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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다 더 좋은 결말 (룻 4: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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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보다 더 좋은 결말 (룻기 4:18-22) 

룻기는 이방 여인 룻이 베들레헴에 사는 보아스와 결혼하여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아 몰락한 한 가정을 다시 회복시켰다는 행복한 이야기로 마치는 해피 앤딩입니다.  이 이야기의 행복한 결말은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다는 인생 역전의 즐거움과 희망을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방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한 훌륭한 성품의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장로들과 백성들이 축복한 말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룻과 보아스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을 때 베들레헴 온 동네가 기뻐하며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하며 이름도 이웃 여인들이 지어주었던 오벳은 온 동네 사람들의 축복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란 복둥이였습니다. 

그런데 룻기의 행복한 이야기는 새 아기의 출생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유명한 보아스나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오벳보다 더 유명한 다윗 왕이 이 가문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룻기 저자는 그 오벳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가장 유명한 왕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을 덧붙임으로 이야기를 마칩니다.  그리고는 부록으로 다윗의 조상 베레스로부터 시작하여 다윗까지 열 명의 이름이 열거된 족보를 덧붙임으로 룻기의 이야기는 다윗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절에 시시때때로 주변 국가들에게 약탈을 당하면서 약소국의 비참함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들을 통해 나라의 위기를 넘기고 평안을 회복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300여 년간을 이렇게 불안정하게 지내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력한 왕 다윗의 등장은 이스라엘의 자존심이고 자랑이었다.  룻기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다윗이라는 영웅을 보내시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기까지 어떻게 그 은혜의 손길을 펼치고 계셨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베들레헴의 한 가정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성경 신학자는 이 룻기를 가리켜 ‘다윗 왕조의 용비어천가’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합니다.  ‘용비어천가’가 태조 이성계 이전의 여섯 조상들의 행적을 통하여 조선 왕조의 창업 이념을 설명하고 칭송하려는 목적에서 기록되었던 것처럼 같은 맥락에서 룻기를 ‘다윗 왕조의 용비어천가’라고 부릅니다.  다윗 이전 조상들의 이름이 열거된 다윗의 족보를 맨 마지막에 둠으로써 이스라엘의 강력한 왕으로 즉위한 다윗을 칭송하며 이런 왕이 나오기까지 배후에서 일하고 계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찬양하려는 목적에서 룻기를 기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룻이 낳은 오벳은 상속자를 잃은 엘리멜렉 집안의 회복자였다면, 다윗은 주변 국가들에게 복속되어 설움을 당하던 이스라엘이 받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그 지위와 특권을 회복시킨 기업 무르는 자로 상징이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는 이름을 가진 엘리멜렉이었지만 현실에 고난이 닥쳐왔을 때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신뢰하지 못하고 현재의 고난으로부터 도피하려고 눈에 보이는 왕과 풍요를 찾아 베들레헴을 떠났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시 하나님의 품, 고향으로 돌아온 가정이 기업 무르는 자 보아스를 만나 회복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다스리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 룻기의 의도였습니다.  이렇게 한 가정의 행복한 끝맺음으로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고 싶었던 룻기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기업 무르는 자 다윗 왕을 통해 이스라엘을 친히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성경 주석가 카일과 델리츠(Keil & Delitzsch)는 오벳이 다윗의 조부가 되었다는 다윗의 족보로 끝을 맺는 룻기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이 책은 다윗의 조상들의 가정생활을 통하여 이 위대한 왕을 낳은 조상들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의로운 생활을 하였는가를 보여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실한 조상들에게서 온 이스라엘의 충성과 경의를 한 몸에 받은 다윗이 탄생한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룻기는 혼란했던 사사시대가 마감되고 안정된 왕조 시대가 열리는 역사적 전환의 의미를 룻과 보아스의 아름다운 결혼 이야기와 다윗 가문의 족보를 기록함으로써 알리고 있습니다.  또 동시에 이 족보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와 연결됨으로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드러내는 메시아 왕국의 족보가 되는 셈입니다.

마태복음 1장1절-6절까지 읽어봅시다.  우리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다윗의 족보를 통해 룻기가 말하고 있지 않은 더 좋은 결말을 보게 됩니다.  다윗의 시대에 기록되었다고 추측되는 룻기는 다윗으로 그 이야기를 마치고 있지만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는 다윗에서 그치지 않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최종 결말을 보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다윗의 족보를 봅시다.  메시야의 족보라고 말해야 정확한 이 족보에 이상한 점들이 있습니다. 룻기나 역대상의 족보에 나오지 않는 여인들의 이름이 몇 차례 언급이 됩니다.  다윗의 족보는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식으로 이어지는데 메시야의 족보에서는 여자에게서 아들을 낳았다는 몇 구절이 눈에 뜨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성경에 기록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운 불륜관계나 이방인 출신 등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복의 근원, 야곱이 축복한 유다 자손의 언약을 이어가는 소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은 본래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제조하던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시고 불러내시어 이스라엘의 조상을 삼으셨고 믿음의 조상이 되어 그의 후손을 통해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고 했는데 다말이라는 여인이 누구던가요?  야곱의 아들 유다의 며느리였던 다말은 남편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벌을 받아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은 후 형사취수의 풍습을 따라 시동생 오난에게서 아들을 얻으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시동생 오난 역시 이 일에 연루되어 죽고 만 뒤 시아버지 유다는 말째 아들마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아들을 며느리에게 보내는 것을 미루자 다말은 창기로 변장하여 형사취수 제도를 어긴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여 쌍둥이 아들을 낳았으니 그들이 바로 베레스와 세라였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다윗의 조상 중에 베레스가 바로 이런 추잡한 음행과 불륜에서 나온 아들이었습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을 정탐하러 온 히브리인들을 자기 집 지붕에 숨겨줌으로 여리고성 함락 때 자기와 가족들의 목숨을 건짐 받은 여인입니다.  본래 이방인이요 기생 출신이었던 라합이 살몬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룻기에 등장한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였습니다.  그리고 룻기의 주인공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남편을 사별한 남편의 고얗으로 이주하여 보아스와 재혼함으로 오벳을 낳은 여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지만 충성스런 신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하여 왕권으로 여인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범하였고 그 사이에서 낳은 아기는 칠일 만에 죽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를 전선 최전방에 나가 죽게 만든 다윗은 우리아의 장례를 마친 후 밧세바를 아내로 맞아들여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이처럼 추악하고 부끄러운 불륜 관계에서 시작된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다윗의 대를 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지만 사내를 알지 못하는 무명의 시골 처녀였습니다.

마태복음은 메시야의 출생이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복잡하고 수치스런 가족사 속으로 그리스도가 오시게 하셨습니다.  메시야의 족보에 이런 비윤리적이고 비천한 출신의 사람들이 중요한 자리를 맡았습니다.  요즘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학벌 세탁이나 가문 세탁 같은 것을 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사건 그대로 후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이런 시궁창 같은 세상에 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이 소망 없는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메시야로 세상에 오신 분이 화려하게 포장된 족보를 자랑하는 집안에서 나오지 않고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집안의 후손으로 오셨으니 스스로는 도무지 거룩함을 드러낼 수 없는 타락한 인간 모습 속에서 구원자가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학벌을 위조하고 신분을 위조하여 거짓으로 모양을 내려는 사람들이 흔한 세상에 비하여 다윗의 족보, 메시야의 족보는 너무 솔직합니다.  학벌과 권력과 재력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자기를 드러내 보이는 세상,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내보이지 못하는 세상, 고상하게 포장하고 덧칠하고 꾸며서 솔직한 자기가 아닌 거짓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한국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그 매력을 다했고 포교의 효과는 끝이 났다는 진단까지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본 받아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그 생명으로 하는 교회의 부끄러운 이중적 모습이 세상에 적나라하게 노출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런 진단이 무리는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4:14-16)  하였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욕과 비난은 순전한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욕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요?  주를 위한 욕은 기쁨으로 당할 것이지만 나와 교회 때문에 주의 영광이 가리우고 욕을 먹는다면 회개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부끄럼은 덮고 쉬쉬할 것이 아니라 부끄럼 그대로 드러나고 수술을 받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저분하고 역겨운 인간들을 있는 그대로 부르시고 고쳐 새롭게 하심으로 자신의 변함 없는 구원 계획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인간들이 선하고 의로워서 어여삐 보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 스스로 도무지 구원받을만한 구석이 없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학문과 예술이나 과학과 종교로 온갖 고상한 모양을 내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덮어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결국 더 교활한 이중성을 드러낼 뿐 근본적 해결이 없는 인간 역사입니다.  이런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과 무지 때문에 아직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시고 손 내미시는 구원의 기회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인간의 가능성을 과신하고 거기에 희망을 걸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냄으로 구원을 얻겠다고 호언장담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포장한 허울을 뒤집어 쓰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허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처럼 우리 시대는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는 세상, 오직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기는 세상입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캐내어 공공연하게 무차별 비판과 흠집내기에 바쁜 세상, 상대방의 약점을 잡으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결국 파산에 이르게 함으로 쾌감을 느끼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비정한 세상입니다.  오직 성공신화를 쓰기 위한 목적으로 거짓과 허세를 일삼는 지금 이 시대가 사사시대와 방불합니다.  절대 진리와 절대 구원자, 절대 선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것, 경험이 진리이고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거절하는 시대에 우리는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어 온 룻기에는 성공한 사람들만 등장하지 않고 실패와 수치와 낙망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직 성공을 목표로 여유 없이 달려가는 세상 속에서 번쩍거리는 화려한 성공의 신화와 간증이 그럴듯하게 포장이 되어 좋은 믿음으로 칭찬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실패와 한계 속에서 안타깝게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아픔을 보시고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묵묵히 따르는 믿음을 귀하게 보십니다. 

용기 있는 신앙은 죽음의 자리를 찾아가는 순교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진리가 조롱거리가 되어도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복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실패와 곤경에 처하여 있는데 잠잠히 침묵하여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죽은 하나님, 잠자는 하나님이라는 조롱이 난무할 때에도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심을 고백하고 묵묵히 따르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서 용기 있는 믿음이 나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럽고 밝히기 꺼려지는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믿음이 용기 있는 믿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향해 침 뱉으며 때리고 욕하던 사람들이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원자이면 스스로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하던 조롱 속에도 잠잠하게 십자가를 지고 계시던 주님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라면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때 침묵하지 않을 터이니 기도하여 살려달라고 애걸하라고 조롱하는 소리가 들릴 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는 이름을 가진 엘리멜렉은 하나님을 떠나 모압으로 간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누가 나와 우리의 왕이신가요?  이스라엘이 존경하고 받들던 성군 다윗은 오직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심을 고백하고 그 왕께 충성하는 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행하였던 다윗을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그의 혈통을 따라 이 땅에 만왕의 왕이 오게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베들레헴 떡집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주린 자에게 생명의 떡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들레헴의 유력자였고 나오미 집안의 회복자가 보아스였다면, 그 후손으로 출생한 베들레헴 사람 다윗은 이스라엘의 회복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나와 여러분의 회복자이십니다.  룻기의 행복한 결말은 다윗을 통해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결말을 보게 합니다.  섬기고 낮아지심으로 우리의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무너진 공동체와 세상을 회복해 나가는 왕의 자녀들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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