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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그릇 속의 보배 (고후 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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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 속의 보배 (고후 4:7-10)

허위 학력사건 - 이것은 사람들이 외형적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형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에, 육적인 것보다는 영적인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될줄 믿습니다. 보여지는 그릇의 모양보다는 그 그릇에 채워지는 내용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그릇을 가질 것인가 보다 무엇을 채울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 “질그릇 속의 보배”이란 제목으로 말씀 나눌 때 주님께서 은혜주시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인생을 가리켜 질그릇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부딪혀도 그만 깨어지고 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몸과 마음에 상처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그냥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보배란 어떤 보배일까요? 성경은 예수님을 만국의 보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보배 되신 우리 주님만 계신다면 우리가 아무리 약해도 승리의 특별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1 인생은 질그릇과 같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질그릇에 비유한 성경의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욥 10:9)“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렘 18:4)“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질그릇은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만물의 영장이지만 질그릇처럼  연약합니다. 운동으로 단련된 건장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세균에 감염되어 죽기도 하고,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생을 포기하기도 하며, 타인의 한마디 말에도 상처를 받아서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육체는 연약한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강한 자가 없습니다. 언제 넘어질지 언제 쓰러질지 모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육체를 자랑할 수 없고, 인생을 의지할 수도 없습니다.

어쨌든 질그릇은 모양도 없고, 약하여 깨어지기도 쉬울 뿐 아니라, 별로 가치도 없이 귀히 쓰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즉 가치 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호흡이 끊어지면 깨어진 질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2. 질그릇 속에 담겨진 보배

바울은 질그릇과 같은 자신에게 보배가 담겨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후4: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자신에게 담겨졌다고 하는 보배는 무엇입니까?

첫째, 바울이 가진 보배는 하나님께 받은 사도의 직분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자신의 사도 직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말합니다.  [딤후 1: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또한 이 직분이 매우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후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과거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에게 있어 사도라는 직분은 참으로 귀한 보배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보배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직분은 하나님께 상급을 받게 하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보배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 보배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믿는 자로 하여금 영생 구원을 얻게 만드는 하나님의 구원수단입니다.  [롬 1: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은 믿는자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어 천국을 소유하게 하니 참으로 하늘의 귀중한 보배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천국 비유 가운데 일꾼이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모든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산 것과 같다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이라는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거기에 투자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 이익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 귀한 보물을 누가 소유했습니까? 그것은 복음을 받아 간직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보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천국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연약한 질그릇에 지나지 않지만 그 육체에 담긴 복음은 영광스러운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복음을 알고 그 복음을 전하는일을 보배롭게 여겨야겠습니다.

셋째, 그 보배는 믿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벧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믿음은 악한자를 선한자로, 죄인들로 하여금 의인으로 변화하게 만듭니다. 영원한 멸망에서 영생 구원을 얻도록 합니다. 말초적 쾌락과 본능을 위해 살던 천한 자들로 영원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성도들이 되게 합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지닌 믿음은 보배임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 그 보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골2:2절 후반부터 3절에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그 자체가 우리 성도들에게 보배입니다. 이 세상 어떤 보물과 바꿀 수 없는 영원한 보배입니다.(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그리스도를 통해 의를 받고 영생을 받고 성령을 받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같이 약하고 천하기 그지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보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귀한 직분이 있고, 복음이 있으며,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 자체가 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이 귀해서 함께 귀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보배를 귀중히 여기고 그것을 위해 힘쓰고 수고해야 합니다.


3. 보배담은 질그릇

그럼 보배를 담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은 어떤 일이 있을까요?

1). 예수 보배가 있으면 우겨 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습니다.

(고후4:8 上)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 우겨쌈을 당한다”는 것은 원어의 뜻은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르다“라는 뜻입니다. 즉 환난과 고통이 사방에서 성도들을 압박하는 상태가 바로 우겨쌈을 당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또한 “싸이지 아니하며”라는 말은 아무리 막다른 골목, 궁지에 몰린다 해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우겨쌈을 당해도 결코 질식하지 않습니다.  나약한 질그릇 때문에 환란은 당하지만 거기에 담긴 보배 때문에 승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7:5)에서 자신들이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 사방으로 환란을 당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후7:5)
바울은 전도여행 중에 극심한 곤경에 자주 처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방으로 우겨싸는 위기를 당했지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위로해주셨다고 간증합니다. 
[고후 1: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겨쌈을 당하고 있습니까? 절대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안에 보배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의지하십시오. 그리하면 주께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때가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는 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잡으려 군대를 보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사가 아람군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서 이스라엘 왕에게 다 고하여 이스라엘과 전쟁에서 번번이 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기 위해 엘리사가 살고 있는 도단성을 겹겹이 둘러쌌습니다. 종 게하시는 두려워 떨었지만 엘리사는 하나님의 군대가 자신을 지키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불말과 불병거를 탄 여호와의 군대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기도하여 아람군대의 눈이 어두어져 오히려 이스라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출애굽-진퇴양난의 위기 = 홍해를 가르는 기적이 일어남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온갖 우겨 싸임 속에 살아가고 있습을 봅니다. 혹은 연약함과 질고의 환경에 싸여 살아갑니다. 혹은 세상의 유혹과 생활의 문제에 싸이기도 합니다. 혹은 죽음의 공포에 싸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 공격하려고 합니다. 질그릇 같이 연약한 인생이기에 때론 두렵고 때론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능력의 보배가 우리 안에 있음으로 그것들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보배 되신 주님이 이미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했습니까?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에 직면했다 할지라고 절망하지 말고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우겨쌈을 당해도 결코 싸이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환난에서 넉넉히 이기게 하시며 우리의 보배되시는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여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예수 보배가 있으면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후4:8下)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은 꽉 막혀 길이 없음을 말합니다. “낙심”이란 그 희망이 없는 절망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참 답답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해결해 보려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은 문제들로 인해 답답해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산 아래서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병든 아들을 데레고와 고쳐달라고 간청함으로 고쳐보려고 했으나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힘쓰고 애썼으나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나중에 예수께서 오셔서 해결해 주셨기는 했습니다만 제자들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고, 말씀대로 산다고 살았는데도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심을 이야기했는데도 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수고를 했는데도 결말이 좋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져다주는 답답함이 가장 클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낙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쟁이와 무당을 찾게 되고 각종 미신에 빠지게 됩니다.
답답하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질그릇 같은 우리안에 보배이신 주님의 말씀 붙잡고 다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답답한 일이 많아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충분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게 하여 주십니다. 우리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고 합니다. 어떤 절망을 만난다 할지라고 헤어날 길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빌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러므로 어렵고 답답한 일을 만났더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마시고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므로 성령의 보배로 채움 받으시기 바랍니다.

3). 예수 보배가 있으면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고후4:9上)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바울 사도는 복음 전파 사역 중에 실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고후11:23-26)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그래도 바울은 버림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복음 전파의 일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핍박하면 할수록 더 부흥 했습니다.
(행8: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핍박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사마리아와 이방 세계의 안디옥까지 복음을 전하여 안디옥 교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오늘날도 적그리스도와 반기독교적인 세력은 온갖 것들과 연대해서 예수님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자들을 핍박합니다.  오늘날 물리적인 폭력은 법으로 막고 있기 때문에 드러나게 하지는 않지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싸이트에 가보면 수 없이 많은 반기독교적 싸이트들이 기독교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 샘물교회 선교팀 피랍사건을 보며 극심한 언어폭력의 핍박을 행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핍박이 크면 클수록 오히려 신앙은 강해지고 더욱 주님께 헌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저들이 아무리 핍박한다 할지라도 교회는 더욱 부흥될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요 16:33]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10-12)

  우리 또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복음 때문에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하며 버림받게 될수 있습니다. 세상 친구들로부터 버림받고, 부모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배반하고 버린다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찬 449장 1절)은 "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친구 날버리쟎네 온천지는 변해도 날버리지않네"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0:13)“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핍박하고 버리는 사람과 세상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시며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쓰시는 보배로우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4). 예수 보배가 있으면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고후4:9下)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린다는 것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과 순교라는 말은 동의어였습니다. 그 만큼 예수 믿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속사도와 교부시대 시대 로마의 총독들과 황제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부르는 것과 주님을 부인할 수 없는 신앙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황제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보배가 있기에 아무리 죽임을 당해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핍박하던 황제들이 회개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계로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습니다.

성도는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계1:18) “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님은 죽으셨으나 영원히 살고 계십니다. 이처럼 성도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도 영원히 살고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죽으면 죽을수록 더욱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2:10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죽을수록 생명이 왕 노릇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루스드라에서 전도를 할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돌로 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지않고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 일어났습니다. 대적자들에 의해 거꾸러뜨림을 당했지만 망하지 않았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때론 죄로 실족하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대적자들로 인하여 넘어지거나 하나님의 징계로 넘어져도 절대로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심령에 그리스도의 보배를 가지고 있는 성도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넘어졌다 할지라도 다시 일어섭니다. 실패했어도 다시 재기하여 성공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바울의 담대한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보배를 가진 성도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낼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예수의 죽인 것”은 십자가를 가리키며 “몸에 짊어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교회를 위한 수고와 봉사를 가리킵니다. 다음으로는 교회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위해 수고하며, 봉사하며, 희생하며, 고난당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예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예수의 생명은 먼저 복음의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다음으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교회를 평안케 합니다. 이것이 곧 예수의 생명의 나타남입니다.
무사안일한 신앙, 형식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직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며 고난당하는 성도만이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나타낼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는 사람만이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참 성도임을 명심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을 돌아볼때 약한 질그릇이라고 낙심하십니까?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다고 답답하십니까?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보배이신 예수의 영으로만 충만하다면 세상이 아무리 살기 어렵고 시험과 환난이 많아도 다 이기고 이기며 오히려 천국으로 바꿀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주의 영으로 충만하게 사느냐입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질그릇과 같지만 보배 되신 예수님이 안에 계시면 특별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특별함이란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음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 답답함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다. 그것은 성령의 기쁨이 더욱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 그리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을수록 더욱 생명으로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쁨으로 참여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나타낼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연약한 질그릇속에 담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를 세상에 자랑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를 잘 믿음으로 질그릇속에 성령의 풍성한 보배로 가득한 채우는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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