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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백성과 계시 (창 1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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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과 계시 (15:1-21)


구약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에게 임하여”라는 문구는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 쓰인 표현입니다. 창세기에서는 15:1, 4절에서만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보증하시기 위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백성과 계시라는 관점에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4장에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동방 연합군을 공격했습니다.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이로써 그는 수많은 적들을 만들어놓았습니다. 또한 전리품의 십일조를 드리고 소돔왕의 제물은 거절했기 때문에 재정적인 손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싸울 동안에는 멍들고 다쳐도 아픈 줄 모르다가, 싸움이 끝나면 그제야 온 몸이 쑤시고 아픈 것을 느낍니다. 아브람도 전쟁 후 일상의 삶으로 돌아오자, 슬슬 동방 연합군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재정적인 손해의식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람을 위로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과감하게 어떤 일을 결정한 후에 이런 감정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을까, 너무 고지식태도가 아니었는가, 이렇게 살다가 망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시고 상급이 되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모든 수입의 십일조 드림은 기본이고, 자신을 위해서는 매우 검소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는 과감하게 재정을 사용했습니다. 전도하려고 건강식품 판매원의 제품을 계속 사주다보니 전국 최다 구매자 명단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주변의 지인들은 그분이 어수룩하게 속고 있음을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그분이 살았던 아파트가 재개발이 되면서 시가의 10배 이상을 보상 받았습니다. 저는 이 간증이 10배 이상을 보상 받으려는 속셈으로 하나님께 십일조 드리는 야비한 신자들을 만들어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과감하게 어떤 일을 결정했다면, 두려움과 손해 의식에 빠져 있지 말 것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아브람의 일생 동안에도 동방 연합군들의 보복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방패와 상급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2)하고 묻습니다. 지극히 큰 상급을 받아도 상속할 자식 한명 없으니 답답했던 것 같습니다. ‘왜 내게는 자식을 주시지 않는가?’하는 서운한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식이 없을 경우 종이나 나그네를 입양해서 상속자로 삼는 당시 근동지역의 풍속을 따라서 아브람은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의 말에 하나님을 향한 서운한 마음이 섞여 있을 지라도, 그의 태도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성취해보려는 신성한 의무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보면, 아브람도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을 처음부터 명확히 알았던 것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는 그 시대 사람들과 비슷한 사고방식으로 계시를 해석하려는 잘못된 판단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 백성의 조상으로서 합당한 사상과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조금씩 인도하셨습니다. 때로는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때로는 두려움과 손해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을 더 명확하게 깨달아 가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깨닫고 후손에게도 바르게 전수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아브람에게 임한 계시는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5)는 말씀과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게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7)는 말씀에서 분명하게 언급되는데, ‘자손과 땅’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던 새로운 계시가 아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부터 아브람에게 두셨던 뜻을 좀 더 밝게 드러내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특징은 이전 계시와의 연속선상에서 조금씩 더 밝아집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계시에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6). 바울이 주장한 ‘이신칭의’ 사상이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롬 4:3-9). 신약의 계시가 구약의 계시와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 됩니다. 아담에게 주어진 계시인 ‘여인의 후손’에서부터 ‘아브라함의 씨’와 ‘유다의 후손’과 ‘다윗의 자손’과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진행과 함께 점점 명확해지지만 계시의 중심 내용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3-24)고 신약의 성도와 이 사건을 연결시킵니다. 또한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고 말합니다. 이로써 아브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땅을 주시겠다는 계시에 대해서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8)라고 했습니다. 이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못 믿겠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이미 6절에서 확정되었습니다. 다만 아브람은 두려움과 손해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기도 하는 허물 많고 연약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주님께서 주신 기업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믿쑵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람이 아무것도 모른 채 무조건 복을 받도록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대해서 분명한 지식이 결여된 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셨을지라도, 그 사실을 개인이 확신하고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았을 지라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은 많은 허물과 연약함을 드러내며 살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어떤 실수를 할지, 또다시 어떤 허물을 남길지 불안한 상황에서 의롭게 되었다는 약속을 확신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 아브람에게 확신을 심어주셨고, 그의 후손들에게 두신 원대한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먼저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9)하셨습니다. 10-17절은 18절의 설명처럼 아브람과 “언약”을 체결하는 의식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짐승을 쪼갠 후에 그 사이로 지나가는 방식으로 계약을 맺었는데, 계약을 어길 경우에 쪼갠 짐승처럼 될 것을 맹세하는 의미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에게 익숙한 그 방식을 취하셔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17). 그리고 아브람과 그의 후손을 통해서 명확하게 역사의 한 기간에 일정한 지역 내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를 드러내실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18-21).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무슨 빚을 지신 것도 없으십니다. 하지만 자신을 지극히 낮추셔서 마치 아쉬운 동료들끼리 계약을 체결하는 것처럼 아브람과 언약하셨고 맹세로 보증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람을 향한 특별한 은혜였으며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확신을 줄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연약하고 허물 많은 인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제사’는 이 거룩한 관계의 상징적인 의식인데,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 절차였습니다. 이 의식에 필요한 제물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9절에 언급된 제물들은 나중에 모세 율법의 5가지 제사 제도에 쓰인 제물들인데, 후일 제사 제도의 핵심적인 사상이 이미 아브람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즉, ‘대속의 피 흘림’이 있어야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감사하는 것, 자신을 드리는 헌상, 이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 하는 일이 아브람의 제사 형식에 늘 있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제단과 성막과 성전을 통해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아브람도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마침내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히 9:28). 대신 피흘려주심으로서 죄와 허물이 사함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통치를 받는다는 사상이 신약에 와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처음부터 계시되어 왔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배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 흘림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피 공로에 힘입어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가 있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의식입니다. 예배 방식을 인간이 마음대로 고안해서 드릴 수 없는 이유는, 제사의 제물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던 것처럼 예배의 방법도 하나님이 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인간이 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날에도 예배에는 경배와 감사, 헌상, 여호와를 증거 하는 일이 핵심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것을 불쑥 계시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계시는 이전에 주셨던 계시와 연속성이 있으며 동일한 중심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계시의 역사성’이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 구속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지향하는 것과 관련하여서만 계시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는 계시,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 나라 혹은 구속사와 상관없는 독립된 계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한 개인에게 주어질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전체 역사를 내다보면서, 하나님 백성 전체를 향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성경을 떠나서는 더 이상 다른 계시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계시의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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