고 명예롭게 살 수도 있었지만 바로 이 땅을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과 인생을 던진 것이다. 우리는 그 분들이 이 땅에 남긴 믿음의 유산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부르짖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이라고 부르짖었던 언더우드 선교사, ‘나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라고 고백한 아펜젤러 선교사등등… 이 땅을 위한 수많는 선교사들의 부르짖는 믿음이 있었다. 그들로 인해서 믿음을 갖게 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나라를 빼앗기고 나라가 갈라지는 아픔 속에서, 그리고 순교의 고통 속에서도 부르짖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토요비전예배를 통해서 믿음의 Legacy를 공유하며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기도한다. 또한 Holy Wave 영어예배를 통해서 부르짖는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유산이다. 이것이 부르짖는 믿음의 유산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부르짖을 때가 온 것이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이민교회의 위기이다. 한국교회가 흔들리면 이민교회도 흔들린다. 이때에 우리는 함께 부르짖어야 한다. 지금 이 상황을 회복하고 한국교회를 치유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뿐이다. 부르짖을 때가 분명히 온 것이다. 한국도, 아프카니스탄도, 미국도, UN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부르짖는 믿음만이 해결할 수 있다. 이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정부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그곳에서 흘린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역사를 시작할 것이다. 선교의 마지막 frontier이다. 그리고 상대는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극렬한 탈레반이다. 우리가 모두 울부짖어야 흘린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부르짖어야 한다.

바디메오 곁에는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모두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 주님은 바디메오 한 영혼만을 만나셨다.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바디메오에게도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르짖었다. 우리 앞에 있는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함께 부르짖자. 부르짖을 때에 power가 생기는 것이다. 이 시간에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자. 이민교회를 회복시켜달라고 부르짖자. 21명의 형제 자매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리지 않도록 주님께서 도와달라고 부르짖자. 아프카니스탄에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속히 올 수 있기를 기도하자. ‘아프가티스탄의 양화진’이 세워질 수 있기를 부르짖으며 기도하자. 아멘.
(김승욱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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