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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흥을 원하시는 하나님 (창 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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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흥을 원하시는 하나님(창35:1-5)

  교회를 다니면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부흥’이란 단어다. 우리는 찬양도 부흥에 대해 많이 부른다. 그러면 부흥은 무엇인가? 우리는 부흥을 말할 때, 교회가 수적으로 늘어감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흥이 아니라, 부흥의 결과다. 부흥하면 수적으로 늘어난다.

  부흥이란 ‘하나님을 만남’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만나면,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히브리어로 부흥을 ‘하야’(ה󰖷󰖎)라고 하는데(합3:2, 시85:6), “재생시키다. 살아있다, 확실히 생명을 주다, 회복시키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부흥을 원하신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났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3,000명, 5,000명이, 하나님께 돌아왔다. 진정한 부흥은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와 만나주심을 말한다. 그래서 죄악 가운데 있는 백성들과 침체에 빠진 백성들이 회개하고,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나는 축복이 임한다.

  부흥은 개인의 부흥, 가정의 부흥, 교회의 부흥, 국가적인 부흥, 여러 가지다. 본문은 야곱 가정의 부흥을 설명하고 있다. 야곱의 생애를 연구하면, 그는 부흥을 몇 번 경험한다. 처음 두 번은 개인의 부흥을 경험한다.

(1)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 루스라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을 벧엘이라 한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창28장). (2)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곳을 ‘브니엘’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께서, 야곱 가족 전체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찾아오신다.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항상 먼저 야곱을 찾아오신다.

  야곱이 침체해 있을 때, 찾아오셨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려고 할 때, 침체에 빠졌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창31:3)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하셨다. 그래서 야곱은 라반의 집을 떠난다.

  그때 야곱은 얍복 강에서, 부흥을 체험한다. 하나님을 만나고 깨어진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형 에서와의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나 문제는, 야곱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지 않고, 세겜 땅에 머무른다(창33:18-20). 외삼촌 라반의 집은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신 땅까지는 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도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 땅에 머물렀다. 환도뼈가 부러지는 경험을 할 때만 해도, 야곱은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이 바뀐다. 세겜에 머무를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

  그런데 34장에 가서, 야곱이 침체에 빠지고, 그 가족들도 완전히 침체에 빠지게 된다. 세겜 땅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그 곳 사람들을 구경하러 나갔다가,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다(창34:2). 그래서 그의 오빠들은,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받도록 한 후, 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살해를 한다.

  세겜 사람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뺏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그 지역 사람들이 자신들을 쳐서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한다. 신앙이 침체에 빠져, 하나님께 단을 쌓지 않고, 찾지도 않는다. 야곱 가족이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와 만나주신다.

  그리고 그가 집을 떠났을 때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다. 야곱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가족 부흥을 체험한다. 그리고 축복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부흥을 경험해야 한다.

1. 부흥을 경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만나면 복이 넘치게 되므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는 부흥이 있을 때, 야곱은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어떤 축복을 받았나요?

(1)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부흥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심령에 부흥이 임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이 세상에 더 큰 축복은 없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최상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해야만 한다. (사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만나 주심이 가장 큰 축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2) 환난 날에 구원받게 된다(5).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말씀한다. 그들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셔서, 추격하는 자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는 우리를 힘들게 하며, 때로는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부흥을 경험하게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사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흥을 간절히 사모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하면, (히12:15) 말씀처럼 우리는 죄를 짓고, 남을 정죄하는 쓴 뿌리가 된다. 그러므로 환난 날에, 더욱 부흥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히스기야는 나라의 풍전등화 위기에, 생명을 걸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끌어 낸 사람이다. 또한 죽을병에서 생명을 연장 받았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살아난다.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면, 이처럼 환난가운데 구원받는다.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주님을 만나시기 바란다.

(3)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빌 게이츠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빌 게이츠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무시당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다보면,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야곱의 모습을 보고, 진취적이어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사기꾼과 같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야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이스라엘 12 지파의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더 이상 사람들이 그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부흥을 경험하면, 변화의 역사가 나타난다.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 인생이 변화된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 야곱은 창28:20-22에서, 3가지를 서원 한다.

①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 ②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 ③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 이러한 헌신의 역사가, 하나님을 만나면 이루어진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날 때, 자신이 깨어지는 역사를 얍복 강에서 경험했다. 그리고 거기서 새 이름을 받는다.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부르겠다(창32:28)고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날 때, 무거운 죄 짐이 벗겨지는 축복을 경험한다.

(5) 환경적인 축복도 누린다.

하나님을 만나는 부흥을 체험하면, 영적인 축복만 받지 않는다. 환경의 축복도 받게 된다.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의 환경까지 치료하시고, 복되게 하신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서 벧엘을 떠났을 때, 그가 누렸던 축복은 대단했다. (창32: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라고 말했다.

  죄가 찾아오면 환경도 병든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오시면, 환경까지도 축복을 받는다. 들어가도 복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떡 반죽 그릇과 우양의 새끼까지 복을 받는 역사가 나타난다. 병든 땅을 치료하시는 축복도 경험하게 된다. 죄악이 떠나고, 술집이 문을 닫기도 한다.

(6) 자녀의 축복을 받는다.

야곱의 가정에 부흥이 있은 다음, 야곱의 아들 요셉이 꿈꾸는 소년으로 나타난다. (창37:9) “요셉이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부흥은 성령님이 임하시기에,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꿈과 환상을 보게 된다. 꿈과 환상을 보기에,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는다. (행2:17)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하였다.

  야곱의 가정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임하자, 요셉이 성령 충만을 받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꾸었고, 그 꿈대로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다.

(7) 정의의 사람에서 은혜의 사람으로 변한다.

세상은 은혜와 정의, 이 2가지 주장으로 대별된다. 이 두 원리를 잘 보여주는 두 작가가 있다. ‘빅톨 위고’와 ‘알렉산드르 뒤마’다. 먼저 알렉산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보자.

  긴 항해를 마치고, 마르세유에 귀항한 젊은 선원 ‘에드몽 당테스’에게는, 선장으로의 승진과 사랑하는 ‘메르세데스’와 결혼을 앞둔, 희망찬 인생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결혼식 날 억울한 죄명을 쓰고 체포되어, 중대정치범으로 외딴 섬 ‘이프’ 성채 감옥에 유배된다.

  14년 후 같은 처지였던 ‘파리아’신부의 죽음을 이용하여 탈옥에 성공, 신부가 지중해 외딴 섬 몬테크리스토섬에 숨겨둔 보물을 찾아,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이름을 바꾸고, 파리의 사교계에 등장한다. 그래서 옛날 자기를 모략한 사람들에게, 차례로 냉혹한 복수를 한다.

  권선징악이 주제이므로, 읽는 사람들이 통쾌감을 느끼지만, 그뿐이다. 사람은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은혜의 원리를 보여준,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보면, 주인공 장발장은 빵을 훔친 죄로, 19년 간 중노동을 하게 된다. 작은 잘못 하나에 이렇게 가혹한 징벌을 가하면, 인간성이 파괴된다.

  결국 그는 사나운 죄수가 되어, 19년 만에 출소하게 된다. 그러나 죄수였던 그를 아무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흘 동안 헤매다가, 어느 친절한 신부가 자비를 베풀어서, 잠자리를 얻었다. 그는 한밤중에 갈증을 해소하려고 물을 찾다가, 찬장을 뒤지게 된다. 거기에는 멋진 은잔이 있었다.

  갑자기 욕심이 생긴 장발장은, 그 은잔을 훔쳐서 어둠 속으로 도망친다. 그런데 그를 아는 형사 ‘자베르’가 있다. 그는 전과자는 변화될 수 없다는 소신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만 추구하는 대표적인 사람이다. 어둠 속에서 훔친 은잔과 함께, 장발장을 붙잡아, 끌고서 신부에게 온다.

  낌새를 알아차린 신부가, 장발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시 오셨군요. 다행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가 은잔과 함께 촛대까지 주었는데, 촛대는 그냥 두고 가셨더군요” 결국 신부의 이러한 행동에, 장발장의 삶은 변화되었다.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사람들이 강간했다고 다 죽이지만, 그러나 은혜를 경험한 다음에는, 자신과 자녀들을 목숨을 걸면서, 은혜의 사람들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창43:9).


2. 그러면 부흥은 어떻게 임하는가?

(1) 갈급한 영혼에 부어주신다.

이 세상에는 배부른 사람과 배고픈 사람이 있다. 배부른 사람은 좋은 음식을 주어도, 귀찮아하면서 거절한다. 반면 배고픈 사람은, 무엇을 주던지 잘 받아먹는다. 영적으로도 보면 똑같다.

  영적으로 배부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도 귀찮지만,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보다 열망한다. 영적으로 허기져서 배를 움켜쥐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 이렇게 사모하며 나오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적 목마름과, 배고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임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시107:9). 그러나 ‘어떻게 되겠지’하는 태도나, 적당히 하려는 태도는,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목마름은 위대한 능력이다. 지도자는 무엇보다, 목마름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 일에 대하여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목표를 이루어내고, 무슨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부흥을 부어주신다. 사모하는 개인에게 부흥의 불씨를 주신다.

  그러나 많은 경우, 공동체적으로 역사하신다. 함께 모여서 부흥을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공동체에 부흥을 부어 주신다. 부흥에 대한 갈망은, 때로는 인간의 한계선상에서, 절망을 느낄 때 갖게 된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갈 때, 얍복강에서 고민하고 절망할 때, 부흥을 경험했다.

  본문도 세겜 땅에서, 세겜 남자들을 죽이고, 재물을 노략함으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찾아오셨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갈망했다. 하나님을 사모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와 만나주셨다.

(2)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회개하라(2).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부흥을 경험하는 길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막힌 담을 헐어야 한다. 야곱은 지금 가족적인 결단을 한다.

  야곱의 가족들은, 아직도 우상들을 섬기고 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서원한 내용도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야곱은 이제 우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꿔 입으라고 명령한다. 단호하게 회개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단을 쌓기로 결정했다(35:3-4).

  야곱은 과감한 결단과 헌신을 한다. 벧엘로 떠나 단을 쌓는다(6-7). 야곱과 야곱의 가족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회개할 부분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과 서약한 것을, 아직도 지키지 못한 부분이 없나요? 또한 아직도 우상을 섬기고 있지 않나요?

(3) 부흥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라.

야곱의 가족이 부패한 원인은, 그들 중에 있는 이방 신상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값비싼 고리들과 드라빔을 다 버린다. 드라빔은 아버지의 전 재산을, 유산으로 받을 수 있는 값비싼 것이다. 그러나 그것까지 다 버렸다. 이것이 헌신이고 결단이다.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헌신하거나,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약속하신 분이 있나요? 물질의 축복을 주시면, 자식만 주시면, 결혼만 시켜 주시면… 하면서, 약속한 것들이 있지 않나요? 수없이 약속하고 부도를 낸 우리들이다. 십일조는 축복의 통로다.

  우리는 온전한 십일조를 약속하고, 부도내지는 않았는지요? 어떤 분은 주의 종이 되고, 선교사가 되었는데도,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십일조는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와 자녀들을 위해서다. 십일조의 축복은, 율법 이전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4) 간절히 기도하라.

얍복 강에서 경험했던 부흥의 축복은, 간절한 기도의 결과였다. 야곱은 울며 기도했다. 함께 모여서 기도하면 훨씬 더 좋다.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난다.

  마가 다락방에 120명이 모여 간절히 기도할 때,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오순절의 부흥이 찾아왔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만난 사람들은, 5백여 명이나 된다. 그러나 마가 다락방에 모인 사람은 120명뿐이었다. 500여명과 120명의 차이는, 부흥을 사모하여 함께 기도했기 때문이다.

(5) 주신 축복으로 사명을 감당하라.

부흥을 경험하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을 만난 후,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받았다. 이삭은 거부가 되었다. 야곱도 (창35장)에서 부흥을 체험한 다음에,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그 축복은 요셉이라는 아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축복이다. 단순한 출세만 하지 않고, 요셉을 통해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 자녀들을 축복하신다. 그 이유는 축복으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다. 우리와 우리 자녀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기 바란다.


  결론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고, 제일 답답한 사람은, 주님을 믿으면서도 ‘허송세월’하는 사람이다. 목적도 없이 살아간다. 작은 집을 하나 지을 때에도 ‘설계도’가 필요한데, 귀중한 인생을 살면서도, 설계도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인생이다.

  세상은 비전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변화된다. 비전과 꿈은 재산이다. 결코 헛되지 않다. 1640년 ‘존 하버드’라는 사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후, 훌륭한 목사를 양성하기 위해서 ‘보스톤’ 한 구석에 대학을 세웠다. 이 대학이 바로 하버드 대학이다.

  하버드 대학은 하버드가 내놓은, 700파운드의 돈과, 책200권으로 시작된 학교다. 그러나 안타깝게 하버드는 대학을 세운지 1년 만에 타계하므로, 하버드대의 영광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꿈을 사용하셔, 이 대학을 통해 미국의 많은 목사와 대통령, 노벨 수상자를 만들어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꾸고, 변화시키려는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먼저 우리 가족의 부흥을 사모하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을 버리자. 죄악을 버리고, 약속한 헌신을 새롭게 하시기 바란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가, 요셉처럼 나타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요셉으로 인해 온 가족이 축복 받고, 요셉이 세계적 인물이 됨으로, 물질의 복도 받고, 가족전체가 복을 받아, 세계를 구원하는 사명까지도 담당하시기 바란다. 이런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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